1987년 드디어 한의대를 졸업했다. 그동안 부모님은 공장을 하면서 2~3채의 집을 갖고 있었으나 6남매를 공부시키고 결혼시키면서 집도 다 팔고 그가 졸업할 무렵에는 전세집에 살고 있었다.

2015년도 올해의 장애인상 수상. ⓒ이복남

당장은 한의원을 개업할 형편이 못 되기에 페이닥터(봉직의사)를 하려고 했는데 그를 받아 주는 한의원이 없었다. 그러다가 마산에서 페이닥터로 근무하게 되었는데, 6개월쯤 지나 부산의 한 절에서 운영하는 한의원에 자리가 있어 부산으로 옮겨왔다.

그는 페이닥터가 아니라 자신의 한의원을 갖고 싶었지만 집안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페이닥터로 근무한 지 1년 반쯤 지났을 때 한 신도가 동래시장에 건물이 있다면서 그에게 들어오라고 했다. 그는 사실 사무실 전세 얻을 돈도 없었다. 그 신도는 그냥 쓰라고 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대출을 받아서 시세의 반값정도로 전세를 얻어 한의원을 차렸다.

“한의원을 차렸을 때 돈이 없다 보니 친구들과 선배들이 칸막이를 쳐주고, 방문을 달아 주고,장판 벽지까지 도맡아 해 주었고, 한의원 선배님은 자신이 쓰던 약장을 가져다주는 등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강병령 씨의 단체 활동. ⓒ이복남

그 당시 그의 한의원은 2층이었다. 한의원이 2층인데 손님은 고사하고 양목발을 사용하는 본인은 어떻게 다녔을까.

필자가 강병령 원장을 인터뷰하기 전에 제일 궁금했던 사항이었다. 직접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니 이층 따위는 문제도 아니었다. 그는 중학교부터 2~3층은 자유자재로 오르내렸다는 것이다.

어느 날 한 지인이 발달장애아 나들이가 있는데 (의사 봉사자로) 참여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가보니 연산동에 있는 발달장애아연구소라는 곳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자연스레 그곳을 드나들면서 원장으로 있던 강경희(1963년생) 씨와 서로 좋아하게 되었다.

당시 강경희씨는 특수교육과를 졸업하고 대구대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양가에서 결혼을 반대했다. 그의 부모님은 동성동본이라 안 된다 했고, 여자 쪽에서는 동성동본에다 장애인이라는 이유가 하나 더 붙었다.

몇 달을 두고 그의 부모님은 어느 정도 설득을 하였으나, 장인 될 분은 절대로 안 된다 하여 경희 씨와 어머니는 집을 나와 처남 집에 거처하기도 했다. 두어 달이 지난 후에 장인어른의 반대는 어쩔 수 없다는 각오를 하고 청첩장을 들고 장인을 찾아 갔다.

“우리는 성인이니 정 아버님께서 반대를 하신다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는 장인에게 인사를 드리고 청첩장을 드리고 왔는데 처남이 어떻게 설득을 했는지 장인어른이 다음날 함을 들고 오라 했고, 물론 결혼식에도 참석했다.

“우리 부모님은 두 분 다 돌아가셨지만, 요즘도 저를 제일 반기는 사람은 장인입니다.”

아내는 대학원을 마치고 현재는 부산대에 강의를 나가고 있고, 슬하에는 의대 대학원에 다니는 큰딸과 고3인 작은 딸 그리고 고1의 아들이 있다. 자녀들도 아버지를 끔찍이 여기며 잘 따라준단다.

그동안 가족들과 그리스 이탈리아 스위스 등 유럽여행을 비롯하여 알래스카 호주 등 여러 곳을 여행 했는데 그가 휠체어를 사용할 때는 아이들이 휠체어를 서로 밀겠다고 실랑이를 할 만큼 아빠를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한단다.

그는 결혼을 하고 아들딸을 키우면서 11년 전에 동래시장에 5층 건물을 지어서 ‘광도한의원’이라는 간판을 새로 달았다. 그는 디스크와 관절염을 잘 고치는 한의사로 이름이 나서 광도한의원은 동래시장에서는 일종의 쉼터가 되었다.

한의원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그는 가진 것을 나누기 시작했다. 2001년부터 부산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이사로 참여하면서 활동하기 시작했고, 2003년부터는 그의 모교인 동래고등학교에 인봉장학회를 설립해서 매년 1,000만원을 기부하여 후배들을 지원하고 있다.

부산장애인사격연맹을 후원했고 2007년부터 대한장애인요트연맹을 창단해 회장대행으로서 선수와 코치 50여명을 육성하고 있다.

2015년도 장애인상 상금 기부. ⓒ이복남

그동안은 주로 장애인단체를 후원하는 편이었으나 몇 년 전부터는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는데 계기가 있었다. 계단을 오르다가 넘어지면서 인대가 끊어져 목발을 짚을 수가 없어서 1년 4개월 정도 휠체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목발과 휠체어는 천양지차였습니다.”

좀 불편해도 목발을 짚고는 못 갈 곳이 없었는데 휠체어로 갈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휠체어로도 못 가는 곳이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현재는 부산장애인총연합회 부회장을 비롯하여 부산장애인체육회 부회장, 부산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이사, 한국장애인정보예술협회 수석부회장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2003년부터 희망을 여는 사람들 공동대표에서 현재는 이사장을 맡고 있는데 2011년부터는 ‘두드림교복센터’를 만들어 매년 1만2천 여벌의 기증받은 교복을 수선해 1~2만원으로 저렴하게 판매하고 있다.

그 외에도 부산창조재단, 심장병과 난치병아동 치료비를 후원하는 U.K.O회장, 부산시 경찰청 외사위원 등에도 참여하느라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판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행사에는 직접 참여한다고 했다.

이런 공로로 2006년에는 자랑스런 부산시민상, 2004년에는 교육부총리 표창을 받았고 지난 4월 40일에는 ‘올해의 장애인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이날 받은 1,000만원의 상금 중 본인의 사비 1,000만원을 더 보태어 그 중에 800만원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에, 나머지 1,200만원은 다른 장애인 및 희망을 여는 사람들 등에 기부했다.

그가 이처럼 바쁘게 사는 것은 장애인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더 나은 삶의 환경과 행복을 위해서란다. 사람들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건강하고 화목한 가정이 필요하다.

건강은 육체의 건강 뿐 아니라 마음의 건강이 더 중요하므로 누구든지 건강하고 따듯하고 평화로운 가정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의 행복은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하는 따뜻한 밥상이란다. 가족들과 함께하는 따뜻한 밥상이 오래오래 지속되기를 빈다. <끝>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발송 ablenews@ablenews.co.kr-

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