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넘어지고 자빠지면서도 결석 한 번 안하고 중학교를 졸업했는데 집안 형편을 돌아보니 고등학교 진학을 할 수가 없었다. 엄마 아버지가 일을 하셨지만 네 식구가 먹고 살고, 두 동생이 공부를 해야 했기에 그는 고교진학을 포기하고 사상에 있는 신발공장에 들어갔다.

“신발 가죽을 개비서(개다) 동개동개(차곡차곡) 묶는데 내가 제일 잘 했어요.”

청계천에서. ⓒ이복남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손놀림이 빨라서 일을 잘했다. 사람들은 ‘옥남이 손끝 참 야물다’며 칭찬했고, 그는 최우수 사원으로 뽑혀서 상으로 쌀 포대를 받기도 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다리를 절기 시작했고 손놀림도 예전 같지가 않았다. 회사에서 장애진단을 받아 오라고 해서 처음으로 장애4급으로 받았다. 장애인을 고용하면 회사에도 약간의 혜택이 있었던 모양이다.

신발공장에 6년 쯤 다녔을까. 손놀림이 빨라서 언제나 1등을 했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손놀림이 둔해졌다. 손에도 마비가 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더 이상 신발공장을 다닐 수가 없어서 억척스럽게 다니던 신발공장을 그만두고 그제야 처음으로 병원을 찾았다.

“종합병원이었는데 의사도 병명을 잘 몰라서 잘 묵고 잘 살라고 하데요.”

노옥남씨의 처녀시절. ⓒ이복남

그 때까지만 해도 그의 병명도 잘 몰랐을 뿐 아니라 어머니의 유전이라는 사실도 잘 알지 못했다. 어머니는 병명도 원인도 잘 모르지만 자기를 닮은 딸이 애처로워 개금에다 조그만 만화방을 차려 주었다.

“만화방은 혼자서 사부작사부작 잘 할 수 있었는데 2~3년 지나니까 가게를 비워줘야 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가게를 접고 집에서 몇 달인가 쉬고 있는데 어느 지인이 햄버거 공장을 소개했다. 햄버거 등을 만들어서 학교 등의 매점에 납품을 했는데 그는 햄버거를 만들었고 납품은 사장이 했다.

“하루는 사장님이 손님을 데려와서 인사를 시켰는데 젊은 남자였어요.”

그 남자가 김 00(1961년생) 씨로 그의 남편이다. 남자가 그를 좋다고 했지만, 손가락에 장애가 있는 지체5급이고 직장도 없는 백수에다 부자도 아니었다. 더구나 그는 결혼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 본적 없었기에 무엇을 따져보고 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어영부영 하다가 양가의 결정대로 결혼 날짜가 정해지고 그렇게 5월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남편과 부곡하와이에서. ⓒ이복남

그는 웃으며 얘기했지만 지금이라면 절대로 그런 조건의 남자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 때는 눈에 뭐가 씌었는지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안 보이더란다

“결혼을 하고 처음에는 하단에 살면서 보험회사에 다니다가 배가 불러와서 그만두었습니다.”

결혼은 했지만 아이는 낳지 않겠다고 했다. 확실한 병명은 잘 모르지만 그의 근육병이 유전된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남편하고 약속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아이가 생겼고 1994년에 딸을 낳았다. 남편은 용달 일을 했지만 가게는 쪼들렸고 수중에는 돈 한 푼 없었다.

“그 때 처음으로 봉지쌀을 사오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든지…….”

그의 모습이 안타까운 친정 어머니가 강서 쪽에 구멍가게를 하나 얻어 주셨다. 가게에서는 잡화를 팔고 술도 팔았기에 그는 술안주로 찌개를 끓이고 삼겹살을 구웠다. 모두가 도와준 덕분에 장사는 제법 쏠쏠했기에 얼마 후에는 어머니가 해 준 전세값도 갚을 수가 있었다.

그동안 남편의 직업은 몇 번 바뀌었으나 딸은 엄마를 졸졸 따라 다니면서 무럭무럭 자랐다.

“우리 딸 정말 이쁩니다. 안 낳았으면 어쩔 뻔 했겠어요.”

지금은 그냥 평범한 아이지만 어렸을 때는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똑 부러지게 다부진 딸아이는 그의 희망이자 즐거움이었고 세상에 외치고 싶은 자랑거리였다.

노옥남씨의 금쪽 같은 어린 딸. ⓒ이복남

딸이 커가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딸의 종합검사를 했는데 천만다행으로 딸에게는 그 병의 유전인자가 없다고 했다. 딸은 그의 유전인자를 대물림 하지 않았다고 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부모의 무지로 인하여 나와 같은 고통을 물려주게 되었다면 그 아픔이나 고통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때부터 그도 어머니의 심정을 조금씩 헤아리기 시작했다.

“자식을 낳아봐야 철이 든다는 옛말이 딱 맞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무렵 우연히 알게 된 희귀질환자모임에서, S한방병원에서 저처럼 근육에 힘이 없는 사람들을 진료한다니까 한번 가보라고 하데요.”

그는 그래도 행여나 하는 희망을 가지고 S한방병원을 찾았다. 근디스트로피, 루게릭병 등 희귀질환자들이 다 모인 것 같았다. 그를 진료한 의사는 무슨 병이냐고 물었는데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때까지 그는 병명도 몰랐던 것이다.

“다시 부산으로 내려와서 대학병원 찾았더니 그때서야 CMT라고 합디다.”

CMT 즉 샤르코 마리 투스 질환(Charcot Marie Tooth disease)은 인간의 염색체에서 일어나는 유전성 질환이다. 샤르코 마리 투스 질환 환자는 손과 발의 근육들이 점점 위축되어 힘이 약해지며, 손모양과 발모양에 변형이 일어난다. <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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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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