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2학년 여름 방학 때 처음 다쳤다고 했는데 그해 가을부터 겨울 내내 앓았고 봄이 와도 일어나지 못했다. 3학년 1학기는 3월 2일부터 시작하는데 4월이 되어서야 학교에 다녔다. 다치기 전에는 반에서 1~2등을 했다는데 성적은 뚝 떨어졌다. 1학기 공부를 제대로 못 한 탓도 있겠지만 그는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고향에서 친구들과. ⓒ이복남

그가 듣지 못해서 3학년 때는 60명 중에서 34등이었으나 4~5학년 때는 20등 안에는 들었고 6학년 때는 7등까지 했다. 그는 선생의 판서와 입모양을 보고 교과서를 반복해서 읽음으로서 좋은 성적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그는 노래도 잘해서 1~2학년 때는 전교 독창 대표로 나가기도 했고 5학년 때는 소풍가서 노래를 불러 입상을 하기도 했다.

“지금도 노래를 좋아하지만 음정이나 박자 같은 것은 잘 모르고 부릅니다.”

그는 2학년 때까지는 말을 잘 했기에 몇 십 년이 흐르는 동안 듣지 못했기에 지금도 어눌하지만 말은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어렸을 때는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잘 느끼지도 못 한 채 학교에서 돌아오면 농사를 지으시는 어머니를 거들기도 했다. 어머니는 보리 밀 조 수수 고구마 등의 밭농사를 지으셨는데 가을이면 마늘과 시금치도 심었다.

“소도 세 마리나 있었어요.”

그 때만 해도 소가 3마리나 있는 집은 제법 잘 사는 집이었기에 송아지를 낳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도 했다. 그런 소도 나중에는 아버지의 빚보증에 다 넘어 갔단다.

“중학교에서는 농아라고 안 된다고 했어요.”

그는 00중학교에 시험을 쳐서 합격을 했지만 학교에서 청각장애인은 안된다고 하자 부모님은 한숨을 내 쉬었다.

“부모님들이 많이 걱정했나 봅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재수생이 되었고 다음 해에 부산맹아학교(釜山盲啞學校) 농아부에 입학했다.

“내가 부산 서면에 살고 있어서 재양이가 우리 집에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문경 야유회. ⓒ이복남

큰누나에게는 어린 아들이 있었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서 아들을 업고 동생의 도시락을 사서 학교로 보냈다. 어쩌다 도시락을 안 챙겨 가는 바람에 큰누나가 그 사실을 알고는 도시락을 들고 뛰쳐나가 ‘재양아, 재양아’ 불러 보아도 그는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인이었다.

“하는 수 없이 아이를 들쳐 업고 송도에 있는 맹아학교까지 도시락을 갖다 주곤 했습니다.”

부산맹아학교에서 3년 동안 공부는 1등을 했지만 수화를 잘 못해서 학생회장은 못했다. 그 당시에는 부산맹아학교에 고등부가 없었다. 일반 중학교 입학을 거절당하면서 공부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중3이 되자 학교에서는 직업교육으로 몇 가지를 가르쳤는데 그는 양복을 배웠다. 그 무렵 가족들에게 빚만 안겨 놓고 아버지가 돌아 가셨다.

“아버지가 호인이시라 남을 잘 도와주었고 특히 빚보증을 서는 바람에 배도 다 넘어 갔습니다.”

큰누나의 설명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재양이 더러 서울 농아학교로 가라고 했지만 그는 싫다고 했단다. 그는 부산맹아학교를 졸업하고 3학년을 다시 다니면서 양복기술을 배웠다.

“그 당시 맹아학교 월사금은 500원 쯤 했는데 졸업 후 다시 다닐 때의 학비는 안 받았습니다.”

그렇게 양복기술을 익히고 일류는 아니었지만 기술자로 양복점에 취직을 했다. 처음에는 중앙동에서 시작했으나 당감동으로 서면으로 2~3년 마다 양복점을 옮겼다. 왜 그렇게 자주 옮겼을까.

“그 때는 돈내기였는데 옮길 때마다 돈을 더 받았어요.”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복남

한 달에 15~6만 원 정도 벌었는데 웬만한 회사원 월급보다 많아서 촌에 있는 동생들을 데려다가 공부를 시켰다. 그 때만해도 시골에서 여자들은 공부를 안 시키려고 했는데 그가 돈을 잘 벌어서 어머니는 시골에 혼자 사시고 동생들은 그와 같이 살면서 학교에 다녔다.

스물다섯 살 무렵 큰 누나가 참한 아가씨라며 박00(23살) 씨를 소개했다. 몇 달 후 그는 박 씨와 결혼했고 아들 하나를 나았다. 그런데 1980년부터 잘 나가던 양복이 기성복에 밀려서 사양길을 걷기 시작했다. 고객이 없는 양복점을 더 이상 붙들고 있을 수가 없어서 1990년 양복점을 접고 영도에서 세탁소를 차렸다. 어깨 너머로 배운 기술로 세탁소를 차렸으나 세탁소는 제법 잘 되었다.

“세탁소가 유망할 것 같았고 양복 일을 하다보면 세탁 일은 저절로 배우게 됩니다.”

송도에 있던 부산맹아학교에는 맹인부와 농아부가 있었는데 1974년 맹농(盲聾)이 분리되어 부산농아학교가 되었다가 1980년 망미동으로 이사를 했고 1992년 9월 부산배화학교로 개칭을 했다. (필자 주)

1992년 이재양 씨는 제6대 부산배화학교 총동창회 회장이 되었다. 그가 총동창회 회장이 되면서 졸업생들의 친선도모를 위해 체육대회를 개최하고 일일호프 등으로 기금을 모아 장학위원회를 만드는 등 여러 가지로 노력한 덕분인지 총동창회 회장은 8대까지 3번을 연임했다. <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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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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