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도 꼭 고쳐야 한다고 믿는 그의 다리에 대해 어머니에게 남은 마지막 카드는 수술이었다. 자식의 몸에 칼을 대고 싶지는 않았지만, 해 볼 수 있는 모든 방도가 말짱 꽝이 되어버리자, ‘완치’가 아니라 ‘지금보다 조금 더 좋아지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여수애양병원에서 이미 진단을 받고 수술 일정을 잡아놓은 적이 있었지만, 어머니의 건강악화로 그의 수술은 무기한 보류되었다.

남편과 어머니. ⓒ이복남

다시 여수애양병원을 찾았을 때, 소문을 듣고 전국에서 찾아온 환자의 수술예약은 꽉 차서 그가 들어갈 틈이 없어서 고등학교 졸업까지 기다려야 했다. 졸업하던 해, 이화여대 장식미술학과를 지원했던 그는 실기시험 때문에 낙방을 했고, 재수 중에 수술을 했다. 보조기를 하고 목발을 짚고 20여년 만에 다시 땅을 밟아 보게 되었다.

그 해 학력고사를 보고, 서울대학교 응용미술학과와 성균관대학교 의상학과를 두고 잠깐 고민을 했다. 어차피 패션 디자이너가 되는 공부를 하고 싶었고, 실기부담도 없는데다가 장학금까지 챙길 수 있는 성대를 택했지만 입학하고서는 후회했다.

세상에는 옷을 잘 입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많고, 인생에는 더 의미 있는 일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타고난 아름다운 몸매의 사람들을 더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의상을 디자인하고 만드는 일이 그가 할 일은 아니라는 회의가 들었다.

졸업 후에는 다시 부산으로 내려와 보습학원을 차렸다. 경험도 없이?

“저 같은 사람을 누가 고용해주겠어요? 커리어를 만들어주고 싶은 부모님의 지원을 받아서 학원을 차렸는데, 아주 잘 되는 거예요. 상담력이 좋고, 학력도 좋잖아요. 국어, 영어, 수학 다 잘 해서 다 가르칠 수 있었지만 저는 과목을 영어로 선택했습니다.”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다보니 실력을 좀 더 쌓아야 되겠다 싶어, 호주로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돌아와서는 대학에서 토익 특강 기회를 만들었다. 막상 시작하려니 학생들이 장애인인 그를 어떻게 생각할지 더럭 겁이 났다. 영어란 원래 어려워 피하는 과목인데, 강사까지 보기 싫다면 누가 공부하러 올까?

댄스스포츠 경기 입장. ⓒ이복남

고심하다가 강의 안내 포스터에 상체의 사진을 크게 넣었다. 마치 피아니스트의 연주포스터처럼. 장애보다 사람으로 먼저 인식되기 위한 나름의 전략이었다. 전략은 유효했다.

그렇게 학생들로부터 인기와 신뢰를 얻었다. 영어강사를 하면서 돈도 벌었고, 외국인 친구들도 생겼고, 기업체 직원들에게 강의도 했다. 또한 다른 대학과 학원에서 스카우트도 들어왔다. 자신의 노동력을 고가로 팔 수 있다는 자신감과 성취감이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늘 남아있는 아쉬움. 그는 장애인도 이렇게 평범하게 성공하고, 소박하지만 알차게 행복할 수 있음을 알리고 싶은 소망을 늘 가지고 있었다.

장애인일수록 더욱 자신을 가꾸고 외모에 신경을 쓰면 그만큼의 효과도 있음을 누구보다 실감했기에 다른 장애인들과 그 노하우를 나누면 세상 사람들이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여러 가지 옷을 입어 보면 자신에게 어울리는 색깔과 스타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장애인에게는 옷을 많이 고르고 입어볼 기회가 없어요. 어느 새 자신의 외모에 대해 외면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사회로부터 멀어집니다.”

그래서 장애인들끼리 모여서 서로 옷을 바꿔 입어도 보고, 구입도 하고, 제작도 하면서 외모를 향상시키는 모임, 일명 ‘코디클럽’을 하나 만들어볼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행여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 인터넷 검색을 해보다가 깜짝 놀랐다.

직접 리모델링한 윤정희 씨 집 입구. ⓒ이복남

세상에나! ‘한국장애인의상연구소’라는 홈페이지가 있었던 것이다. 클릭해서 들어가 보니, 그가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더 체계적으로 꾸며져 있었고 놀라운 작품들로 가득했다. 지체 장애인을 위한 기능성의상 뿐만 아니라, 다른 유형의 장애인을 위한 디자인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누가 이런 작업을 했을까 찾아보다가 김성윤 소장의 사진을 만나게 되었다. 장애인은 아닌 것 같았다. 도대체 이 사람은 어떻게 된 사람일까? 장애인도 아니면서, 왜? 가족 중에 장애인이 있나?

진심으로 감탄이 나오는 한편, 묘한 심보도 고개를 쳐들었다. 장애인을 위한 편한 옷이라고? 그는 자유게시판에 도발적인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불편한 옷을 입고 싶다.’ 사람들은 장애인은 편한 옷을 입어야 된다고만 생각하는데, 한마디로 그런 생각이 싫다. 여자의 옷은 원래 불편한 거다. 미니스커트, 타이트한 블루진, 비키니, 하이힐, 웨딩드레스, 이브닝드레스……. 불편하지 않은 옷이 어디 있는가? 나는 이런 불편한 옷을 입고 싶다. 이런 옷을 입고 가야 하는 장소 초대받고 싶다.

장애인에게 조금이라도 편한 옷을 선보이고자 했던 소장은 이 글을 읽고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생각해보니 좀 미안하다는 느낌도 들어, 그 위에 다른 글을 먼저 올렸다.

‘내가 치마를 처음 입던 날’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체험을 적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치마란 꿈도 못 꾸게 했다. 흉한 신체는 꼭꼭 숨겨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서울에서 생학생활을 하면서 그는 구부정한 하체를 감추는 것은, 바지보다 치마가 훨씬 효과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다리의 노출은 살색 부츠로 커버하면 될 것 같았다. 부츠를 디자인해서 수제화점에서 맞추고, 치마를 직접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그걸 입고 나가는 순간이 너무 어려웠다. 다리 사이로 스쳐가는 바람이 아랫도리를 홀딱 벗은 것만 같았다. 대문 앞에서 들어왔다 나갔다를 몇 번 반복하던 끝에 스트립쇼를 하는 용기로 딱 눈감고 걸어 나갔다.

남편과 어머니와 함께. ⓒ이복남

그런데 막상 거리에 나가니까 아무도 그의 치마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 후 여러 가지 치마를 만들어 입고 다녔는데, 어느 날, 꼬마가 지나가며 그를 빤히 쳐다봤다. 장애인들이 제일 곤혹스러운 순간이다. 하지만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엄마, 저 언니, 왜 저렇게 걸어?’가 아니라, ‘우와! 예쁘다.’였다.

그 후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면 예뻐서 보는가 보다 라며 행복한 착각을 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장애인에게 옷은 매우 중요하다고 쓰면서 장애인 의상 연구소가 있어서 좋다고 끝맺음을 했다.

그 후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 후속 프로그램으로 벡스코에서 장애인 패션쇼를 의상연구소에서 주최하면서 그는 김성윤 소장을 만났다. 장애인 모델에 지원하면서 디자인과 코디네이션까지 도와주면서 일을 같이 하게 되었다. 장애인 패션쇼를 그 후에도 몇 차례 더하면서, 방송에 출연할 기회도 있었다. 그는 장애인도 뭐든 할 수 있고 얼마든 행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는데, 결과물을 보면 늘 아쉬웠다.

비영리 민간단체인 의상연구소 활동을 지금은 잠정적으로 접고 그는 김성윤 소장과 다른 사업을 같이 하고 있다. 무슨 사업?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일,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알콩달콩 재미난 부부로 열심히 살아가는 일 즉 결혼사업이다..

그런 모습을 보며 그의 어머니가 비로소 그를 믿어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행여 몸이 불편한 딸을 이용해먹고 달아나지나 않을까하는 우려에 반대를 했지만 이제는 너무 너무 든든한 살가운 막내 사위를 보며 그의 어머니는 이제야 딸의 행복을 믿어준다고 한다.

“결국, 내가 엄마를 이겼어요. 올해가 장애 50년 되는 해인데요, 그동안 한 번도 엄마에게 힘들다거나 원망하는 말을 한 적이 없었어요. 엄마를 이겨야했거든요. 이제야 엄마가 후회를 하죠. 아이고~ 이렇게 잘 살걸, 내가 그때 와 그렇게 걱정을 했던지……. 내가 바보였다! 라고. 엄마를 완패시키고 이렇게 행복한 자식은 세상에 없을 거예요. 이제 세상을 완패시켜야죠.”

지난 해 그와 그의 남편은 금정장애인자립생활센타와 함께 장애인 메이크오버 패션쇼를 만들어서 지난 연말을 훈훈하게 만들기도 했다. 참가하는 장애인들이 행복한 만큼, 바라보는 비장애인들도 행복감이 마음에서 넘쳐나는 쇼다.

“이런 게 내가 세상을 이기는 방법이죠. 우리가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는 대상을 정말 행복하게 만들어버려서, 그들의 존재를 세상에서 말살시켜버리는 것, 정말 통쾌하지 않나요?”

앞으로도 윤정희 씨의 백전백승을 기대해본다. <끝>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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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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