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뭐가 문제였을까? 아이러니하게도 매일 그를 업고 다니던 언니 때문이었단다. 교묘한 방법으로 구박과 학대를 하면서 그에게 극도의 긴장과 불안을 주었다. 언니는 기분에 따라 그에게 화를 냈다. 별로 잘 못하지 않은 일로 야단을 쳐서 혼란과 모욕감을 주었다.

집에 가는 길에는 그를 내려놓고 가버리겠다고 협박을 했고, 실제로 어느 골목에다 그를 내려놓고 혼자 가버린 적도 있어서, 공포감과 무력감에 한참을 울기도 했단다. 언니는 등하교 길에 다른 아이들에 대해 품평을 늘어놓았다. ‘쟤는 참 못생기고 더럽다’ ‘쟤는 참 예쁘다’ 예쁜 아이에게는 다가가 칭찬하며 그 아이하고만 대화를 나누며 걸어갔다. 그는 말할 수 없이 쓸쓸한 기분이 되었단다. 마치 그의 존재는 아예 없는 듯, 투명인간이 된 듯했다.

윤정희 씨. ⓒ이복남

“더 나빴던 건, 언니가 내 물건을 몰래 하나씩 감춰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늘, 산수 책이 하나 없었고, 이달의 공부 문제집도 사라지고, 필통도 통째로 없어지고, 크레파스도 없어지고 만들기 시간에 가져갔던 엄마의 가위도 순식간에 사라지는 겁니다. 얼마나 황당하고 불안했겠어요? ”

언니는 그걸 감추었다 친동생에게 가져다 주었까?

“아닐 거예요. 필통이나 가위는 몰라도 친동생과 학년차이가 있어서, 교과서나 ‘이달의 공부’같은 문제집은 소용없었어요. 오로지 저를 컨트롤하려고 그런 거예요. 제 물건도 하나 못 챙기는 아이라며, 엄마에게 일러주겠다고 늘 겁박했거든요. 그러면 저는 꼼짝을 못하고 기가 죽었어요. 초등학교 2학년이나 되는 애가 밤에 다시 오줌을 쌌던 건 그만큼 불안했다는 말이었어요. 언니는 제 야뇨증으로 다시 협박하더라고요. 말을 안 들으면, 학교에 가서 소문내겠다고…….악순환 속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어요.”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언니는 그를 표 나게 두들겨 패거나 때리지는 않았다. 엄마가 외출하고 집안에 사람들이 아무도 없으면, 갑자기 그의 뒷덜미를 잡고 코와 입을 커다란 손으로 막고 질식시켰다고 했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울고불고 온 몸이 땀과 눈물로 젖어 숨넘어갈 정도가 되면 언니는 손을 뗐다.

몸에는 손찌검이나 꼬집은 흔적이 남지 않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방법이었다. 아이라서 그 심정을 어떻게 말을 해야 할 지도 몰랐고, 말을 해서 설사 엄마가 언니를 야단친들, 바뀔 게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훗날, 그의 어머니가 지나가는 말로 “넌 어릴 적부터 니꺼도 하나 못 챙기고 항상 물건을 흘리고 다녀서…….”라고 말했을 때가 되서야, 비로소 그때 심정을 말할 수 있었다.

채소재배기 조립과 그가 만든 구체관절인형. ⓒ이복남

“혼자서는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이는 아이가 어디서 어떻게 내 물건을 그렇게 자주 잃어버렸겠어요? 쉬는 시간에 놀러 나간 것도 아니고, 화장실에 혼자 갔던 것도 아니고 늘 책상에 앉아 있었는데, 등하교 때도 언니가 늘 있었잖아요? 언니에게 물었어야죠, 너는 애가 물건 못 챙길 때 옆에서 뭐하고 있었냐고?”

그때서야 어머니는 ‘아차!’하는 표정으로 말씀 하셨다.

“나는 오로지 니 다리, 다리 밖에 생각이 없어서, 다른 것은 아무 생각을 몬했다.”

정말 그랬다. 좋은 성적표를 받아오면, 잠시 좋아하는 듯 하다가도 이내, ‘아이고, 공부는 이렇게 잘하는데, 다리가 이래서....’ 뭐든 잘하면 잘할수록 장애와 대비되는 재능이 아까워서, 그런 재능을 제대로 발휘도 못하고 힘들기만 한 삶을 살게 될 딸을 안쓰러워했다. 그의 어머니 생각에 장애인은 행복할 수가 없을뿐더러 행복하면 안 되었던 것이다. 모정(母情)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진 행복에 대한 부정(否定)이었다.

“멀쩡한 아이들도, 식모언니가 그렇게 괴롭히고, 엄마가 이런 말을 하면서 키우면, 낙오자나 정신이상이 될걸요.”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까지도, 오랫동안 어린 시절 마음의 상처가 회복되기까지 내면의 부대낌이 있었다. 지금, 그 언니에 대해서는 다 이해하고 있단다. 아니 처음부터 미워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그 언니도 힘든 삶을 살았던 거예요. 언니가 14살에 우리 집에 와서 내가 학교 다닐 때가 17~18살이었어요. 그리고 엄마가 집을 나가버린 결손 가정에서 내 또래 동생은 집에 놔두고, 다른 집에 일하러 와 있었으니, 그 심정이 오죽했을라구요.”

그의 친언니와는 1살 위였으니 친언니가 중학교, 고등하교 다닐 때 얼마나 비교가 되었겠는가. 그의 오빠들과는 2~3살 차이인데 작은 오빠가 워낙 개구쟁이여서 식모언니를 많이 놀렸는데 그 스트레스가 고스란히 그에게 투사된 것 같았다.

“어리지만 어렴풋이 나도 알았어요. 우리 집에서 내가 그 언니와의 끈을 놓으면 그 언니는 정말 외롭다는 것을. 그래서 그 언니는 나를 완전히 컨트롤해서 자기에게 속한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심리였겠죠.”

언니의 괴롭힘이 멈춘 것은, 서울에 있는 지압원에 치료를 하러가면서였다. 그의 부모가 엄청난 금액의 치료비와 생활비를 감수하면서 지압원을 찾은 것은 신문에 난 ‘장애인 판사’에 대한 기사 때문이었다.

사법고시에 패스한 예비 판사는 거기서 지압치료를 받고,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몸을 일으켜 사법연수원에 걸어서 출근했다는 기사였다. 그동안 숱하게 많은 병원에다 돈을 갖다 바쳤지만, 결국은 속았다는 생각만 하던 그의 어머니에게 그 소식은 믿을 수 있는 소스라는 확신을 주었다. 마치 대한민국 최고의 기관 중 하나인 사법원에서 그 효과를 보증이라도 하는 것처럼.

초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부터 4학년 1학기까지 치료했으나, 완치를 본 것은 다리가 아니라 야뇨증이었다. 언니가 식모가 아닌 완전한 보호자로 서울 생활을 하면서 스트레스가 줄었고, 그로서는 언니와 학교를 다니면서 받는 스트레스와 협박이 사라지면서 야뇨증은 100% 자연치료가 되었다.

윤정희 씨와 남편 . ⓒ이복남

어머니는 그 엄청난 비용 대비 극히 미미한 효과를 원통해하면서 그동안 미루고 미루었던 마지막 치료로 수술을 생각했고, 식모언니는 7개월간 자유와 독립을 맛본 탓인지 새 삶을 찾아서 그의 집을 떠났다.

언니가 떠난 후, 등하교는 범전동에서 자영업을 하던 아버지의 몫이었다.

“초등 3학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10년 채우려고 재수까지……. 꼬박 10년이나 저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다녔습니다.”

중학교는 가까운 부산진여중을 다녔지만 고등학교는 경남여고를 다녔다. 범전동에서 그 먼 수정동까지? 그 때는 뺑뺑이를 돌렸지만 경남여고는 옛 명문이었고 어른들의 로망이었다. 장애인은 우선 배정이라는 특혜를 그의 아버지는 그렇게 활용했던 것이다.

“어머니가 거의 무조건 걱정한 반면에 아버지는 현실적으로 제 교육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것은, 거래처의 사장님 딸도 소아마비 장애인이었대요. 약대를 졸업하고 약사로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도 하고 잘 사니까, 부모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공부를 시키는 거라고 그 사장님이 살뜰한 충고를 해주셨어요. 생면부지의 그 언니가 제 인생의 지표가 되었습니다. 근데 웃기는 건,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언니는 아주 경증, 일반인에 가까운 장애인이었다는 거죠. 그때 제 몸 상태는 약대나 한의대 과정 못 해냈어요. 제 발로 서 있지도 못하는데요. 게다가 나는 약사는 싫었어요.”

장애인에게는 보고 배울만한 인생의 롤모델이 없기 때문에 더 힘들었다고 한다. 그가 중학생 즈음 이런 일이 있었단다. 텔레비전에 장애여성이 나오기에 자신의 마음을 대변해 주리라 기대했다. 그의 어머니도 옆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다.

‘왜, 장애아의 엄마들은 쓸데없는 걱정을 하시죠? 걱정 마세요. 장애가 있어도 이렇게 잘 살 수 있다구요.’ 이렇게 말해주기를 잔뜩 기대했는데, 역시나였다. 그 여자는 정말 힘들게 살고 있고 남자에게 이용당해서 정말 죽고 싶다며 울었다.

그의 어머니는 딸의 장래를 보는 듯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언론에 나오는 장애인은 주체자로서가 아니라 동정과 배려의 대상이라는 것에 너무 화가 났다. 자기의 주장을 말하지도 않으며, 자신의 장애를 숨기려 하고 소극적이고 피해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게 너무 안타까웠다. 자신은 절대로 그렇게 살지 않겠노라 결심했다. <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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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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