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2년 3개월 만에 퇴원을 했다. 퇴원할 무렵에만 해도 그가 병원비를 걱정할 상황도 아니었는지 아내는 그에게 일언반구도 없었고 그는 그냥 순순히 퇴원을 했다. 그 당시에는 집도 없어서 수정 5동에 있는 큰누나가 사 둔 판잣집으로 갔다.

“나중에서야 박과장이 회사를 퇴직하고 그 퇴직금으로 병원비를 냈다고 들었는데 그 때는 박과장의 행방도 몰랐습니다.” 지금이라도 박과장을 다시 만난다면 그 때의 사례를 하고 싶단다.

가족나들이, 사위는 사진사. ⓒ이복남

그는 누나 집에서 술로 세월을 보냈다. 오른 쪽은 몇 번이나 수술을 했고 어깨부터 팔까지 전부 쇠를 박아 놓았는데 술에 취해서 죽겠다고 방바닥을 뒹굴면 실밥이 터져 방바닥에는 피가 흥건했다.

“술을 마셔도 안 죽고 약을 먹어도 안 죽데요.”

그러던 차에 아내는 둘째를 가져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아! 어쩌다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는구나. 어느 날 그는 정신을 차렸다.

지인의 소개로 건축회사에 들어갔다. 그는 오른쪽 팔을 사용할 수가 없으므로 처음에는 건축회사에서 잔심부름을 했다. 그런데 건축 일에는 나름대로 재주가 있었는지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작업반장이 되고 그러다가 작업을 지시하는 총감독이 되었다.

“건축현장에는 저 같은 사람도 다 쓸모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건축현장에서 총감독이 되자 가정 형편도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에 초등학교에 다니던 둘째 딸의 담임선생이 국악에 소질이 있는 것 같다면 지수복 선생을 소개했다. 둘째 딸은 지수복 선생의 문하에서 가야금병창을 배우기 시작했다.

(가야금병창이란 노래와 반주를 한 사람이 겸한 것으로 창이 주가 되고 가야금은 부가 된다. 기원은 남도에서 가야금산조(伽倻琴散調)가 발생할 무렵 함께 발생한 것으로, 당시 가야금산조로 이름을 떨치던 연주가들은 대부분 가야금병창을 겸하였다.

가야금병창에 부르는 노래들은 따로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단가나 판소리 중의 한 대목, 또는 민요 등을 가야금의 선율에 맞게 기악화하거나, 가야금의 선율을 노래의 선율에 제주(齊奏)한 것이다. 그러나 가야금은 노래를 따르는 것이 원칙이고 소리가 없는 공간을 기악선율로 메우거나, 가끔 간주를 넣어 흥을 돋우는 것이 대부분이다. -두산백과에서 발췌, 필자 주)

“우리 딸이 가야금병창을 배우면서 대회에 나가기만 하면 상을 타 왔습니다.”

그는 신이 났고 딸이 자랑스러워 더욱 열심히 일했다. 딸이 중학생이 되자 그동안 직장에 다니던 아내가 딸을 뒷바라지하기 시작했다. 악기를 들고 한복을 입혀야 했던 것이다. 딸은 부산동여자중학교를 다녔는데 전주대사습놀이 중등부에서 장원을 했다. 동여중은 물론이고 동구청에서도 자랑스러운 동구의 딸이라는 플래카드가 나붙고 여러 언론에서 취재를 하러 오기도 했다.

딸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중앙대학교 국악과에서 스카우트되어 기숙사에 들어갔다. 그 무렵부터 그의 건축 일이 사양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IMF로 인해 집이 팔리지 않았던 것이다.

큰 딸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시집을 갔다. 둘째 딸은 자신이 돈 벌어서 부모님 모실 테니 아버지에게 잘 안 되는 건축 일을 그만 두라고 했다. 딸이 대학을 가면서부터 딸에게 특별히 돈이 들어간 것은 아니었지만, 딸의 권유도 있고 해서 건축 일을 그만 두자 파급이 컸다.

“우리가 딸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딸을 우리를 걱정해서 대학원 진학을 포기합디다.”

딸이 부모님 용돈을 벌기 위해 대학원을 포기하고 음악학원을 차렸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딸은 제33회 춘향국악대제전 가야금병창부문에서 장원을 했고, 제38회 전주대사습놀이 가야금병창부문에서는 차상을 받는 등 크고 작은 상을 받았다. (춘향국악대제전는 전라북도 남원시에서 매년 춘향제 기간에 개최되는 전국 규모의 국악경연대회로 1974년에 시작되었다. 전주대사습놀이는 해마다 단오 무렵 전주에서 벌어지는 판소리를 중심으로 한 민속음악경연대회인데 조선 영조 때 시작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중단되었다가 1975년에 복원되었다. -필자 주)

김동유 씨와 손녀. ⓒ이복남

둘째 딸은 현재 중앙대학교 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쪽진 머리에 산호잠을 찌르고 무대에 앉아 어깨춤을 추면서 가야금 병창을 하는 딸은 그의 자랑이자 희망이다. 그는 딸이 부르는 노래를 잘 모르지만 딸이 부르는 적벽가나 만고강산은 조금 안단다.

‘만고강산 유람할 제 삼신산이 어디메뇨, 죽장 집고 풍월(風月) 실어 봉래산을 구경 갈 제…….’

그런데 둘째가 너무 뛰어나면 첫째가 위축되지는 않을까.

“우리 집에는 그런 것 없습니다. 큰 딸은 전주에 사는데 언니도 동생을 좋아하고, 우리 큰 딸도 자랑스럽고. 손주가 보고 싶어 우리도 전주에 자주 갑니다.”

그의 어릴 때의 꿈은 돈 잘 버는 사업가가 되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었다. 그 꿈은 이미 물 건너 간 것 같았지만 건축 일을 그만 두면서 요즘은 동구지역연합회에서 부회장을 맡아서 어려운 장애인들의 고충상담을 하면서 봉사하고 있다.

딸은 그의 희망이자 삶의 활력소였다. 더구나 딸들은 한 번도 아버지의 장애를 문제 삼지 않았고 친구들에게 아버지를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은 자랑스러운 딸들이 이뤄 줄 것이므로…….<끝>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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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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