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1호 화면해설작가 장현정 작가.ⓒ에이블뉴스

“시각장애인의 가려운 등을 긁어주는 사람, 그것이 바로 접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들에게 또 하나의 세상을 보여주는 이가 있다. 소리만 듣고 무슨 영상이 흐르고 있는지 글로써 전하는 인물, 우리나라 1호 화면해설작가 장현정 작가(만45세)를 만났다.

‘뜨겁게 이글대는 태양이 서서히 몰려오는 구름에 덮여 그 기세를 잃어가고 있다/ 태국 방콕의 도로에 뚜껑 없는 하얀 세단이 달려온다./ 운전을 하고 있는 남자는 사내다운 기상과 강직한 풍모를 갖춘 김선우/ 그가 굳은 표정으로 가속페달을 밟는다’

몇 년 전 KBS에서 화제로 떠올랐던 드라마, ‘적도의 남자’를 시각장애인이 보는 방식이다. 화면해설, 우리에게는 아직까지 낯선 장르일 수밖에 없다.

소리 없이 화면으로만 진행되는 부분의 행동과 배경, 표정과 몸짓, 자막과 그래픽 같은 내용 등을 시각적으로 설명, 시각장애인이 영상물을 접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서비스. 단순한 화면전달이 아닌, 복잡하고 시각적 요소를 간결하면서도 명확한 영상언어로 구체화 시키는 것이 목표. 그 일등공신이 바로 화면해설작가다.

장 작가의 화면해설 인생은 벌써 올해로 16년째, “나 자체가 화면해설”이라고 소개한 그녀는 화면해설의 역사 속에 고스란히 묻어있다. 장 작가가 화면해설과 만난 것은 지난 1999년. 미국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을 보면서부터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테이프 녹음을 통해서만 소설, 일간지, 주간지를 시각장애인이 접할 수 있었다.

‘화면해설로 TV와 영화를 볼 수 있다니.’ 큰 충격을 받은 장 작가는 1년여 간의 준비기간을 통해 현재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미디어 접근센터 황덕경 센터장, 서수연 작가와 한국적 화면해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동양과 서양의 정서가 완전 달라요. 미드를 보면 영상 전환이 빠르고 타이트하고, 감성이나 사색적인 것을 다루지 않잖아요. 우리나라는 60분이 넘어가고 한 인물 심리상태를 다루는 장면이 많아요. 미국에서의 건조한 인물의 행동 동선 설명을 우리나 라식으로 만들었죠.”

그렇게 만든 작품이 바로 지난 2000년 제1회 장애인영화제에서의 ‘공동경비구역 JSA’란 작품이다. 당시는 영화제 상영관에 부스를 직접 설치해 더빙 성우, 화면해설을 낭독하는 사람 등이 직접 생방송으로 읽었다. 열악한 환경 속 스튜디오도 없이, 그야 말로 ‘맨땅에 헤딩’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어렵게 상영된 첫 영화,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영화를 제대로 한 편 봤구나”라는 시각장애인의 만족감에 장 작가는 ‘화면해설이라는 것이 그들에게 꼭 필요하구나’를 느꼈다.

하지만 당시는 화면해설에 대해 무지했다. 시각장애인 당사자는 물론, 홍보도 부족해서 직접 방송사를 찾아가 거의 구걸하다시피 화면해설을 알리는데 노력했다. 한 방송사에서 추운 겨울 쫓겨나기도 한 사연은 하나의 추억이 됐다.

“그렇게 발로 뛰어서 5년이 지난 후 작품수도 많이 늘어났어요. 단둘이 읽고 썼던 것이 이제 정식적으로 녹음실도 빌렸죠. 두 명이었던 작가도 10년이 지나니 10명이 됐더라고요. 처음에는 주변인물 끌어다가 주먹구구식으로 교육했지만 시간이 지나니 스튜디오도 만들고 엔지니어도 고용하고, 그렇게 조금씩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죠. 지금은 프로 성우 분들이 봉사를 하겠다하며 재능기부 해주시는 분들도 생겼고요.”

우리나라 1호 화면해설작가 장현정 작가.ⓒ에이블뉴스

“영상에 나오는 모습을 그대로 적기만 하면 되지 않냐?”라며 화면해설작가에 쉽게 도전하는 이도 많았다. 그러나 단순 만만하게 봐선 안 되는 전문적인 직업이라고 장 작가는 못을 박았다.

방송작가 20년 경력 이상의 작가들이 화면해설에 도전해보지만 한 두 작품을 해보고는 이구동성으로 “차라리 창작을 하고 말지”하며 손을 떼버린다는 것이다.

“공포스러운 장면에서 같이 놀랄 수 있도록 해설을 쓰기위해서는 많은 요소들이 포함돼요. 타이밍 또 숨 가쁜 긴장감, 사운드, 배우의 현장음, 또 영상 편집도 고려해야 하구요. 화면해설은 완성된 영상물을 말하고자 하는 것을 찾아서 설명을 해야 해요. 연출가의 의도는 물론, 배우들의 캐릭터, 카메라 기법, 그래픽까지 모두 고려해서 연구를 해야 하거든요. 그리 녹록치 않답니다.”

16년의 베테랑 화면해설 작가인 그녀는 가장 어려운 화면해설로 ‘멜로드라마’를 꼽았다.

보통 전쟁, 방대한 스케일이 어렵다고들 하지만, 사람의 내면에 깊숙이 들어가 생각을 알아채서 설명해야 하는 멜로가 가장 난이도가 높다는데. 화면해설 작가는 단순 글 쓰는 사람이 아닌, 감독과 같은 역할이었다.

“2시간의 영화를 화면해설로 쓰기 위해서는 3일간 꼬박 잠 안자고 영상을 많이는 10번까지 봐요. 제 자신이 완벽히 소화해서 모르겠다 하는 부분이 없어야 하거든요. 얼마 전 공룡 다큐멘터리를 작업했을 땐, 생전 보지도 못했던 동물을 어떻게 묘사할지, 시대적 배경을 어떻게 그릴지, 백악기 숲을 어떻게 표현할지 그 시대에 있었던 생태학까지 공부하기도 했어요.”

2명으로 시작된 화면해설작가는 16년이 지난 현재, 20여명의 후배 작가들을 직접 배출해냈다. 그럼에도 아직 그녀는 목마르다. 화면해설에 인생을 걸었다는 그녀, ‘장현정이 썼다고 하면 믿고 재밌게 볼 수 있다’란 신뢰감을 갖고 싶은 것이 그녀의 목표이자, 욕심이다.

화면해설의 가장 중요한 점은 시각장애인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그녀는 지금도 일이 없는 날에는 안대를 끼고 생활한다.

“별 할 일이 없으면 집에서 안대로 눈을 가리며 생활을 해요. 부딪혀서 멍들고, 촉각으로 물건을 느끼고, 그것이 다 화면해설에 적용이 되거든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은 아니지만 마음의 부자가 될 수 있는 직업이에요. 앞으로 보다 다양한 분야에서 적용이 될 것이구요. 그래도 잊지말아야할 것은 바로 시각장애인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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