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는 3~4일 만에 정신을 차렸는데 목숨이 붙어 있는 것도 기적이라 합디다.”

목이 부러진 상태라 목 아래로는 꼼짝을 못하고 팔이 십자로 묶어 있는 것 같았다. 워낙 중상이라 의사들도 손 쓸 방도가 없어 수술도 못 한 채 경과를 지켜 볼 따름이었다.

장갑공장을 했다면 병원비는 어떻게 충당을 했을까.

“친척들이 초량에서 통반장을 했기에 영세민으로 만들어주어서 병원비 걱정은 별로 안했습니다.”

파크골프장에서. ⓒ이복남

작은 아들이 세 살 때였는데 그가 침대에서 꼼짝을 못했기에 아내는 어린 딸과 아들을 데리고 병시중을 들어야 했다.

“아이가 시끄럽다고 다른 환자들한테서 핀잔을 듣기도 하면서, 집사람이 참 고생 많이 했습니다.”

그는 꼼짝도 못했지만 정신만은 말짱했다. 아내가 어린자식들 데리고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든지 살아야겠다고 이를 악물고 물리치료도 열심히 받았다. 시간이 지났지만 의사들은 여전히 너무 위험하다면서 수술은 꺼렸기에 팔다리가 뻣뻣해지지 않도록 주물러 주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결혼한 막내 여동생이 가끔 와서 그의 팔다리를 주물러 주기도 했다. 경추를 다쳐 목이 부러졌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한 달쯤 지나자 왼쪽 손이 풀렸다.

“제일 먼저 왼손 새끼손가락부터 신경이 돌아옵디다.”

얼마 후에는 왼쪽 다리도 풀렸다. 머리를 통해서 신경은 십자로 내려온다 했는데 경추에서 왼쪽부분을 더 많이 다친 모양이었다.

왼쪽은 몇 달 만에 팔 다리가 다 풀렸는데 오른쪽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재활치료사가 머리 위에 추를 달아 견인을 하는 등 물리치료가 끝나고 나면 아내와 여동생이 번갈아가면서 열심히 팔다리를 주무르고 했으나 오른쪽의 마비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오른쪽의 팔과 다리는 영영 풀리지 않아서 지금도 오른쪽은 자유롭지 못하다.

“제가 대학병원에 입원하면서 용호동은 너무 멀어서 다시 초량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이사는 그를 간호하기 위한 아내의 편의 등에 의해서 이뤄졌지만 이사도 순전히 아내 혼자서 다 했기에 그는 사실 이사한 집도 몰랐다. 그가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 서울에서는 88올림픽이 치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장애인 올림픽이 치러졌는데 그는 텔레비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동안 장애인은 남의 일로만 생각했는데 이제부터 자신이 장애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착잡하기만 했다. 장애를 입고도 운동을 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자신도 예전에는 운동을 좋아했지만 이 몸으로 과연 무슨 운동을 할 수가 있을까. 이렇다 할 운동종목이 딱히 생각나지도 않았다. 텔레비전으로 비치는 장애인 운동선수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수밖에.

봄에 목을 다쳐 입원했었고 살아 있는 게 기적이라고 했는데 그의 살고자하는 의지와 노력 덕분인지 경과가 좋아서 겨울이 오기 전에 퇴원을 했다. 처음 보는 초량의 전세방이었다. 병원을 나오기는 했으나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장 어찌 해 볼 도리도 없어 방안에서 세월만

죽이는 동안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한 지인 찾아 와서 방안에만 있지 말고 좀 나와 보라고 했다. ‘요 아래 큰길에 나가면 전부 보조기상인데 장애인 천지라더라’

“그 때만 해도 장애인이 아니라 병신이라 했고 나중에 장애인단체에 나가니 장애자라고 합디다.”

김순광 씨 가족. ⓒ이복남

누가 그를 병신이라고 하거나 장애자라고 하거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정말 지인의 말을 듣고 며칠을 고민하다 오른손은 주머니에 넣고 오른 다리를 절뚝절뚝 끌다시피 하면서 초량 큰길로 나들이를 나갔다.

“그 때 장애인단체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당장 장애인등록을 하라고 합디다.”

그는 대학병원을 다시 찾아가서 장애판정을 받았는데 ‘지체부자유자 2급 2호’였다. 그러면서 장애인 단체 일을 시작했다. 처음 시작한 것은 신체장애인복지회였고 부산지체장애인, 교통장애인 등에서 여러 가지 일을 했다.

그러는 동안 아내는 여기저기 남의 집 일을 하면서 별 불평 없이 아이들을 길렀다. 그러다가 임대아파트가 나오면서 처음으로 명색이 내 집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은 북구 덕천동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큰 딸(31살)은 이미 결혼을 했고 작은 아들(28살)은 하키선수를 했는데 그를 닮았는지(?) 대학까지 특채로 갔다가 하키를 그만두고 지금은 직장에 다니고 있다.

북구에서는 교통장애인협회, 곰두리봉사회 그리고 장애인파크골프 회장을 맡게 되었다.

“중앙회에서 내려오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하면서 어려운 장애인들 찾아서 위로하고 후원물품 나눠주고 1년에 한두 번씩 행사하고……. 그래도 표는 안 나고 욕만 들어 묵는데도 엄청 바쁩니다.”

그래서 2014년을 끝으로 기존의 장애인단체는 모두 손을 놓고 내년부터는 장애인과 노약자 그리고 다문화 가족을 위한 새로운 사업을 구상 중이란다.

“평생 이 일을 해 왔으니 죽는 날까지 복자시업을 해야겠지요.”

그의 앞날도 모란동백처럼 피고지고 하겠지만 부디 행복하시기를……. <끝>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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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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