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연이란 조수미처럼 지휘자 옆에서 독주를 함께 하는 것이고 객원이란 정식이 아니라 계약직 단원입니다.”

대학생일 때는 여기저기서 협연을 하기도 했지만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활동했던 음악단체는 대부분이 객원이었다. 그런 떠돌이 생활에서 탈피하여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들어 간 곳이 ‘한빛예술단’이었다.

자갈치에서. ⓒ이복남

(한빛예술단은 한빛재단과 한빛맹학교에서도 안마업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롭고 다양한 직업 영역의 창출을 위해 많은 고심하다가 시각장애인의의 음악적 재능을 발굴 육성하고, 음악을 통한 직업 창출 및 자립 능력 배양을 목표로 2003년부터 활동해왔던 한빛브라스앙상블을 확대 개편해, 2006년 1월 '한빛예술단'을 창단하였다. 한빛예술단 홈에서 발췌 –필자 주)

“처음 면접 보시던 분이 묵주반지를 보셨는지 ‘카톨릭이시네요.’ 하시데요.”

한빛예술단은 개신교이다. 한빛에서는 월급 외에 공연이 있으면 연주수당도 따로 주고 해서 괜찮았는데 종교적 압박과 자유시간이 너무 없었다. “주일이면 다 교회로 가는데 그만 성당으로 간다는 것도 찜찜했고, 공연이 없는 날이면 동대문에서 지인들과 술을 한 잔 하기도 했는데 그런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지탄꺼리가 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는 오케스트라에서 트럼본을 연주하는 음악인이지만 자유로운 영혼의 방랑자였다. ‘한빛예술단’에 소속되어 있어서 돈 걱정은 안 해도 되었지만 구속받는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6개월 만에 한빛예술단을 그만 두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가고파에 나오는 것처럼 어릴 때 같이 놀던 동무들도 그리웠고 고향 바다의 출렁이는 물결도 보고 싶었다.

양이훈씨의 모습들. ⓒ이복남

“죽어도 부산 가서 죽어야겠다 싶었습니다.”

자갈치 시장에서 아는 형님을 불러서 꼼장어(학술적 공식명칭은 먹장어)를 시켜 소주를 한 잔 마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형님에게 일자리를 부탁했다. 형님은 그의 이야기를 듣더니 금관앙상블 단체를 소개해 주었다. 그러나 금관앙상블도 안정적인 직업은 못 되었다. 연주가 있을 때만 연주수당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대구에서 직원 10여명을 둔 선반 밀링기계공장을 하셨는데 돌아가시면서 어머니 앞으로 이전되었고 공장은 동생이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 어머니에게 손을 내밀 수도 없고 이것저것 살 길을 찾다보니 장애연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초생활수급자는 아니었지만 차상위도 164,000원의 장애연금은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장애연금이라도 받고자 주민센터에 연금신청을 했더니 장애등급을 새로 받으라고 했다. 그는 전에도 시각장애 1급이었기에 별 생각 없이 병원에서 주는 대로 진단서를 받아서 제출했다.

“제가 글쎄 5급이랍니다.”

어이가 없었지만 장애연금을 안 주려고 그러는 것 같아서 괜히 신청했다 싶었지만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1급이면 보호자까지 할인 받았는데 그런 혜택까지 줄어들었습니다.“

장애연금이 무산되자 그는 다시 부산으로 내려왔고 이번에는 주민등록도 옮겼다.

“작년에 동사무소에 구직 신청을 했습니다.”

음악 하는 사람이?

“이제 소원풀이를 했으니까.”

그의 소원은 오케스트라에서 드보르자크의 신세계 교향곡을 연주하는 것이었는데 그 소원은 이미 이루었고 코리안심포니 외에 다른 데서도 신세계 교향곡은 이미 여러 차례 연주했었다는 것이다.

필자의 사무실 앞에서. ⓒ이복남

그리고 또 하나는 서른아홉과 사십의 무게가 다르더라는 것이다. 동사무소에서는 구직신청서를 받으면서 뭐 할 줄 아느냐고 물었는데 그가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더란다. 동사무소 직원은 어렵겠지만 기다려보라고 하더니 얼마 후에 전화가 와서는 점자도서관에서 사람을 구하니 구청으로 연락해 보라고 했다.

행정도우미로 점자도관에 가보니 그가 할 일은 큰 책을 변환프로그램으로 스캔하고 인식이 안 되어 깨어진 글자를 교정하는 일이었다. 계약기간은 2014년 1월부터 12월까지 1년간인데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 40시간이고 급여는 1백8만원인데 8만원은 4대 보험으로 떼고 100만원을 받을 수 있었다.

“전에는 간혹 행사도 있었는데 세월호 이후 행사가 연기되거나 취소되어 우리 같은 사람은 다 망했습니다.”

요즘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점자도서관에서 일하고 주말이면 음대지망생에게 사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장애인행정도우미는 1년 계약직으로 근로자 신분도 안 되는 장애인 일자리일 뿐이다. 장애인행정도우미를 언제까지 할 수 있을 지도 알 수도 없고, 관현악전공을 살려서 안정된 직업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단다.

그리고 또 하나의 바람이 있다면 장애인오케스트라가 하나 있었으면 정말 좋겠단다. 새로운 그의 꿈이 언제 쯤 이루어질지 알 수는 없지만 꿈은 이루어진다니까.<끝>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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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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