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렵 마침 아버지가 다니시는 회사가 대구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아버지 혼자 대구로 갔다. 그도 중학교를 마치고 어머니와 남동생과 대구로 이사를 했다. 이제는 담담하게 시각장애 1급을 받고 대구 광명학교(대구 시각장애인학교) 고등부에 입학했다. 급우들은 원인은 제각각이었지만 결과는 모두가 시각장애인이었다.

정두환의 음악여행. ⓒ이복남

그런데 다 같은 시각장애인임에도 같은 처지로서 가엽고 불쌍하게 여긴다는 동병상련은 아니었다. 왜? 시각장애인이라는 같은 처지보다는 대구와 부산이라는 거리가 더 멀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마음을 터놓고 주고받을 친한 친구도 하나 없었다.

어느 날 실로암안과에서 진료를 나왔다.

“다음은 영어시간인데 숙제를 안 해 갔습니다.”

먼저 검안을 받고 온 친구가 주스도 주더라고 했다. 그는 영어 선생에게 야단을 맞느니 주스라도 얻어먹자 싶어서 임시 진료소가 차려진 강당을 찾았다. 그런데 먼저 들어 간 친구들이 5분도 안되어서 나왔다. 드디어 그의 차례가 되었다. 그의 눈을 살펴 본 의사는 그의 눈에 안약을 넣더니 30분 동안 자고 오라고 했다.

“30분 동안 어디서 자지요?”

그는 숙제도 안 해온 영어시간에 다시 들어가기가 싫었다.

“잘 데 없으면 여기서 자든가”

의사는 소파에서 자라고 했다. 그는 진료실 소파에 누워서 비몽사몽간에 30분을 보내고 다시 의사 앞에 가서 앉았다.

의사는 그의 눈을 살펴보더니 “우리 병원으로 와 봐라, 다시 한 번 검사해 보자” 고 했다. 그는 병원으로 가야 될 사람으로 분류되었던 것이다.

“실로암안과에서는 학생들의 눈을 살펴보고 수술이 가능한 사람을 골라서 병원으로 데려갔는데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들은 못 보게 했습니다.”

못 보는 사람을 보게 하는 것이 개안수술인데,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다니 이건 도대체 무슨 말일까.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수술을 해서 눈이 보이게 하지만, 어떤 사람은 약간의 시력은 남아 있어서 조금은 보이기도 하지만 안압이 점점 더 높아져서 시신경이 견디지 못하는 경우에는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으므로 아예 안구를 적출하고 의안을 삽입해 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가 진료 받았던 날에는 광명학교에서 4명의 학생들이 선발되었다. 정해진 날짜에 4명의 시각장애인들은 각자의 어머니와 함께 대구역에서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그 때가 1학년 가을쯤이었는데 서울은 확실히 다른 것 같았습니다.”

그는 실로암안과병원에서 수술을 했다. 수술 후 붕대를 풀고 나니 깜깜했던 세상이 조금씩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너무 좋아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개안은 거기까지였다. 수술 후 희미하게나마 물체는 알아 볼 수 있었으나 그는 여전히 1급 시각장애인으로서 어영부영 시간을 갉아 먹고 있었다.

그 무렵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외할머니의 장례식은 가톨릭 식으로 엄숙하게 진행되었고 외할머니는 대전천주교공동묘지에 묻히셨다. 외할머니의 장례식 동안 죽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모두가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므로 열심히 살면서 천국과 지옥 사이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해야겠다.’ 외가는 전부 가톨릭 신자였기에 어머니와 아버지도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성당을 다녔으나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아버지는 냉담자였다. 그래서 주일이면 어머니 혼자 성당을 다니셨다. 그가 어릴 때는 주일이면 어머니를 따라서 성당을 다녔는지 잘 모르겠지만 철이 들면서부터 그도 발길을 끊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신 후 그는 성당에 나갔다.

“그렇게 (성당에)나가라고 해도 싫다하더니 저 자식이 죽을라꼬 그라나!”

외가의 형들은 오히려 그를 놀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예비신자 교리를 배웠고 ‘대건 안드레아’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묵주반지를 받았다는데 대부분의 신자들이 묵주반지는 왼손 둘째손가락에 끼는데 양이훈 씨는 연주하는데 방해가 되는 지 묵주반지를 왼손 약지에 끼고 있었다.

광명학교는 시각장애인 학교이므로 이료(理療)과목을 배워야 된다. 안마사가 되기 위한 이료과목에는 침 안마 마사지 지압 등을 배우는데 광명학교 고등부 졸업과 함께 안마사자격증은 받았지만 그는 침을 배우지 않았단다. 침이 무서웠다는 것이다. “안마사자격증은 주던데 집에 어디 있겠지요.”

을숙도 명품콘서트에서. ⓒ이복남

시각장애인은 직업이나 직종이 단순하다. 눈을 감고 할 수 있는 직종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각장애인은 장래희망으로 안마사를 꿈꾸지만 간혹 교사나 교수 또는 사회복지사를 바라기도 한다. 그는 안마사는 물론이고 그 어떤 것도 흥미가 없었다. 장군의 꿈이 멀어지자 공부도 심드렁해졌고 사실 목숨이야 붙어 있었지만 특별히 하고 싶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우두커니 방안에 혼자 앉아 있으면 아버지는 ‘니 뭐하는 놈이고’ 호령하시면서 쥐어박기도 했다.

그 날도 방안에서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텔레비전에서 음악소리가 흘러나왔다. 음악소리가 들리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텔레비전 앞으로 다가가 봤지만 그에게 텔레비전이 잘 보일 리가 만무했다. 텔레비전은 실루엣만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 음악 소리는 카라얀이 지휘하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드보르자크의 신세계 교향곡이었다.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가장 오래된 오케스트라로 1842년에 창단되었다. 비엔나 필은 다른 오케스트라와 달리 총감독이나 상임지휘자 없이 수석 지휘자와 객원 지휘자가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방식으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명예 지휘자 칭호를 수여받았고, 한국인으로서 비엔나 필을 지휘한 사람은 정명훈 지휘자뿐이다. 비엔나 필은 신년음학회 등 정기연주회 뿐 아니라 세계 각지로 연주 여행을 하여, 베를린 필과 함께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로서 높은 인기를 자랑하고 있다. -인터넷에서 발췌. 필자 주)

“제가 한 번 필이 꽂히면 물불 안 가리는 성격이라 그래서, 집도 태워 먹을 뻔 했습니다.”

집을 태워 먹다니 도대체 무슨 말일까.

“가스에 불을 붙이면 폭발한다는 이야기를 읽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집에서 에프킬라를 뿌리면서 성냥불을 그었다는 것이다. 확! 하고 순식간에 킬라에 불이 붙었다.

“아버지한테 실컨 뚜드리 맞고 방바닥도 좀 태워 먹고…….”

그 때도 킬라에 불을 붙이면 어떻게 되는 지 그 결과가 너무나 궁금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비엔나 필도 아니고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지휘자 카라얀도 아니고 신세계 교향곡을 작곡한 드보르자크는 더욱 아니었다. 그가 해 보고 싶은 것은 우선은 오케스트라였고 두 번째는 오케스트라에서 드보르자크의 신세계 교향곡을 연주해 보는 것이었다.

오케스트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음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무얼 하지. 그 때까지만 해도 그에게 음악에 대한 충고나 조언을 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학년 때였는데 한 번 결심이 서자 마음이 초조해서 다음 날 학교에서 음악선생을 찾아 갔다. <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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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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