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석에 앉았다 일어서기는 어렵고 힘들었지만 그 외에는 별 문제없이 아침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이를 악물고 일을 했기에 늘 1등을 했다. 택시운전을 하면서 제일 밉고 괘씸한 사람은 차비를 안 주고 달아나는 사람이라고 했다. 운전에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그는 재빨리 일어나서 도망자를 쫓아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요금문제로 시비가 붙으면 처음에는 경찰서로 데려가 보기도 했으나 결국에는 돈도 못 받고 시간만 허비하는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한 번은 범일동에서 동래까지 간다는 50대 남자를 태웠다. ‘돈이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남자는 농담처럼 그에게 물었기에 ‘돈이 없으면 택시를 안 타야지요.’라고 대답했다. 동래에 도착하자 남자는 돈이 없다면서 그냥 가버렸다.
“그 남자를 잡으러 갈 수도 없고 멍하니 바라보는 해바라기 내 신세가 참 처량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장애인들과 차츰 알게 되고 지역단체 활동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장애인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알고 보니 다른 장애인들의 권익을 위해 일한다기 보다는 자신의 이득과 영달을 위한 것 같았다. 자신은 그러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하면서 5년 동안 일했던 E택시회사를 그만두고 장애인단체를 맡아보니 기존의 벽이 너무 높은 것 같았다. 아무 소득도 없으면서도 단체끼리의 통합이나 합동은 더 어려워 보였다.
그는 돈을 벌어야 했기에 다시 S택시회사에 취업을 했다. 그가 운전을 할 때는 보통 1차제를 했는데 아침부터 15시간 정도는 일을 해야 사납금을 맞추고 약간의 돈을 벌 수 있었다. 다시 택시 운전을 한 지 1년 쯤 지난 2011년 9월 30일 새벽, 일을 마치고 세차하고 집에 가서 아침밥을 먹은 뒤 금곡동에 있는 문화연수원에서 9시부터 실시하는 보수교육을 받고 12시 30분쯤에 일어나려니까 어지러웠다.
괜찮겠지 별걱정 없이 집에 오는 길에 볼일 보러 한군데 들렀는데 말이 어눌하게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밤샘한 탓이라 싶어서 빨리 집으로 와서 일찍 잤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을 나갔다. 손님이 그에게 뭐라고 해서 그가 대답을 했는데 손님은 그의 말을 잘 못 알아들었는지 다시 물었고 그가 다시 대답을 하자 손님은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는 말을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약간 어지럽고 말이 잘 안 되는 것 외에는 죽을병도 아니었기에 월요일인 10월 3일에 스쿠터를 타고 근처 한의원으로 갔더니 그를 진맥한 한의사는 빨리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내 병이 얼마나 심각하지 몰랐습니다.”
다음 날이 되어서야 동의의료원으로 갔는데 당장 입원하라고 했다. 그는 왜 입원까지 해야 되는지 몰라서 어리둥절했다. 의사는 ‘꼭 죽을병에 걸려야 입원 하느냐면서 당장 입원하고 MRI를 찍으라고 했다. MRI결과는 뇌혈관이 두 군데나 막혀있는 뇌경색이었다. 필자가 그를 만나서 인터뷰를 하는데 말이 약간 어눌했었다. 그 때 온 뇌경색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입원해서 치료를 받았는데 일을 못한 것은 고사하고 입원비가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요양급여신청을 했는데 1주일을 기다려도 회신이 오지 않았다. 병원에는 입원비가 부담이 되니 요양급여승인이 날 때까지 통원치료를 하겠다고 말하고 퇴원했다.
두 달 후에 근로복지공단에서 회신이 오기를 요양급여는 불가하다고 했다. 그의 뇌경색은 고혈압과 당뇨로 인한 평소의 지병이므로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재판을 청구했다.
“변호사를 선임할 돈이 없다 했더니 법원에서 국선변호사를 선임해 주데요.”
1심에서는 승소했는데 근로복지공단에서 항소하여 재판 중이란다. 이번 재판에서도 이기겠지만 근로자를 위해서 설립 된 공단이 근로자의 권익을 지켜 주어야지 누구를 대변하는지 모르겠다며 분노했다.
그는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했다. 그의 고향인 경남 의창군 동읍에 가족묘가 있기는 한데 남의 땅에 묘를 쓴 거라 늘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몇 해 전 의창군에서 연락이 왔었다.
“군에서 ‘우리 땅 찾아주기 운동’을 하고 있는데 의창군 동읍 고향에 우리 땅 240평이 있다는 겁니다.”
상산김씨(商山金氏)의 가족묘가 우리 땅이었다니 꿈만 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그 가족묘에도 할아버지는 시신이 없는 가묘를 썼다. 그의 할아버지 김병호(김秉灝)는 1906년생으로 만주 봉화에서 독립운동을 하셨다는데 자료가 부족하다하여 아직 독립유공자로 지정을 못 받고 있단다. 봉화에 있다는 할아버지의 묘소도 한번 찾아보고 꼭 독립유공자로 지정받고 싶단다.
또 하나는 그의 딸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K대학교 연극영화과를 나오기는 했지만 현재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는 배우가 아니라 다른 길을 걷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장애인예술단체라도 설립해서 못다 핀 꽃한송이라도 가꾸고 싶단다. 젊은 시절 그의 꿈은 연극배우였는데 장애인이 되고서여 다시금 그 꿈을 뒤돌아 보게 된 것이다. 지금은 소송이다 뭐다 해서 복잡한 상황이지만 여유가 되면 배우의 꿈을 가진 장애인들에게 그 꿈을 꼭 실현시켜 주고 싶단다. <끝>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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