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경주의 어느 병원에서 의식도 없이 응급처지를 받는 동안 경찰에서 연락을 했는지 아내와 친인척들이 수소문해서 그는 부산 S병원으로 옮겨졌다.

“‘치료합시다’ 하는 소리에 눈을 떴는데 부산에 오고도 이틀쯤 지난 후였습니다.”

의식이 들자 전신이 욱신거리고 아팠는데, 소스라치게 놀란 것은 그의 오른쪽 다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왼쪽다리도 온전하지 못해서 수술을 해야 된다고 했다.

사고 나기전의 해병전우회 차량. ⓒ이복남

“그 때는 아무 생각도 없었고 왜 빨리 왼쪽 다리 수술을 안 하나 그 생각뿐이었습니다.”

문제는 돈이었다. 그는 자동차종합보험에서 자차 그리고 자손(자기신체손해)과 자상(자동차 상해)은 제외 하고 대인 대물만 들었기에 그의 교통사고는 보험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요즘은 종합보험에서 자차만 선택이고 자손이나 자상은 의무사항으로 포함이 되지만, 그 때만 해도 누가 이럴 줄 알았겠습니까?”

어찌 된 영문인지 입원 한 지 한 달이 지나서야 왼쪽 다리를 수술했다. 아침 8시에 수술실에 들어갔는데 양손을 침대에 묶어 놓고 가슴에는 커튼을 치고 왼쪽 다리에만 부분 마취를 했다. 톱으로 자르고 망치로 두드리고 의사들이 뭔가 찾는 고함소리 등을 꼼짝없이 듣고 있자니 미칠 지경이라 그가 먼저 고함을 질렀다.

“제가 먼저 죽겠으니 전신마취를 해 주시오.”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그의 수술은 예정보다 오래 걸린 모양이었다. 수술실 앞에는 다음 대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가 예정 된 시간을 지나도 나오지 않자 기다리는 환자나 가족들은 글렀다고 했단다. 그는 오후가 늦어서야 수술실을 나왔는데 ‘아이스케키 사이소’라며 헛소리를 하더란다. 웬 아이스케키?

“옛날에 중학교 다닐 때 재미삼아 아이스케키 장사를 해 본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아내의 친척 중에 보험 설계사가 있어서 ‘잉꼬부부보험’에 가입이 되어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는 보험금을 청구하니 아내의 이름만 있고 그의 이름은 없어서 안 된다고 했다. 설계사가 그들의 잉꼬부부보험을 들어 놓고는 그의 이름을 확실히 몰라 나중에 물어 본다는 게 그만 잊었던 모양이었다.

단란한 가족. ⓒ이복남

정말 어이가 없었지만 보험은 물 건너 갔고 그동안 번 돈은 치료비로 다 들어갔다. 설이 되어 휴가를 요청하자 병원비가 밀려서 안 된다고 했다.

“교통사고로 병신이 된 것도 서러운데 치료비 때문에 더 서러웠습니다.”

그는 왼쪽다리 수술 후 치료하고 재활훈련 받고 근 1년 만에 퇴원 했는데 그 동안 S병원에서는 그의 아파트를 압류했다.

“퇴원하고 아파트를 팔아서 병원비를 청산하고 나니 빈털터리가 됩디다.”

전세방을 하나 얻고 아내는 생계를 위해 노래방을 열었다. 좌절 절망 고통 방탕 폐인 시련 등 온갖 단어를 다 나열한다 해도 당시 그의 상황을 대변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아내는 그런 모습이 보기 싫다며 노래방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다.

“술이라도 한 잔 마시고 싶었지만 돈이 있어야지요.”

어쩌다 돈이 생기면 소주 한 병을 사서 안주도 없이 구석에서 눈물을 안주삼아 깡술을 마셨다.

사고나기 전, 해병대 진동리지구 전적비. ⓒ이복남

“이래 살아서 뭐 하겠노 싶어서 수면제를 먹어 보기도 했는데 안 죽어지데요.”

그러고도 얼마나 더 폐인으로 살았는지 알 수 없었다. 오른쪽 다리에는 의족을 했었고 양목 발을 짚었지만 디뚱디뚱 걸음은 서툴렀고 잘 걷지를 못했다. 그런 걸음으로 시장 통을 배회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주춤주춤 절뚝거리며 노랫소리를 따라갔더니 노랫소리의 주인공은 머리와 양쪽 팔만 내 놓은 채 전신을 튜브 같은 고무로 감싼 채 나무판자 위에 엎드려서 구걸하는 장애인이었다. 그 사람을 보고 있자니 울컥 하면서 목이 메어 왔다. 저 사람은 고무통을 끼고 시장바닥을 기어 다니면서도 살고 있는 데 나는 이게 뭐냐. 나는 그래도 무에서 유를 찾는다는 해병대 출신인데 나는 왜 이러고 있나.

그때부터 뭔가 해 보기로 굳게 결심했다. 그런데 뭔가를 해 보려면 걸음걸이부터 자유로워야 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낮에는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기에 밤 12가 되면 집 주변부터 걸었다. 그러면서 날마다 거리를 조금씩 늘여 나갔는데 한 달쯤 후에는 10리쯤 걸었다. 그의 집은 용호동인데 남천동까지 갔다 오면 10리쯤 될 거라고 했다.

의족을 하고 양목 발을 짚은 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의 걸음 연습은 계속되었고 6개월쯤 되자 어느 정도 걸을 수가 있게 되었다. 수소문 끝에 부산장애인총연합회를 찾아 갔다. 그를 상담했던 사람은 택시운전을 해 보겠느냐고 물었다. 교통사고로 이렇게 되었는데 또 다시 운전을 하라니……. 처음에는 기가 막혔지만 그가 그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운전뿐인 것 같았다. 그렇게 그는 부산장총에서 소개 해준 E택시회사에 기사로 취업했다. <5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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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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