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딸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잘 몰랐고 왜 밥을 안 먹는지도 알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딸을 데려 나와서 D대학병원에 입원시켰다. 대학병원 정신과에서는 일반 정신병원 보다는 환자를 잘 돌봐 주지만 입원비가 너무 비싸서 오래 입원할 수는 없었다. D대학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많이 호전된 것 같아서 3개월 만에 퇴원하고 다시 E정신병원에 입원을 했다.

정기총회 임원들. ⓒ이복남

“딸을 면회하고 돌아 올 때면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폐쇄병동에 면회를 가면 환자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는데 그 사람들을 두고 돌아 나올 때마다 제가 뭘 어떻게 하겠습니까.”

딸은 10년 동안이나 정신병원을 전전하다가 이제는 집에 있단다. 그런데 가끔 가다 한 번씩 자기감정을 주체 못해 성질을 부릴 때면 두 동생은 고양이 앞에 쥐처럼 얌전해진단다.

“사실은 저도 딸을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딸의 감정 상태를 알지 못하므로 가능하면 딸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조심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동생은 언니가 병들었다는 것을 이해하기에 한 번도 부모 속을 썩이지 않고 열심히 공부해 주었다. 큰 딸 지현이 보다 세 살 아래인 둘째 딸은 사대를 졸업하고 학교 선생이 되었다. 둘째 언니 보다 두 살 아래인 셋째 딸은 영어를 잘해서 무역회사에 다니는데 두 딸이 잘 자라주어서 그나마 다행이란다.

“집안에 환자가 하나 있으면 온 집안을 휩쓸어 풍비박산이 나는 집도 많습니다.”

비록 큰 딸은 정신분열병을 앓고 있지만 두 딸이 잘 자라 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고 했다.

“요즘은 조현병(調鉉病)이라고 합니다만, 정신질환자가 집안에 있다는 것은 가까운 친척들에게도 말하기 어려운 천형이었습니다.”

<조현병(調鉉病)이란 용어는 2011년에 정신분열병(정신분열증)이란 병명이 바뀐 것인데, 정신분열병(정신분열증)이란 병명이 사회적인 이질감과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편견을 없애기 위하여 개명된 것이다. 조현(調鉉)이란 사전적인 의미로 현악기의 줄을 고르다는 뜻으로, 조현병 환자의 모습이 마치 현악기가 정상적으로 조율되지 못했을 때의 모습처럼 혼란스러운 상태를 보이는 것과 같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필자 주, 의학정보에서->

“천형이라는 부끄러움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1994년 9월 UCLA에서 정신재활에 관한 공부를 하고 돌아온 김철권 선생이 정신분열병에 관한 가족교육을 실시했던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미 20년 전에 개방되어 정신분열병도 하나의 장애로 인식해서 환자와 가족 그리고 전문가가 3위 일체가 되어 재활치료에 힘쓰고 있는데 우리는 아직도 내쳐진 사람으로 여겨서 폐쇄병동에 격리하는 수준에 불과하다고 했다.

부산장애인종합회관 개관식에서. ⓒ이복남

“그 교육을 받고는 우리도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1994년 10월 15일 부산정신보건가족협회(이하 정가협)가 설립되었다. 초대회장은 그 보다는 나이가 연배인 사람이었는데 6개월 쯤 되어서 못하겠다고 해서 할 수 없이 그가 회장을 맡게 되었다.

“제일 먼저 한 일이 편견을 깨는 인식개선이었습니다.”

정신분열병은 유전병이고 불치병이라 일가친척들에게도 숨겨야하는 천형이라고 소문나 있었기에 그 소문부터 불식시켜야 했다.

“당시만 해도 장애인등록도 안 되고 있었지만 절대로 유전이나 불치병이 아니다. 고혈압이나 위장병은 약을 먹지 않느냐. 정신분열병도 도파민의 과잉으로 발생하는 뇌질환의 일종일 뿐이라고 외쳐 보았지만 뜬구름 같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그는 회사를 다니고 있었는데 회장을 맡게 되면서 회사도 그만두고 협회 일에 전념했다. 그러나 정가협 가족들을 설득해서 밖으로 끌어내기는 만만치 않았다. 재정도 열악해서 대부분이 자비로 충당했다. 1998년 사단법인을 설립하고 2000년 1월 1일 장애인복지법 개정에서 장애유형에 포함되면서 처음으로 부산시에서 약간의 재정지원을 받게 되었다.

“사단법인을 설립하고 정신분열병이 장애유형에 포함되고 약간의 예산을 받게 되자 내 할 일은 어느 정도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2001년도 총회에서 회장을 사임했습니다.”

그는 정가협을 그만두고 그동안 제대로 돌보지 못한 딸에게 전념했다. 그 무렵에도 딸은 여전히 정신병원에 있었는데 10년 만에 딸을 병원에서 퇴원시켜 집으로 데려왔다. 이제는 딸이 예전처럼 성질을 부리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가족 외의 사람들과 대인관계는 잘 되지 않았다. 그는 딸에게 공부를 시켜보기로 했다.

“딸은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가능하다면 지현이가 고입검정고시도 치고 대입검정고시도 합격해서 대학에 다니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욕심이지 딸의 공부는 생각만큼 진척되지 않았다. <4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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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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