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부산장애인부모회 이사가 되면서 국가인권위에서 단식농성을 했었다. 그러나 장애인관련 언론사 외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는 것을 보고 세상에 나가기 위해서라도 사회복지를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었다. 균도가 2학년이 되면서 그도 부산카톨릭대학교 사회복지학과 3학년에 편입을 했다.
대학을 졸업한지 25년 만에 균도 또래의 아들 딸 같은 학생들과 어깨를 겨루며 다시 사회복지를 공부했다. 그도 사회복지사가 되어 균도의 앞날에 보탬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사회복지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균도를 위해서 마땅히 할 일은 별로 없었다. 균도도 아빠와 같이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균도를 오라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균도에게 유일 한 것이 장애인복지관 주간보호에 다니는 것이지만 주간보호 역시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주간보호 마저 대기 순서가 한참이나 밀려 있었던 것이다.
“균도나 저나 둘 다 백수인데 성당에 나가도 균도가 한 번씩 소리를 지르니까 ‘자는 말라꼬 왔노’하는 소리가 공공연하게 들렸습니다.”
그는 냉담자였고 균도를 더 이상 성당에 보내지 않았다. 그러면서 균도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해 보니 걷기였다. 균도도 걸을 수는 있었고 그와 함께 길을 나서면 잘 걸었던 것이다.
“균도와 함께 걷기 여행을 해 보고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아들 균도와 함께 걸어보는 여행이었다. 균도나 아빠 이진섭 씨나 둘다 학교를 졸업해서 할 일이 없었고, 굳이 또 하나의 이유를 들자면 그동안 균도를 돌보느라 힘들고 지친 아내와 균도의 동생을 잠시나마 쉬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무렵 그는 직장암 진단을 받았는데 담당의사도 당장 수술할 것도 아니니까 걷는 데는 별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걷는 여행은 그의 젊은 날의 꿈이기도 했는데 이제 나이 50이 되어 아들 균도와 함께 걷게 될 줄이야.
“처음에는 부산에서 서울까지, 이런 타이틀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단지 걷기를 잘하는 균도와 함께 ‘느리게 보는 균도의 세상에는 무엇이 있을까’라는 명제에서 출발하려고 했었다. 걸어가면서 균도의 힘든 일과 그래서 겪게 되는 가족의 힘든 일을 세상에 알려 보자 싶었다. 그러나 막상 균도와 세상걷기를 시작하려니까 여기저기서 문의가 쏟아졌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계획을 다시 짜고 의미를 부여하고 다른 사람들이 못하는 것을 실천하게 된 것이다.
2011년 3월 12일 서울로 가는 장도에 올랐다. 서울까지 600km, 4월 20일 장애인의 날에 서울도착을 예정으로 39박 40일의 대 여정에 오른 것이다.
“자기네들이 못하는 것을 우리에게 하라고 뒤에서 뽐뿌(펌프)질을 하는 바람에 사실은 등 떠밀려서 걷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고 보니까 정말 자기네들이 못한 것을 대신해 줘서 고맙다는 사람들이 가는 곳 마다 함께 걸으면서 후원금을 내 놓았다.
이제는 그 사람들의 후원과 격려 때문이라도 그만둘 수가 없었다. 3월이라지만 추위는 옷깃을 파고들었지만 그와 아들 균도는 즐거웠다. 균도는 난생 처음이라고 할 수 있는 아빠와의 여행이었기에 마냥 즐거워했다.
균도의 눈높이에서 시작된 여행이었기에 발달장애인의 꿈을 실었다. 그러나 이미 성인이 된 균도는 지나 온 길이었지만 ‘장애아동복지지원법’을 외면할 수 없었다.
곳곳마다 마중 나온 장애아동 부모들과 손을 잡고 함께 울었다. 모두가 장애아동을 키우면서 힘들었던 고통과 희망이 교차하는 눈물이었다.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는 바람이었는데 사람들의 관심은 예상외로 폭발적이었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다보니 언론에서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발이 부르트고 물집이 생기기도 했고, 더구나 균도가 어디로 달아나지는 않을까 염려되어 균도의 허리춤에 끈을 묶어서 잡고 다니기도 했지만 균도와 세상걷기는 성공이었다. <5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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