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던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오는 차안이었는데 자그마한 체구의 웬 아낙네가 아이들 들쳐 업고 한손에는 시장바구니를 들고 힘들게 수지니(수진리)고갯길을 넘고 있었다. 그 아낙네가 균도 엄마라는 것을 알았을 때 자신도 모르게 눈에 이슬이 맺혔다.

서울대학병원을 다녀오는 모양인데 힘없이 타박타박 수지니고개를 넘어가는 균도엄마는 너무나 애처로워 보였다. 균도엄마가 그렇게 힘들고 고생하는 줄을 그는 미처 몰랐던 것이다.

어린날의 균도. ⓒ이진섭 블로그

“그 수지니고개가 우리 인생의 시작이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아직은 어려서 잘 모르겠고 다섯 살이 지나봐야 결정할 수가 있을 것 같은데 아마도 장애가 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2년간의 타향살이를 끝내고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정성으로 균도를 돌보았지만 균도는 발달장애 판정을 받았다. 장애를 진단 받고 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는 아내와 아들을 끌어안고 울고 또 울었다.

“어떻게 눈물이 그렇게 나든지 참 무지하게 울었습니다.”

4.19 때 머리를 다쳐 평생 정신분열과 편집증으로 살아오신 아버지가 싫어서 빨리 집을 떠나려고 서둘러 한 결혼의 첫아들이 균도였다.

장애가 있는 부모, 그것도 정신장애인를 아빠로 둔 아들이 너무 힘들어서 혼자 잘 살아 보겠다고 도망치듯이 아버지 곁을 떠난 결혼인데 그 첫아들이 또 발달장애라니…….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그러나 아들의 양육은 엄마의 책임이라며 모든 것을 아내에게 떠맡긴 채 모른 체하기도 했지만 모른 체 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인생 비틀기라고 해야 하나, 아들 바보로 살아보기로 했습니다.”

인식의 전환이 필요했다. 어쨌든 균도는 내 아들이고 내 삶이 아무리 험난하다 해도 균도와 함께 가야 할 길이었다. 이왕 사는 것, 아들을 내칠 것이 아니라 아들을 사랑하고 끌어안아 보자 싶었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아들 균도 앞에 거치적거리는 것들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했다.

균도와세상걷기 1차 출발. ⓒ이진섭 블로그

균도가 적령기가 되어 일반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A초등학교에 입학을 시켰는데 두 달도 되기 전에 담임선생이 균도를 감당 못하겠으니 제발 다른 학교로 갔으면 좋겠다고 사정을 했다. 선생이 못하겠다는데 어쩌겠는가.

그는 군말 없이 균도를 B초등학교로 옮겼다. 당시에 그는 수입 가구상을 하고 있었는데 담임선생은 그에게 몇 백만 원어치 가구를 주문했다. 가구를 갖다 주니까 1년 동안 균도를 잘 봐 주겠다고 했다.

“균도를 핑계로 가구 값을 안주겠다는 선생을 보고 그 날로 가구를 도로 가져오고 균도를 C학교로 전학시켰습니다.”

C초등학교에서는 그런대로 견디는 것 같았다. 물론 아내가 균도와 같이 다니기는 하지만, 균도가 한 번씩 괴성을 지르는 등 주의력결핍이나 과잉행동장애를 보이기도 하므로 친구들과는 잘 어울리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균도와세상걷기 1차 대구. ⓒ이진섭 블로그

어느 날인가 아이들 몇몇이 균도를 둘러싸고는 한 아이가 꼬챙이 끝에 지렁이를 얹어서 균도에게 먹으라고 한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균도도 싫다고 했으나 아이들의 강압에 못 이겨 균도는 어쩔 수 없이 그 지렁이를 먹었던 모양이다.

그러면서 균도는 자기엄마에게 그 사실을 말했고, 균도는 엄마는 너무나 화가 나서 교무실에 가서 따졌는데 교감선생 등 교무실의 반응은 싸늘했다. ‘애들이 장난으로 한 걸 가지고 뭘 그러느냐’며 오히려 균도 엄마를 나무라는 투더라는 것이다.

“균도엄마가 울면서 그 얘기를 하는데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습니다.”

그는 당장 학교로 달려갔고 교감선생을 보자마자 다짜고짜로 따귀를 한 대 올려 부쳤다. 교감선생은 물론이고 주변의 모든 선생들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장난이었습니다. 애들이 우리 균도한테 장난으로 지렁이를 먹이는데 제가 장난으로 교감선생 따귀 좀 때리면 안 됩니까?”

말은 그렇게 했어도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제야 교장 선생이 달려 나오고 교감이하 선생들이 사과를 하는 등 법석을 떨었다.

“그때 처음으로 여자 말은 안 먹혀도 남자인 내 말은 먹히는구나 싶더라고요.”

그 지렁이 사건이 그가 균도 일에 적극 나서게 된 계기라고 했다. 그 일이 있고부터 누구라도 균도에게 함부로 하는 일은 없어졌지만 그래도 모든 것은 비장애인 위주로 되어 있는 세상이라 어렵고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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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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