욜로팀이 12일 국회의원회관서 만난 김정록 의원. ⓒ김정록 의원 페이스북

어릴 적 그는 정의로운 아이였다. 동네에서 약자들을 괴롭히는 아이가 있으면, 그게 누구라도 그의 응징을 피하진 못했다. 그래선지 주위에서 그는 인기가 많았다.

이런 그에게 시련이 닥쳤다. 중학교 2학년 어느 날 열차사고를 당하게 된 거다. 사고는 그에게서 오른쪽 다리를 앗아갔다.

그는 “그때 견디기 참 힘들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나 힘든 것도 잠시였다. 사고가 나자 주위사람들은 그를 대하기 어려워했고, 이를 느낀 그는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들과 어울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그는 “고등학교 누나들이 날 예뻐했는데, 장애인이 되니 어려워하는 것 같더라”며 “이래선 안 되겠다고 느껴서 캠프도 가고, 미팅도 하는 등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다 보니 장애는 아무것도 아닌게 됐다”고 말했다.

사회에 나온 그는 다른 장애인들과는 차별화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당시 대부분의 장애인들은 장애운동으로 장애인들이 살기 좋은 사회 건설을 위해 노력했다면, 그는 “장애인도 경제력이 뒷받침 돼야 한다”는 생각에 물류사업을 시작한 거다.

이러한 결정을 한데에는 ‘장애인을 돕는 것이 꼭 운동을 통해서만 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최고의 장애인복지정책은 일자리를 통한 자립”이라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다.

2000년, 장애인표준사업장 ㈜CPL을 창립, 수십 명의 중증장애인을 고용한 바 있는 김 의원은 자신이 고용한 장애인과 그 가족들의 삶이 어떻게 변하게 됐는지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사업에서 크게 성공한 후 그는 91년 故 장기철 한국지체장애인협회 회장을 통해 장애계에 첫 발을 내딛었다. 그렇게 지난 20여 년간 장애계서 꾸준히 일한 그는 한국지체장애인협회 회장을 거쳐 19대 국회의원이 됐다.

이 드라마틱한 인생의 주인공은 새누리당 김정록 의원이다. 오는 8월말 ‘장애운동과 정치참여’란 주제로 독일을 방문하는 욜로팀이 지난 12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김 의원을 만났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야기를 통해 “어떤 것에도 좌절하지 말고 진취적으로 도전하는 삶을 살라”며 이것이 자신이 국회의원이 된 원동력이라고 밝혔다.

국회에서도 김 의원의 도전하는 삶은 진행 중이다. 그는 국회가 개원하자마자 19대 국회 제1호 법안으로 '발달장애인 지원 및 권리보장을 위한 법률'을 대표발의, 언론으로부터 관심을 받는 등 장애인들이 잘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힘쓰고 있다.

그는 “늘 그늘진 이들을 위해 살리라”는 철학으로 정치를 하고 있다며 “장애인들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데 기여했다는 평을 받을 수 있도록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다.

장애인 정치참여의 비전에 대해선 “지체·시각·농아·척수·지적·발달장애인 등 다양한 유형의 장애인을 대변하는 국회의원이 10명 이상 국회에 입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김 의원과의 일문일답

욜로팀(이하 욜) : 후천적 장애인으로 알고 있다. 어떻게 극복했나.

김정록 의원(이하 김) :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장애를 나의 약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장애에 대한 편견을 인정하지 않고 내가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뭐든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도전했다. 그리고 ‘미래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언가’에 대해 고민했다. 그동안 내 인생에서 수많은 실패가 있었지만, 어릴 적 장애를 극복했던 의지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욜 : 그 당시 많은 장애인들은 장애운동을 했다. 그런데 의원님께서는 조금 다른 길을 택하셨다.

김 : 나는 장애인도 경제력이 뒷받침 돼야 한다는 생각에 물류사업을 시작했다. 이러한 결정을 한데에는 장애인을 돕는 것이 꼭 운동을 통해서만 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란 인식이 크게 작용했다. 즉, 경제력이 있고, 실력이 있으면 아무도 나를 얕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장애인표준사업장(㈜CPL)을 창립해 수십 명의 중증장애인을 고용한 것처럼, 내가 가진 경제력과 실력을 장애인 후배들을 위해 아낌없이 바치겠다는 소신을 실천하고자 노력해왔다.

욜 : 그럼 장애계엔 언제, 어떤 계기로 들어갔나.

김 : 91년 장기철 회장을 만나 장애계에 발을 내딛었다.

욜 : 국회의원의 꿈은 있었나.

김 : 나는 정치력은 있었지만 정치의지는 없었다. 그런데 여기저기서 국회의원 해보라는 권유가 있었다. 난 출마를 하지 않겠다고 공식 선언까지 했다. 그럼에도 새누리당에서 계속적인 제의가 들어 왔지만 젊고 능력 있는 사람을 영입하라고 거절했었다. 그러던 중 새누리당의 중요한 직책을 맞고 있는 한 인사가 편지를 보내왔다. “장애인복지 발전을 위해 국회에서 노력해달라”는 간곡한 내용의 편지였다. 심사숙고한 끝에 결단을 내렸다.

욜 : 정치를 하면서 어려운 점은.

김 : 장애인이라고 얕보는 이들이 많다. 뭐만 하면 저 사람은 장애인이니까 저렇게 생각한다고 낙인찍어 버린다. 그래서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욜 : 힘들었겠다. 앞으로 장애인 정치의 비전은 뭔가.

김 : 시급한 장애계 현안과 관련한 법안을 발의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법을 발의하기 위해서는 10명이상의 참여가 필요한데, 장애인의 어려움과 법안의 필요성에 대해 이해와 동의를 구하는 것이 그리 녹록치 않다.

따라서 10명 이상의 장애계 출신 국회의원이 탄생해야 한다고 본다. 지체·농아·시각·척수·발달장애인 등 다양한 장애유형을 대변하는 국회의원이 여야를 넘어 함께 고민하고 협력해 장애인복지정책을 만들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며, 이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

아울러 이제 장애인도 전문가 시대다. 공부 많이 한 장애인들이 국회는 물론 법조계, 기업, 언론, 정부기관 등 다양한 분야에 진출해야 한다. 후배들이 경제적 어려움, 차별 등으로 학업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맘껏 펼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욜 : 마지막 질문이다. 어떤 정치인으로 기억되고 싶나.

김 : 일 잘하는 장애인 국회의원으로서 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그래서 장애인들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데 기여했다는 평을 받을 수 있도록 열심히 하겠다. 새누리당에도 ‘김정록 뽑아주길 잘 했어’란 말이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이글은 ‘2013 장애청년드림팀 6대륙에 도전하다’, ‘욜로’팀의 심지용님이 보내왔습니다. 에이블뉴스는 언제나 애독자 여러분들의 기고를 환영합니다. 에이블뉴스 회원 가입을 하고, 취재팀(02-792-7166)으로 전화연락을 주시면 직접 글을 등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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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용 칼럼리스트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했고, 중앙일보 대학생 페이스북 페이지 ‘나도 칼럼니스트’에 5년간 기명칼럼을 연재했다. 2013년 12월부터 1년 간 KBS <사랑의 가족> 리포터로, 2017년 5월부터 약6개월 간 한국장애인고용공단 블로그 기자로 활동하며 장애 문제를 취재해 사회에 알리는 일을 했다. 장애 청년으로 살며 느끼는 일상의 소회와 장애 이슈에 대한 생각들을 칼럼에 담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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