욜로팀이 2일 홍대인근 카페서 김형수 장애학생네트워크 사무국장(사진 우)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김 국장은 “장애인도 마음껏 연애할 수 있는 사회가 오길 바란다”고 밝혔다. ⓒ 심지용

“장애인도 자유롭게 연애할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장애운동의 비전을 묻는 질문에 장애학생지원네트워크 김형수 사무국장(39)은 이렇게 답했다.

지난 2일 홍대인근 커피숖에서 진행된 ‘2013장애청년드림팀’ 독일(욜로)팀과의 인터뷰에서다.

이 자리는 ‘장애운동과 정치참여’란 주제로 8월말 독일을 방문하는 욜로팀이 장애운동가인 김 국장을 만나 한국 청년들의 장애운동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듣기 위해 마련됐다.

과거 장애운동은 장애청년이 주축이 돼 대학가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장애운동은 크게 대학입학전형에서 장애인 특별전형이 도입되기 전과 후, 그리고 2000년 이후로 나뉜다.

장애인 인권적 패러다임의 변화가 장애운동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대입의 특별전형 도입 전에 운동은 ‘장애인의 기본권 보장’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당시 운동을 이끈 단체는 ‘지체장애인연합’이었다. 이들은 두 가지 운동을 했는데, 각각 노동권과 교육권을 보장하는 장애인고용촉진법과 특수교육법 제정운동이다. 김 국장은 “이 두 운동이 80년대의 가장 큰 장애인 운동의 흐름”이라고 말했다.

특수교육법 제정으로 각 대학에 ‘장애인 특별전형’이 도입되자 교육에 목말라 있던 장애인들이 대학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대두된 게 학교 내 장애학생 지원문제다.

김 국장은 “96년에 매스컴을 통해 자신의 학교(연세대) 후배의 자퇴소식을 들었다”며 “당시 학교는 이 학생을 도울 어떠한 복지체계를 확립해놓지 않은 상황이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런 문제들이 하나 둘 쌓이며 교내에서 장애학생의 인권을 주장하는 동아리들이 생겨났다.

동아리를 중심으로 학교 내 장애운동은 급속도로 확산됐다. 그러다 보니 비장애 학우들도 장애운동에 동참하게 됐다.

김 국장은 “우리보다 비장애인 선배들이 난리였다”며 “등록금 투쟁할 때. 비장애인 형들이 우리문제 가지고 싸워주니까 거기에 자극받아서 우리도 더 열심히 하게 됐다”고 말했다.

일련의 운동들로 인해 2000년 이후 각 대학에 ‘장애학생지원센터’가 설치됐다. 이 기관은 각 대학이 장애학생들에게 교내 편의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에 따라 현재 많은 장애 대학생들이 센터의 도움으로 질 높은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 반면 센터설립으로 장애학생 동아리들은 사라지고 있다.

김 국장은 “우석대, 강남대 등 몇몇 대학을 제외하면 장애학생 동아리는 대학사회서 자취를 감췄다”고 지적했다.

인터뷰 말미에 관심사를 물어보는 질문에서 김 국장은 “SBS ‘짝’이란 프로에 장애인 특집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들러준 과거에 비춰볼 때, 그의 답은 우리나라가 이제 ‘장애인들도 기본(생존)권 추구를 넘어 삶의 질’을 추구할 수 있는 사회가 됐다는 증거다. “장애인도 자유롭게 연애할 수 있는 사회”는 암울했던 시기에 힘겨운 노력으로 사회를 바꿔본 그가 던지는 희망의 메시지다.

다음은 김 국장과의 일문일답

욜로팀(이하 욜) : 과거 우리나라 장애운동은 어떻게 전개됐나?

김형수 장애학생네트워크 사무국장(이하 김) : 80년대엔 지체장애인연합이 (장애인 운동의) 중심이었어요. 당시에 이들이 두 가지 운동을 했는데, 장애인고용촉진법과 특수교육법 개정운동이었죠. 이 세대들이 지금 연구소도 하는 등 장애계를 이끌고 있어요.

그 후엔 장애인 대학생이 운동을 주도하고 관련 학과와 동아리들이 도와주는 형태가 됐죠. 이 때 가장 큰 이슈가 학교 내 복지확충이었어요. 그렇게 열심히 싸운 결과, 각 학교에서 ‘장애학생지원센터’를 만들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 요즘은 학교 내 장애관련 동아리들이 많이 사라졌죠. 그러면서 장애운동도 소감상태가 됐죠.

욜 : 선생님도 장애운동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됐나?

김 : 96년도였어요. 당시 시각장애인 신입생이 심리학과에 들어왔어요. 그런데 얼마 후 공부하기 힘들다면서 자퇴를 해버렸어요. 처음엔 몰랐어요. 근데 이게 신문에 나면서 알게 됐죠. 그러면서 우리는 고민에 빠졌어요. ‘후배가 자퇴를 했네’ 이 사실에 죄의식을 느꼈죠. 그래서 ‘이 놈의 학교. 학교를 엎어보자’는 마음으로 장애운동을 시작했어요.

욜 : 어떤 방법으로 시작하신 건가?

김 : 학교에 동아리를 만들었죠. 무작정. 그러면 장애학생들이 모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의외로 안 모이더라고요. 그래서 3명이 시작했어요. (3명이) 작전을 짰죠. 학교를 부쉬자! 근데 사람들은 아무도 안 믿었어요. ‘장애인들이 나서봐야 뭐 하겠어’라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일단 그들이 믿게 만들었어요.

욜 : 어떻게요?

김 : 각 동아리에 저희가 들어가는 거죠. 총학생회에 한 명이 들어가서 선거운동 도와주고, 만화 동아리에도 들어가고. 거기서 열심히 활동해요. 그럼 그 동아리에 있는 선배들이 대신 싸워줘요. 예를 들면, 당시 만화 동아리가 건물 3층에 있었어요. 근데 거기는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못 올라갔어요. 그러자 동아리 선배들이 대신 학교하고 싸워줬죠. 엘리베이터 설치해달라고.

욜 : 상당히 지능적인 운동이었군요.

김 : 네. 당시 저희의 운동 철학은 ‘어떻게 하면 9시 뉴스에 나갈까. 어떻게 하면 재밌게 할까’였어요. 그렇게 해서 학교가 저희 요구를 들어주게끔 만드는 거죠.

이런 일도 있었어요. 등록금 투쟁할 때였나? 비장애인 형들이 우리문제를 가지고 학교를 상대로 투쟁했어요. 그러자 학교가 저희를 협박하더라고요. 뭐든 해 줄테니 제발 쟤네 좀 조용히 시키라고. 그래서 우리가 그랬어요. “9시 뉴스에 알릴까. 아니면 중앙도서관을 경사로 해주실래요?”라고. 그래서 결국 저희가 원하는 걸 얻어냈죠.

욜 : 운동을 하면서 가장 희열을 느꼈던 때는 언젠가?

김 : 장애학생지원센터가 생겼을 때죠. 당시 연대 총장실이 있는 건물엔 엘리베이터가 없었어요. 그래서 비장애 학우들의 도움으로 전동휠체어를 총장실에 올렸어요. 타결될 때까지 못 내려온다는 조건으로. 전동휠체어에 탄 장애인이 결의를 했어요. 결국 학교가 백기 들었죠.

욜 : 참 많은 일을 하셨네요. 이렇게 한 분야서 오랫동안 활동하면 정치권에서 러브콜을 보내지 않나?

김 : 저는 정치권엔 절대 안 갈 거에요. 본인의 꿈이 정치외교학과 나와서 국회의원 되는 거면 좋은데. 장애운동 하다가 정치인 되면 간판밖에 안 된다고 생각해요. 장애인이 정치인 하려면 보좌진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실력을 쌓아야 해요. 그래서 지역구로 나가도 사람들에게 ‘저 사람 실력 있어’ 하고 뽑힐 수 있는 이가 정치권에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욜 : 장애인이 정치참여를 하기 가장 좋은 방법이 정치권에 들어가는 거 아닌가?

김 : 장애인의 정치참여 즉, 정치세력화가 꼭 그 방법으로만 이뤄지는 게 아니에요. 정치권에 들어가지 않아도 우리 편을 많이 만들면 되요. 그러면 정치권을 움직일 수 있어요. 이게 내가 생각하는 장애인의 정치참여고, 정치세력화에요.

욜 : 앞으로 청년들이 어떤 목표로 장애운동을 전개했으면 좋겠나요?

김 : 장애인도 자유롭게 연애할 수 있는 사회가 도래하도록 했으면 좋겠어요.(웃음)

*이글은 ‘2013 장애청년드림팀 6대륙에 도전하다’, ‘욜로’팀의 심지용님이 보내왔습니다. 에이블뉴스는 언제나 애독자 여러분들의 기고를 환영합니다. 에이블뉴스 회원 가입을 하고, 취재팀(02-792-7166)으로 전화연락을 주시면 직접 글을 등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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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용 칼럼리스트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했고, 중앙일보 대학생 페이스북 페이지 ‘나도 칼럼니스트’에 5년간 기명칼럼을 연재했다. 2013년 12월부터 1년 간 KBS <사랑의 가족> 리포터로, 2017년 5월부터 약6개월 간 한국장애인고용공단 블로그 기자로 활동하며 장애 문제를 취재해 사회에 알리는 일을 했다. 장애 청년으로 살며 느끼는 일상의 소회와 장애 이슈에 대한 생각들을 칼럼에 담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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