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을 못 걸으니 초등학교 입학은 꿈도 못 꾸었다. 집안도 가난해서 학교에 다닐 형편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어린 마음에서도 죽기 살기로 걸음마 연습을 했다. 걸음을 제대로 걷는 것만이 그가 살길인 것 같았던 것이다.

이상곤씨 가족. ⓒ이복남

그동안 아버지는 그의 치료를 위해서 논밭전지는 물론이고 방앗간까지 다 팔아먹은 터라 도시로 나가 일자리를 알아보신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광주에서 양수기 사업을 하신 것 같았다.

아버지가 광주에서 자리를 잡았는지 그가 10살 때 광주 방림동으로 이사를 했다. 두 살 아래인 8살짜리 동생과 함께 방림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을 했다.

“학교가 집 근처라 혼자 가방을 메고 걸어 다니기는 했지만 엎어지고 자빠지고 무릎이 성할 날이 없었습니다.”

그는 필자에게 바지를 걷어 무릎을 보여 주었는데 그나마 왼쪽 무릎은 좀 나았지만 오른쪽 무릎은 왼쪽에 비해 많이 얇고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아이들이 놀리고 안 끼워 주니까 묏등에 앉아서 친구들이 노는 것을 구경만 했습니다.”

또래친구들은 절뚝발이라고 그를 놀렸다. 그리고 절뚝절뚝 또는 짤래짤래 하면서 그를 흉내 내면서 약을 올렸다. 그러나 조금 커서는 누구든지 그를 놀리다가 그의 손에 걸리기만 하면 가만 안 두었다.

“제가 나중에 폭력적이 된 것도 어렸을 때 너무 놀림을 받아서 누구든지 걸리기만 가만 안 두었던 성격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특별히 학교 공부를 잘하는 것도 없었지만 공부에는 아예 관심도 없었다. 가방을 들고 절뚝거리며 학교를 오가기는 했지만 참으로 서러운 시절이었다. 그러나 세월은 흘러서 중학생이 되었다.

“학비를 못 냈습니다. 조회시간에 담임한테 깨지고, 교무실로 끌려가고, 서무실까지 불려가서 3군데를 불려 다녔습니다.”

그 시절에는 누구나 다 그랬겠지만 학비를 못 내면 학교에 다닐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담임선생이 학교에 나오지 말라고 했다. 그래도 그는 학교를 다녔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2시간의 자율학습 시간이 있었다.

“돈 안낸다고 자율학습시간에는 못 들어오게 하고, 교문은 잠겨있어 집에 가지도 못하고 그 시간은 정말 죽을 맛이었지만 그럴수록 오기가 생겼습니다.”

동생들은 학비 재촉을 견디다 못해 중퇴를 했지만 그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선생에게 얻어터지면서도 끝까지 학교를 다녔다. 학비를 못 내면 졸업을 안 시켜줬는데 어떻게 중학교를 졸업했을까.

“졸업 무렵에는 밀린 납부금을 다 냈습니다.”

마침 중동 바람이 불 때라 아버지가 사우디아라비아를 다녀오시면서 밀린 납부금을 청산할 수가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농고에 입학했다. ‘조금만 공부하면 될 놈인데 왜 안하느냐’ 선생은 다그쳤지만 공부에는 취미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이상곤씨와 어윤숙씨의 나들이. ⓒ이복남

아버지는 중동에 갔다 온 이후 풍토병인지 당뇨 합병증으로 고생을 했다. 동생들은 새벽에 신문을 돌리기도 했지만 그는 다리가 부실한 탓으로 신문도 못 돌렸다. 어머니는 아버지 약값이라도 보내려고 강냉이 튀밥장사도 했다.

그는 전남 농대에 지원했지만 대학을 포기했다. 그는 다리가 부실했지만 농사를 짓고 싶었다. 농대를 나와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철이 들고 보니 고향에는 그가 농사지을 한 뼘 밭뙈기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고향에는 땅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는 절망했다. 고향으로 돌아가기는 이미 글렀고 그의 수중에는 돈 한 푼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빈둥빈둥 놀고 있으려니 아는 사람이 나주에 있는 플라스틱 재생공장으로 데려다 주었다.

공장에서는 재활용 플라스틱을 분류하고 있었다. 플라스틱은 열에 강한 것과 열에 약한 것으로 분류를 하는데 PP PVC 아크릴 등으로 분류를 했다. 그래도 처음 얻은 직장이라 최선을 다하려 노력했지만 한 달이 지난 후에 주인은 월급을 주면서 그만두라고 했다. 다리가 부실하니까 다른 사람들만큼 일을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다시 광주로 돌아왔고 몇 달이 지난 후에 이번에는 자동차 라이닝 가계에 취직을 했다. 라이닝이란 브레이크 제동장치인데 정비공장에 납품을 하곤 했다. 그런데 사장이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나가는데 종업원이었던 그는 가계를 지켜야 했다. 주객이 전도된 양상이었으나 그는 오토바이를 타지 못했던 것이다.

“저는 아직 운전면허도 없습니다. 그 때도 몇 번이나 해 보려고 했지만 발이 말을 잘 안 듣고, 그리고 어지러워요.”

라이닝 가계사장은 종업원을 두고 배달을 나가야 하는 신세를 한탄하며 두 달 만에 그를 해고 했다. 할 일없이 동네 오락실을 기웃거리다가 오락실 사장과 친분이 생겼다. 오락실 사장은 부산에서 왔다며 부산에 가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는 찬밥 더운밥 가릴 형편이 아니었다. 오락실 사장은 친정하게도 지인이 있다는 부산 당감동까지 그를 데려다 주었다.<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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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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