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일하던 천막공장에는 밥을 해 주던 아가씨가 있었다. 아가씨는 시간만 나면 그에게로 와서 미싱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공장에는 그와 여동생 외에 미싱일을 하는 아주머니가 몇 사람 더 있었는데 아가씨가 왔다 가면 아주머니들은 아가씨를 꼬시라고 그를 부추겼다. 천막공장에서 밥하던 아가씨가 지금은 김갑술 씨의 부인이 된 김종순(1951년생)씨였다.

김갑술씨의 결혼사진. ⓒ이복남

“서울에서 요꼬(편물기계)를 하면서 동생들 공부를 시켰는데 어느 아줌마의 꼬임에 빠져서 그 공장에 식모로 팔려왔어요.”

종순 씨는 어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술이라도 배워 보려고 틈만 나면 김갑술 씨를 찾아 갔는데 미싱기술은 잘 가르쳐 주지 않더란다. 그러자 얼마 후에는 공장 사람들에게 김갑술이 김종순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그러자 김갑술이 공장을 그만두었다는 것이다.

“사장이 종순 씨를 조카사위를 삼으려고 했는데 저와 소문이 나니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공장을 그만두고 다시 노가다 일을 하면서 저녁마다 종순 씨를 찾아 갔지만 만날 수가 없었단다.

“저 사람(옆에 앉아 있는 갑술 씨를 가리키며)이 매일매일 공장으로 찾아 왔는데 저는 숨어서 그 사람을 만나주지 않았어요.”

갑술 씨가 몇 달인가 찾아 왔었지만 종순 씨는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도 저 사람과의 결혼은 운명인 것 같았어요.”

종순 씨는 갑술 씨와 결혼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인집 조카와 결혼할 생각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종순 씨는 시들시들 시들어 갔다.

“하루는 주인집 사장이 저를 불러서 뭐하고 싶냐고 물었는데 월급 받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더니 그동안의 일한 값을 계산해 주셨어요.”

당시의 식모(食母)란 어렸을 때 입주하여 밥하고 빨래하고 집안일을 해주면서 의식주를 해결했고, 나이가 들면 한 살림 장만해서 시집을 보내주는 게 보통이었다.

그럼에도 사장은 그동안의 월급을 계산 해 준 모양이었다. 10만 원쯤 받았다고 하니 한 달에 5천원쯤 해서 2년여의 월급인 모양이었다.

“그 때 손목시계가 유행했는데 돈이 생기면 그 시계를 꼭 사고 싶었어요.”

당시에는 하루에 한 번씩 밥을 주던 아날로그 손목시계로 오리엔트 시티즌 등이 유행했는데 그 무렵에도 비싼 시계로 롤렉스 브로바 오메가 등이 있었다. 1970년에 쌀 한가마니 80kg의 값이 5~6천원이었는데 오리엔트나 시티즌 시계도 쌀 두가마니 값 정도는 된 모양이다.

“사장에게서 돈을 받자마자 그토록 갖고 싶었던 시계였기에 거금을 주고 샀어요. 지금은 시계 이름도 잊었지만 그 때만 해도 모두가 시계 이쁘다고 부러워했어요. 그런데 저 사람 여동생이 시계 한번 만 차 보자고 하더니 그대로 가져가 버리고는 다음날 출근도 안했어요.”

사장에게는 기술을 배우겠다고 보따리를 챙겨서 갑술 씨 집으로 찾아 갔다. 갑술 씨와 결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동생에게서 손목시계를 받기 위해서였다. 물어물어 대티고개에 있는 김갑술 씨 집을 찾기는 했는데 여동생은 친구들과 여행을 갔다며 집에 없었다.

욕지도에서 김갑술 씨 부부. ⓒ이복남

욕지도에서 딴 산딸기. ⓒ이복남

“다음 날은 여동생이 온다고 해서 그 집에서 하루 밤을 잤는데, 여동생은 다음날도 오지 않았고 그 대신 어머니가 제 보따리를 감춰 버렸어요.”

종순 씨는 청각장애인이 아니어서 필자에게 지난 시절 이야기를 구구절절 풀어 놓았는데 지난 시절이 생각나 울먹이는 종순 씨의 이야기는 석 달 열흘을 해도 모자란다고 했다. 갑술 씨와의 인연은 참으로 기가 막힌 선녀와 나무꾼이었다. 그녀는 시누이에게서 손목시계는 돌려받지 못했다고 했는데 돌려받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는 끝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형제들도 그렇고 아는 사람들이 ‘벙어리’라고 하는 것까지는 참겠는데 ‘법자’라는 소리는 정말 듣기 싫어요.” 아직도 남편에게 ‘법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단다.

처음에는 갑술 씨 아버지가 시계는 잃어버린 샘 치고 그냥 떠나라고 했지만 옷 보따리, 그리고 그 속에 들어있는 돈을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시어머니가 시동생을 시켜서 종순이를 며느리 삼겠다고 우리 집에 편지를 보낸 모양이에요.”

갑술 씨는 김해 김 씨이고, 종순 씨는 경주 김 씨라 결혼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친정에서는 어려운 살림에 딸을 그냥 데려가겠다니 그러라고 한 모양이었다.

종순 씨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결혼 날이 잡혀지고 치마저고리 한 벌, 그리고 신랑 양복 한 벌을 새로 맞추고는 근처 절에서 결혼식을 치렀다. 그리고 집에 오니 집안은 잔치 손님들도 왁자지껄했다.

“시어머니가 결혼식도 안 시켜주고(신부 드레스도 못 입어 봤다는) 제 돈으로 잔치를 벌이신거예요.”

갑술 씨는 건설현장에 노가다로 일을 하러 다녔다. 그러나 월급은 아내인 종순 씨가 아니라 어머니 몫이었다.

“저 사람과 결혼을 하고 보니 갑술 씨가 정말 바보 같았어요. 듣지도 못하는데 말도 못하고, 글자도 모르고 월급은 맨날 어머님이 다 가져가시고…….”

종순 씨는 갑술 씨에게 말을 가르쳤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눈 코 입 등 일상에서 보이는 말들을 되풀이했는데 같은 말을 자꾸 반복하자 갑술 씨도 한두 마디씩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내는 남편이 제대로 발음을 할 때까지 같은 말을 수도 없이 반복했고 아내가 듣기에 흡족한 발음이 아닐 때는 남편의 손등을 때리고 또 때렸다.

“밤마다 저 사람을 두들겨 패면서 말을 가르치고 글자를 가르쳤어요.” 김갑술 씨는 비록 듣지는 못하지만 종순 씨 덕분에 말은 어느 정도 할 수 있기에 필자에게도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저는) 술을 못했는데 옆에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엄마한테 대들라고 하데요.” 그러다 어느 날 어머니와 대판 싸우고 구덕산 꼭대기에 방을 하나 얻어서 집을 나왔다. 남편은 일을 하러 나가고 종순 씨는 물도 이다 팔기도 하고 연탄도 져다 날랐다. - 당시만 해도 물이 귀했기에 물 한 동이에 얼마씩 받고 팔았다. 그러다가 건설현장이 있는 범어사 근처로 이사를 가서 2년쯤 지내면서 제법 돈도 모았다. <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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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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