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렵 광안리에서 양장점을 운영하던 장애인이 있었는데 시장에서 마주치면 인사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그가 막상 장애를 입게 되자 그 장애인이 달리 보였다. 그 장애인은 전종석씨에게 장애인기능대회를 소개했다.

전종석씨. ⓒ박병후

“장애인기능대회? 그런 게 있었어요?”

전종석씨는 금시초문이었지만 뭔가가 필요했기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도전해 보고 싶었다. 장애인등록을 했다. 지체장애 5급이었다. 처음에는 별로 기대 하지 않았고 연습 삼아 출전했기에 당연히 낙방이었으나 그곳에서 양창선 선생을 만났다.

전종석씨는 어릴 때부터 양복을 만들어 왔지만 따로 선생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정해진 룰에 따라 옷을 만들어야 하는 장애인 기능대회에 출전하면서부터 선생이 필요했던 것이다. 전종석씨가 처음 양복을 배우던 시절만 해도 양복기술은 호황이었다.

그러나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양복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양복을 입게 되었으나 기성복의 대량화로 양복을 맞춰 입는 사람도 배우려는 사람도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양창선 선생은 자신의 양복기술을 전수하기 위해서 될성부른 나무를 찾아다녔는데 양창선 선생의 레이더에 전종석씨가 걸렸던 것이다.

전종석씨와 양창선 명장의 신문기사(부산일보 2010-11-02) ⓒ이복남

전종석씨는 양선생의 지도 아래 2003년 부산장애인기능대회에서 금메달을 받았다. 큰딸은 결혼을 했고 작은 아들은 컴퓨터응용학과를 다니다가 군대를 갔다 왔다. 그는 부산에서 장애인기능경기대회에 매달렸는데 집은 양산에 있었고 집에는 아내와 이제 막 군에서 제대한 아들이 있었다. 아들은 뭔가 실험을 한 것 같았는데 컴퓨터가 폭발했고 아들은 정신을 잃었다. 집은 불탔고 아들은 목숨은 건졌으나 얼굴 등은 화상 투성이었다.

“그 후 애들 엄마와 이혼을 했고, 아들은 화재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요양원에 있습니다.”

전종석씨의 한 땀 한 땀은 그야말로 피눈물이었다. 아내와 헤어지고 금쪽같던 아들은 화상에다 정신병이라니 그가 매달릴 것은 바느질뿐이었다. 터질 것 같던 가슴 아린 비통도 세상에 대한 알 수 없는 분노와 원망도 양복 바느질에 매달리다보면 어느 순간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2010년 가을, 내년 국제대회를 앞두고 열린 선발전에 뽑혔다. 2011년 6월부터 합숙훈련에 들어갔다. 불안과 초조함 가운데 합숙훈련 3개월이 끝났다.

그리고 9월 25일(일)부터 30일(금)까지 6일간 ‘2011 서울 제8회 국제장애인기능올림픽대회’가 올림픽공원 올림픽홀과 양재 aT센터에서 개최되었다. 이번 대회에는 전세계 57개국에서 1500여명의 선수단이 40개 직종에 참가했다.

전종석씨가 출전한 양복부분은 9월 28일 양재동 aT센터에서 6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출전선수는 15명인데 한국에서는 전종석씨와 박종호씨가 출전했다.

국제장애인기능올림픽대회에 출전한 사람들.(사진제공: 전종석)

전종석씨가 제일 어렵고 힘들었던 부분은 무엇이었을까. “국내기능대회에는 양복지(재료)와 패턴(모형)을 주는데 이번 대회에는 패턴을 따로 주지 않고 양복지에 그려 주더군요.” 그래서 어려웠던 점이 무엇이었나. “보통은 우리가 알아서 양복지에 패턴을 그리는데 아예 패턴을 그려주니까 주머니나 칼라 등 부속품 빼기가 만만치 않았어요.” 그런 문제라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양복을 만들 때 제일먼저 등판에 심지를 붙여 안감을 대고, 앞판에 주머니를 붙이고, 칼라를 만들고, 소매를 붙이고 마지막으로 단추 구멍을 만들고 단추를 단다. 보통 단추 구멍은 기계로 만드는데 대회에서는 손바느질로 만들어야 한단다.

“아침 10시에 시작해서 최선을 다해야 했으니까 돌아볼 틈이 없었어요. 시간 안에 간신히 마치고 옷걸이에 걸었는데 완성 못한 사람도 있더군요.”

발표는 다음날 아침 10시였는데 1등에 대한 자신은 없었고 가슴은 두근두근 불안해서 견디기 어려웠다.

“잠실 롯데호텔이 숙소였는데 지하 마트에서 포도주를 몇 병 샀어요.”

3개월 합숙을 했으니 다 아는 사람들이라 포도주를 나눠 마시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 양재 aT센터로 갔다. 초초해서 커피도 뽑아먹고 화장실도 들락거렸다. 10시가 되자 전광판에 1등이라는 그의 이름이 들어 오자 그는 주저앉고 말았다. 그를 지도했던 양창선 선생이 옆에서 그를 일으켜 세웠고 그는 양선생님을 부둥켜 않고 울었다. 양선생은 그를 택시에 태워 경마공원을 한 바퀴 돌면서 그의 격한 가슴을 진정시켜 주시더란다.

“양복에서 금메달을 땄으니 다음번엔 양장에 한번 도전 해볼 겁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꿈은 양장의 금메달이 아니었다.

“수선집 체인점을 내고 싶습니다.”

수선집은 많은 돈이 들지도 않고 조금만 기술이 있으면 된다. 장애인이나 비장애인이나 그 조금의 기술을 가르쳐서 수선집을 내게 하고 양복이나 가죽제품 등 까다로운 수선은 본부로 보내서 수선할 수 있도록 수선집 체인본부를 만들고 싶단다.<끝>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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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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