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그네가 여행을 하다가 큰 강가에 이르렀다. 그는 강을 건너 맞은편 언덕으로 가고 싶었다. 그 땅이 이곳보다는 튼튼하고 평화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가에는 불행히도 배 한척이 없었다. 나그네는 근처를 둘러보다가 갈대와 나무로 뗏목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나그네는 뗏목을 타고 무사히 평화로운 땅에 이르렀다.

박경복씨 ⓒ이복남

뗏목이 아니었더라면 어떻게 강을 건널 수 있었을까 참으로 고마운 뗏목이었다. 그러나 평화로운 땅에 도달하고 보니 고민이 생겼다. 이 고마운 뗏목을 어찌할 것인가. 뗏목이 고마우니 은혜를 갚기 위해 뗏목을 짊어지고 갈 것인가. 아니면 이미 강을 건넜으니 아무리 고맙다고 해도 뗏목은 여기에 두고 갈 것인가.

‘뗏목의 비유’라는 이 이야기는 금강경(金剛經)에 나오는 내용인데 이에 대해 부처님은 뭐라고 하셨을까. 아무리 자신에게 도움을 주었고 소중한 것이라 해도 뗏목은 강을 건너는데 필요한 것이다. 고맙다고 힘들게 뗏목을 짊어지고 간다면 오히려 거치적거릴 수가 있어 나그네는 제대로 여행을 못할 것이고 어쩌면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강을 건너기 전까지는 뗏목을 이용할 수밖에 없지만, 강을 건넌 뒤에는 미련 없이 뗏목을 버리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제 눈에 안경이라고 모든 것을 자신의 눈으로 볼 수밖에 없겠지만 달을 보라는데 달은 안보고 손가락만 본다는 이야기도 있다.

박경복씨의 경우도 이와 유사하지 않을까 싶다. 박경복(43)씨는 지체2급 장애인으로서 목발에 의지해서 겨우 걸음을 옮길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부산 좌천동 가구거리에서 조각을 한다. “장애인으로 보지 말고 조각하는 사람으로 봐 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그는 장애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단다. 그러나 자신이 하는 조각 즉 불감(佛龕)에 대해서는 거침이 없다.

석굴암 석가모니 부처 뒤로 감실이 보인다. ⓒ문화재청

그의 고향은 제주도 애월읍 바닷가이다. 아버지는 배를 탔고 어머니는 집에서 살림을 했는데 위로 누나가 둘 있고 그는 막내란다.

“세살 무렵 소아마비에 걸렸는데 어머니 말로는 전국방방곡곡을 다 다녔다고 합디다.”

제주도 바닷가에서 뭍으로 한번 나가기도 쉽지 않았을 터인데 전국을 다 다녔다면 돈이며 시간이며 오죽했을까.

“어렸을 때는 북소리 징소리가 제일 무서웠습니다.” 북소리 징소리는 평소에도 무서웠지만 꿈을 꾸면 둥둥둥 북이 울리고 옛날 군인들이 투구 쓰고 긴 칼 차고 말 달리는 꿈을 자주 꾸었단다. 어찌 보면 굿에 대한 잔영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 할머니나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얼마나 굿을 했기에 북소리 징소리가 무서울 정도였을까.

아무리해도 소아마비가 나을 기미가 없자 7~8살 때 치료를 포기를 하고 그는 부산의 어느 재활원에 들어갔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기술을 배웠는데 그가 생활하던 재활원에는 도장과, 조각과, 제화과가 있었다. 처음 조각을 배울 때 어렵지는 않았을까.

국보 제42호 송광사목조삼존불감 ⓒ문화재청

“처음에는 도장을 배웠습니다. 도장을 한 3개월 하고 나니까 더 이상 재미가 없어서 결국 조각으로 바꾸었습니다.”

조각과에서 제일 먼저 하는 것은 사포치기로 다른 사람들이 해 놓은 조각을 사포로 다듬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칼을 갈고 쓰는 법, 나뭇결을 따라 밀어 보는 법 등을 배웠다. 처음으로 조각을 배운 것은 동그란 모양이나 네모난 모양들을 조각해 보는 것이었다.

스무 살이 넘어 처음 일을 한 곳은 해운대 우동에 있는 조그만 조각 공장이었다. 그 공장에서는 일본에 수출하는 불단을 만들고 있었는데 밤낮없이 일을 했기에 그런대로 수입도 괜찮았다. 그러나 공장에서 일만 했기에 공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기도 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몇 년 만에 공장은 문을 닫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여기저기에서 조각 일을 했다. 

“그 때만 해도 조각하는 일은 거의 돈내기로 했는데 비장애인들과는 게임이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말에 ‘돈내기라면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경쟁한다’는 말이 있듯이 돈내기란 일종의 도급(都給)으로 한 개당 얼마씩 돈을 주는 형식인데 주로 건설 현장이나 공장에서 많이 사용하였다.

아침 9시에 출근해서 저녁 6시에 퇴근하고 일요일이나 공휴일에는 쉴 수도 있는 월급제도 아니고, 하루에 8시간이나 10시간 등 일하는 시간을 정해놓고 일한 날수만큼 돈을 주는 일당제도 아니었다. 요즘은 아르바이트도 시간당 얼마해서 일한 시간만큼 돈을 받고 있지만 돈내기란 어떤 일감에 값을 매겨 하나 하는데 얼마라는 조건으로 10개하면 10개 값을 받고 100개하면 100개 값을 받게 되는 일종의 속도전이었기에 사람들은 죽기 살기로 일을 했다. 건설현장 같은 곳은 주어진 양만 채우면 시간에 관계없이 현금을 손에 쥘 수 있으므로 인부들은 오히려 돈내기를 선호 했다고도 한다. 

박경복씨 이야기는 2편에 계속.

* 이 내용은 문화저널21(www.mhj21.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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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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