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휠체어!이제간편히차에수납한다 배너

[기사본문가기]

로그인 | 회원가입 에이블뉴스를 시작페이지로즐겨찾기추가
배너: 신문고
에이블뉴스홈으로 가기
배너: 에이블윈도우
배너: 최첨단 스포츠의족 각종보조기전문제작 서울의지
뉴스로 가기동영상으로 가기포토로 가기지식짱으로 가기블로그로 가기사이트로 가기쇼핑으로 가기
인물
미키코리아휠체어서울총판,케어라이프
배너: 장애인뉴스서비스 오픈! 에이블윈도우로 쉽게 관리하세요~. 배너: 2010한국장애인인권상 인권의 지평을 넓힌 주인공을 찾습니다
뉴스홈 > 인물/단체 > 인물
글자 크게글자 작게 이 기사내용을 인쇄합니다.이 기사내용을 이메일보냅니다.기사목록으로 갑니다. 기사오류신고하기 트위터 미투데이 RSS
결국 순의(殉義)하신 분, 이익섭 박사
고인이 되신 이익섭 박사를 추모하며…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10-02-03 14:53:35
보름 전,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밤새 뒤척이다가 다음 날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뭔가 전해드려야 할 말씀이 있는 것 같아서요.

이 박사가 한국DPI 회장을 맡고 계시는 동안 저 또한 부회장으로 일하면서 많은 것을 음으로 양으로 배웠고, 장애운동에 대한 확고한 그 분의 철학을 저의 것으로 받아들였고, 그 분이 이루고자 했던 비전 역시 저의 비전으로 받아들였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각색의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일이라 그 중에는 섭섭하고 아쉬움도 있어서 마음 한 켠에 밀어두었던 묵은 감정들도 새삼 울컥해졌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제는 마음껏 뜻을 이룰 수 있는 그야말로 웅혼한 나이에 그만 떠나가셔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아쉽고 억울했습니다.

초등학생이 망막염이라는 병에 걸려서 시력을 잃게 되었고 맹학교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면서 전망이라고는 안마사나 침술사밖에 없던 시절을 너무나 답답하게 여겼고, 그것보다도 더 그를 괴롭혔던 건 사회에서 바라보는 낙인의 시선에 절망과 오기를 품었던 그의 아픔이 새롭게 고스라니 살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이후 그는 어렵사리 연세대 신학과에 입학했고 졸업 후 병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간호사인 지금의 부인을 만나 미국 유학을 떠나고 거기서 피나는 노력으로 마침내 그 어렵다는 시카고대학의 사회복지정책학 박사가 되었습니다.

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시간강사 일을 하다가 1993년 연세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 시각장애인 교수1호라는 또 다른 이름이 붙여지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교단에서 가르치는 일 못지않게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에 정열을 쏟았습니다. 대표적인 일이 한국DPI의 활동이었지요.

송영욱 변호사가 회장으로 재임할 당시, 세계장애운동의 흐름과 비전을 소개하고 국내외 활동을 상호 연결시키는 일을 도와서 함께 해나왔습니다.

그러다 2002년 젊은 장애인 운동가들에게 주도적인 역할을 넘기는 변화를 이룰 때 그는 차기 회장직을 맡아서 현실적인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셨지요.

주체적인 ‘나:I’라는 존재가 엄연히 있는데, 장애라는 이유 때문에 이 ‘나’를 ‘나’와는 상관없이 일률적으로 다르게 규정하고 대상화시켜버리는 사회적인 ‘나:Me’가 따로 존재하는 것을 알게 되고 여기에 대한 충격을 성찰적인 사회운동으로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다름 아닌 ‘당사자주의 운동’이라는 그의 경쾌한 강의나 글은 젊은 장애인들을 깨어나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강의는 울분에 차거나 분노하거나, 흥분하지 않습니다. 매끄럽고 세련되며 명확한 논리와 세계인권의 역사를 들어서 설명해냅니다. 그러면서 어떤 장엄한 웅변보다도 더 확실하게 가슴에 와 심겨져버립니다.

여태까지 장애라는 조건에서 도망가고 회피하고 싶었던 사람들이 이 강의를 듣는 순간 어쩐지 선택받은 듯한 느낌에 휩싸입니다. 움츠려들어 있던 나의 권리를 당당하게 되찾는 일이야말로 편견과 도그마에 빠져 있는 이 사회를 해방시키는 듯한 자긍심마저 생길 정도입니다.

지난 2006년 8월 국제장애인권리협약 제8차 특별위원회에 정부 대표단 일행으로 참가한 고 이익섭 박사. 당시 한국장애인연맹 회장으로 일하고 있던 중이었다. ⓒ에이블뉴스
에이블포토로 보기▲지난 2006년 8월 국제장애인권리협약 제8차 특별위원회에 정부 대표단 일행으로 참가한 고 이익섭 박사. 당시 한국장애인연맹 회장으로 일하고 있던 중이었다. ⓒ에이블뉴스
그러던 그가 유엔에서 세계장애인권리협약을 만들 때 우리나라 대표로 참여하게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대부분 정부의 고위공무원이 대표로 참여했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민간단체의 대표이자 장애인 당사자가 직접 국가대표로 활동하는 것을 보고 다른 나라 장애인들이 그렇게도 부러워했지요. 우리나라의 열린 마인드를 높이 평가받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협약이 성안된 그 이듬해 2007년 DPI세계대회를 우리나라에서 치루면서 이후의 국제적인 실천방안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논의와 결의의 장을 만들어냈습니다.

장애인권의 확보를 위한 뛰어난 전략가이자 젊은 지성인인 그를 향해 세계장애인들은 ‘한국의 닥터 리’라고 부러워했고 그리고 존경하고 의지했습니다. 그랬던 그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겨우 쉰여덟에 가시다니요. 지금부터 더 많은 일을 하시고 더 많은 후학을 키우시고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더 많은 대안과 정책을 내 놓으실 나이, 여태까지 피땀 흘려 만들어놓은 경험과 지혜를 이제부터 조금은 느긋하게 풀어놓으실 경륜이 되었는데 이 모든 것을 뒤에 두고 그냥 떠나가시다니요.

그러나 이렇게 빨리 서둘러 떠나시는 것은 예견되어 있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장애인권리협약을 만드는 4년에 가까운 기간 내내 그는 방학 때마다 뉴욕으로 날아가야 했습니다. 매번 2주에 걸쳐서 열리게 되는 유엔의 특별회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틈 없는 강행군이었고 그는 그때마다 보이는 눈 대신에 온몸이 마치 안테나가 된 것처럼 신경을 집중하며 꼿꼿이 앉아 있곤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간을 아끼기 위해 식사시간에 이루어지는 수많은 회의와 간담회들. 아무리 시카고대학 박사라고 해도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었지요. “밥 먹으면서 영어로 회의하면 아직도 긴장하고 체해요!”

아프리카인, 아시아인들, 온 세계 인종들이 모여 특유의 억양으로 스피치 하는 하루 종일 그는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그렇게 자신을 혹사시켰지요.

그런데 그때 이미 그는 상당한 중병 상태였습니다. 자주 병원에 입원과 퇴원을 거듭하면서 이런 일들을 해내고 있었지요. 그러나 그가 와병중이라는 것은 우리가 머리로 알고 있는 사실일 뿐, 체험되지는 않는 먼 이야기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앞에 나타난 그는 늘 명쾌했고 유머러스하기까지 했으니까요. 그리고 병에 대해서 전전긍긍하거나 앓는 소리를 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몸은 좀 어떠신지 물어보는 것조차 미안할 정도로 그의 태도는 꼿꼿했고 정신세계는 유리처럼 투명했습니다.

지난번 문병하러 갔다가 만났던 석박사 과정의 학생들의 말도 마찬가지더군요.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일정이 지연되거나 핑계가 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요. 그리고 병원에 입원한 사실을 알린 적도 단 한 번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병원에 입원한 것을 알려주었다고, 그것만으로도 이번 병세의 엄중함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너무 완벽하려고 애쓰시지 않으셨나요? 권리협약을 만들 때는 어쩔 수 없었다고 치더라도 혼신의 힘을 다해 2007년 세계대회를 치루고 난 다음에는 이 일 저 일 훌훌 털어버리고 좀 쉴 수는 없었나요. 아무리 책임진 일이 막중하다고 해도 목숨을 바꿀 만치 중한 일이었나요?

그래서 더욱 아쉽고 분하기까지 합니다. 왜 좀 쉬시지 못하셨을까? 병과 싸워야했던 어린 시절과 암울했던 청소년기, 몸이 상할 만치 열심히 공부했던 청년기. 그리고 장애인의 인권을 바로 세우는 일이야말로 인류인권의 완성이라고 믿어 열심히 투신하셨던 장년기의 열정. 이 모든 노력과 결실이 있었는데 왜 마음 놓고 좀 더 쉬지 못하셨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투정이 투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투혼을 다해 애쓰는 동안 가까운 자리에 있어서면서도 든든한 조력자가 되지 못했던 저 자신에 대한 합리화와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저 스스로 잘 알고 있습니다.

언제가 회의 중간에 약간의 틈을 타서 그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장애가 아니면 뭘 할 것이냐, 라는 물음에 대한 본인들의 답은 어떤 겁니까?”

내가 기억하는 그는 사적인 얘기를 늘어놓거나 본론 밖의 이야기를 길게 이야기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짧은 유머를 결코 잊었던 적은 없었지요. 그렇게 물었을 때 갑자기 마음이 풀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지성인인데다 유머와 기지가 넘치는 그의 대답은 무엇일까,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나는 우선 내 대답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습니다. 일단 달리기부터 해보고 싶다. 시원한 바람에 온몸을 부딪치면서 땀이 나도록 뛰어보고, 그래서 내 다리 근육이 얼마나 탄탄하고 굳센지 한번 느껴보고 싶다. 그뿐이랴, 눈 내린 산 정상을 올라가보고도 싶고, 근사하고도 빠르게 돌아가는 춤을 추고도 싶다는 생각들을 떠올렸지요.
그런 설왕설래를 하고 있을 때 그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장애가 없는 삶을 나는 결코 원하지 않는다. 이런 대답을 우리가 할 수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펴던 저는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습니다. 아무리 장애운동을 하기로서니 상상조차 마음대로 못하나……. 이러면서요.

그랬던 것입니다. 그는 상상에서조차 장애인으로서 완전한 삶을 살아내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그는 장애를 다양한 삶의 한 형태로 보는 사회를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주체적인 'I'와 대상적인 'Me'가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사회가 아니길 소망했습니다. 그래서 장애가 결핍이나 마이너스의 낙인으로 되지 않기를 바랐을 겁니다. 장애인 삶의 한 방식이 이 세계 속에서 또 다른 하나의 문화로 자리매김하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입니다. 모든 장애인들이 이제는 알게 되었다시피, 장애라는 것을 극복해나갈 어떤 어중간한 지점으로 삼지 않고 그 자체로써 완전하게 향유하기를 바랐습니다.

지난 2008년이 대학에서 그가 쉴 수 있었던 안식년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도 그는 쉬지 않고 일했다고 합니다. 학교 일뿐 아니라 사회적인 이런저런 일들을 물리치지 않고 참여했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입원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보통 때와 다르지 않게 일을 처리하셨다고 그의 학생들이 안타까움과 함께 전해 주더군요. 그 말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에게는 병마도 장애처럼 마침내 한 몸이 되어버렸구나. 장애를 넘어가야 할 징검다리로 삼지 않았던 것처럼 병마도 완치되어야 할 목표를 향한 중간지점으로 보신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인정하고서 어떤 유보도 없이 완전하게 사신 것이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병문안을 갔던 날, 결국 뵙지 못했습니다. 통증을 완화시키는 모르핀 주사를 맞고 자고 깨기를 거듭한다는 말만 전해 들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다가 다시 올라가는 벨을 눌렀습니다.

무의식중에 계시다 할지라도 나로서는 당신의 노고와 업적에 대한 감사함을 전해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각자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그 자체가 때로는 누구에게 잘못이 되기도 하는 이런저런 인간사의 일들을 용서하시라고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다시 내려왔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기적이 도래하여 다시 뵐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기적은 오지 않았군요. 다시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난날의 당신의 살아오신 모든 족적이 그야말로 기적이었습니다. 더 이상 무슨 기적을 바라겠습니까. 다만 아직은 삶의 경계 이쪽에 서 있는 유한한 자들의 욕심일 뿐이지요.

편안히 가시옵소서. 당신이 이루었고 또한 이루고자 하셨던 높은 뜻은 영원한 삶과 함께 지속될 것입니다.

*이 글은 한국DPI 전 부회장이자 소설가인 김미선님이 보내온 글입니다. 에이블뉴스는 언제나 애독자 여러분들의 기고를 환영합니다. 에이블뉴스 회원 가입을 하고, 편집국(02-792-7785)으로 전화연락을 주시면 직접 글을 등록할 수 있도록 기고 회원 등록을 해드립니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발송 ablenews@ablenews.co.kr-

기고/김미선 (msmoz@naver.com)

기고/김미선의 다른기사 보기 ▶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배너: 기사가 마음에 드셨나요? 구독료 1,000원도 큰 힘이 됩니다. 자발적 구독료 내기배너: 에이블서포터즈
뒤로화면을 상위로 이동 글자 크게글자 작게이 기사내용을 인쇄합니다.이 기사내용을 이메일보냅니다.기사목록으로 갑니다. 기사오류신고하기트위터미투데이RSS

최신기사목록
인물/단체 > 인물 꿈에서도 그리운 보고 싶은 어머니 이복남 기자 2010-09-09 09:41:21
인물/단체 > 인물 김영주씨, ‘2010 자랑스러운 척수장애인’ 영예 장경민 기자 2010-09-02 17:45:56
인물/단체 > 인물 김형식씨, 한국인 첫 UN 장애인권리위원 피선 연합뉴스 2010-09-02 10:36:03

이 페이지의 내용을 보려면 최신 버전의 Adobe Flash Player가 필요합니다.

Adobe Flash Player 내려받기

조선일보와 한국장애인개발원이 함께하는 장애인 일자리 만들기 캠페인
청소년 만화 공모전 및 백일장
[전체] 가장 많이 본 기사더보기
인기검색어 순위
[인물] 많이 본 기사더보기
댓글이 더 재미있는 기사더보기
주간 베스트 기사댓글
새로 등록된 포스트더보기
배너:장애인신문고
발행/편집인:백종환 등록번호:서울아00032 등록일자:2005.8.30 서울시 용산구 한강로3가40-21 서울빌딩1층 Tel:02-792-7785 Fax:02-792-7786 ablenews@ablenews.co.kr
Copyright by Ablenews.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