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다른 출발

장애인에게 관심이 있는 분들은 신홍윤이란 이름을 기억한다. 요즘 가장 언론 노출이 많은 본인의 표현대로 하면 나대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외모도 수려하고, 표현 능력도 뛰어나며 무엇보다 대중 앞에 서는 것을 좋아한다.

신홍윤은 2남 1녀의 둘째로 태어났다. 자연분만을 하려다가 제왕절개를 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뇌성마비 장애가 생겼다. 그는 장애가 심한 상태이지만 언어장애가 생기지 않고 뇌성마비의 일반적인 특징들이 나타나지 않아서 보행을 하지 않으면 장애가 드러나지 않는다.

어렸을 때는 업혀 다니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수술을 하고 목발을 사용하게 되었다. 실내에서는 목발 없이 천천히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되었다.

그는 일반학교를 다녔다. 통학은 엄마나 아버지와 함께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하교는 친구들과 하는 날이 많아졌다. 그는 아이들에게 먼저 말걸기를 하였고, 그 덕에 금방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고2 때 수술 치료 때문에 6개월 동안 학교에 가지 못하니 공부에 흥미를 잃어 공부를 등한시하자 다섯 살 위인 누나가 대학에 진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따끔한 충고를 해 주었다. 그래서 고3 때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 결과 가톨릭대학교 사회과학부에 입학할 수 있었다.

대학생이 된 신홍윤은 특유의 나대기 성격으로 학생회 활동을 하며 환경운동을 위해 시위에 참여하여 대중연설을 하면서 존재감을 높여 갔다. 그러던 중 삼성전자에서 장애대학 생들을 대상으로 채용을 한다는 공고가 났다.

장애대학생들은 대기업 취업의 문이 너무나 좁았었기에 장애학생지원센터에서 지원을 권하였다. 그는 학점도 좋지 않았고, 업무에 필요한 스펙도 없는 상태라서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합격하여 직장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때가 2011년이었다. 그가 한 일은 모니터 시장점유율 분석이었다. 틀에 박힌 듯한 직장생활은 그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좌-보건복지부 장애 인식개선 강사 위촉, 우-삼성전자 동기들과 ⓒ신홍윤

인생의 시계를 되돌려서 다시 시작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갈지 고민하게 되었다. 만약 인생의 시계를 돌린다면 어느 지점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까를 생각하니 고3이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인턴생활을 끝으로 직장생활을 접었다. 부모님은 미래가 보장된 직장을 그만두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셨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3학년으로 복학을 할 수 있었지만 그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 위해 재수를 택했다. 그리고 남들이 졸업을 할 나이인 25세에 고려대학교 사회학과에 신입생이 되었다.

그때가 2013년이다. 그는 장애인은 먼저 나서지 않으면 뒤로 뒤로 밀려나서 나중에는‘너 거기 있었니?’라고 할 정도로 장애인에게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대는 장애인이 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취업시장에서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다른 잣대로 평가받는다는 것도 알았다. 장애인에게는 성적이나 스펙 같은 능력 평가보다는 얼마큼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경험이 중요했다. 취업시장은 장애인의 실력에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장애인의무고용으로 입사한 장애인 직원이 회사에 잘 적응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새로 시작한 대학생활을 공공의 대표자가 되는 일에 몰두하였다. 고려대 장애인위원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고려대총학생회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아주 특별한 경험

드디어 2015년 총학생회장 선거에 입후보했다. 대한민국 최초로 중증장애학생이 총학생회장이 되어 학내 정치로 대학 분위기를 바꾸고, 나아가 사회정치로 세상을 개혁해 보겠다는 큰 포부를 갖고 있었다. 선거캠프에 1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학내 소수자 그룹이 다 모여서 신홍윤을 당선시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정말 열심히 선거운동을 하였다.

추천인 수도 4천 명이 넘어 총학생회장 선거사상 가장 많은 추천인수를 자랑했다. 여론조사에서도 다른 후보를 압도적으로 앞서고 있었다. 그래서 본인은 물론 캠프에서 신홍윤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다른 후보가 등록금을 깎겠다, 자판기를 곳곳에 설치하겠다 등의 공약을 내었을 때 그는 큰소리로 외쳤다.

“총학생회는 학생들의 민원이나 처리하는 심부름센터가 아닙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왜 취업 시장에서 약자가 되어야 합니까. 우리를 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학생들이 열광했다. 하지만 선거 결과는 참혹했다. 약세였던 그래서 주목 받지 못했던 2위 후보자가 당선이 된 것이다.

신홍윤은 깊은 좌절의 늪에 빠졌다. ‘장애인도 해낼 수 있어.’라고 믿던 신념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아직 사회가 장애인을 리더로 받아 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현실에 절망했다.

그때 마침 미국에서는 대통령 자리를 놓고 힐러리와 트럼프가 대결을 하고 있었는데 힐러리의 대세론을 트럼프가 꺾고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고 미국도 아직 여성을 대통령으로 만들지 못하는 차별의 한계를 통감했다.

방송인으로서

2017년부터 장애인전문채널 KBS3라디오 ‘내일은 푸른하늘’에 고정 연사로 방송을 하기 시작했다. KBS에는 장애인앵커제도가 있어서 그가 새로운 꿈을 꿀 수 있었다.

그래서 방송프로그램 섭외가 들어오면 마다하지 않고 모두 받았다. 유튜브 팟캐스트 진행도 하고, 장애인 인식개선 강사도 하면서 장애인앵커 준비를 했다. 그럼에도 2019년 첫 번째 도전을 했지만 낙방하였다.

2020년 한국어능력시험을 통해 자격증을 취득하고 2021년에 재도전을 했지만 여성 장애인앵커가 탄생하였다. 실패가 없는 삶은 없지만 그래도 실패를 할 때마다 주춤거리게 된다.

신홍윤의 목표는 장애인이 장애인 이야기를 더 이상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장애인문제가 보편적인 일상이 되어 자기도 일상의 이야기를 하는 사회가 될 때까지 사람들 앞에서 공공의 대표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1989년생으로 이제 결혼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때이다. 그가 인터뷰를 하며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바로 이것이다.

“연애, 너무너무 하고 싶죠.”

신홍윤의 자기소개서 가운데 그의 정체성을 알 수 있는 2꼭지를 소개한다.

앞에 나서는 장애인

어린 시절부터 저는 장애인이라 아무것도 하지 못할 사람으로 낙인 찍히는 것을 견디기 어려워했습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 앞에 나서 제가 타인에게 해 줄 수 있는 것도 많은 사람임을 보여 왔습니다. 그런 제 삶의 태도가 많은 곳에서 저를 나서는 사람, 리더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장애인인 동시에 대표자라는 위치가 제 정체성 가장 밑바탕에 자리하게 됐습니다. 비장애인과 함께한 학창 시절을 연이어 반장으로 보냈고, 대학에 와서도 학생대표자 활동을 쭉 이어 왔습니다. 하다못해 조별 과제 때마저 저는 대부분 발표와 조장을 맡아 왔습니다.

대표자뿐만 아니라, 연극배우로 사람들 앞에 서 본다거나 시각장애인을 위한 애니메이션 성우 일을 해 보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 왔습니다.

그러한 철학의 연장으로 현재 다양한 매체를 통해 방송활동을 해 오고 있습니다. 저는 삶의 많은 시간을 공공의 대표자로 보냈습니다.

신홍윤=소통입니다

몸이 많이 불편하기 때문에, 저는 타인과 소통해내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습니다. 부축 등 일상에서 타인을 필요로 하는 순간은 분단위로 찾아왔고, 제 몸에 대해 양해를 구하는 일도 매일같이 이어졌습니다.

지난한 과정이었지만 덕분에 저는 타인과 보다 잘 연결될 방법 들을 터득할 수 있었습니다. 자존심이나 체면을 내려놓고 솔직하게 제가 필요한 부분들을 상대에게 이야기했고, 상대방도 그런 저를 도우며 자신의 힘든 점을 편하게 제게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을 필요로 하는 제 몸이 솔직한 소통의 연결 다리가 되어 주었습니다. 제가 도움을 받는 만큼 상대방의 고민과 어려움들을 듣게 됐고, 제가 도움을 받았듯 그들의 고민을 함께 해결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이렇게 관계를 진솔하게 쌓아가니 소통은 제가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저의 재능이 됐습니다.

저는 사적으로 지인들과 나누는 대화를 넘어 이제 소통을 저의 일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제가 제작 중인 보건복지부의 유튜브 ‘당장만나’에서 저는 매회 다양한 사회 명사들을 만나 솔직하고 의미 있는 대화들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대학교수부터 연예인, 청소년, 자폐성장애인, 조현병 당사자 등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게 되며, 그들과 어떤 방식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시간들은 그간 제가 쌓아 왔던 소통의 경험들과는 또 다른 맥락이었습니다.

3시간 남짓의 긴 녹화시간을 의미 있게 채우기 위해 저는 그들 각각의 생애과정을 들여다 보았고, 이런 노력들이 사람에 대한 이해라는 소통의 가장 중요한 덕목을 일신시키는 기회가 되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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