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최지현. ⓒ최지현

하고 싶었던 일을 다 해 봐서 여한은 없다

어린 시절부터 26세까지 그녀는 정말 많은 경험을 했다. 수영도 해 보고 말도 타 보고, 미인 대회에도 출전해 보고(2000년 전북의 미인대회 ‘사선녀선발대회’에 나가 진(眞)으로 선발), 방송 리포터로 카메라 앞에서 보기도 하고, 클럽 DJ로 입담과 댄스 실력을 유감 없이 보여 주었다.

그렇게 활발히 활동하며 주위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던 그녀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녀를 멈추게 한 것은 2004년 11월 어느 날 어이 없이 발생한 사고 때문이었다.

선배 부부네 집들이가 있어서 즐거운 마음으로 선배 부부가 사는 아파트 7층 현관 앞에 도착했다. 아파트가 복도식이었다. 복도 난간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친구들에게 소리쳤다. “너희 언제 올라올 거야?” 순간 몸이 휘청했다. 굽이 10cm나 되는 하이힐을 신고 있던 탓에 중심을 잃고 그대로 아래로 추락했다.

작업 중. ⓒ최지현

추락 시간은 불과 60초도 안 되었을 텐데 26년 동안의 주요 장면이 편집되어 눈앞에서 영화처럼 돌아 갔다. 바닥으로 떨어진 순간 정신을 잃었고 며칠 후에야 병원 중환자실에서 눈을 떴다.

팔과 다리는 깁스로 칭칭 감겨 있었다. ‘아 참다쳤지. 뭐 깁스만 풀면….’ 속으로 이렇게 자기 상태를 진단했지만 다시는 걸을 수 없다는 얘길 들어야 했다. 척수마비에 대해 아무런 지식이 없던 그녀는 그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최지현은 경추 손상으로 인한 사지마비 이른바 전신마비였던 것이다. 당황한 친구들이 쓰러진 그녀를 큰길로 옮기면서 부러진 뼛조각이 튕겨나가 5, 6번 척수신경을 건드려서 장애가 더 심해졌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혼자서는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는 갓난아기가 되었지만 머리는 26세의 여자였기에 사지마비는 마음을 병들게 했다. 심한 우울증이 그녀를 잠식시켜 가고 있었다.

그러다 2010년 잠실 장애인창작스튜디오를 방문한 것이 미술이란 탈출구를 발견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대학에서 한국무용을 전공했고 음악이나 방송 분야에서는 잠시나마 일을 해 본 경험이 있었지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었다.

최지현은 미술에 대한 열망으로 서울 사당동에서 경기도 안양에 있는 장애인화실 소울음아트센터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가서 회화에 대한 기초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비장애인들은 마음만 먹으면 미술학원, 화실, 문화원 등 다양한 선택권이 있지만 장애인에게는 그런 선택지가 없어서 아무리 멀어도 배우려면 그곳까지 가야 했다.

그녀는 장애인화가들의 전시회나 장애인예술 행사 등에 참여하며 장애인미술 커뮤니티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면서 치료와 취미가 아닌 진짜 화가가 되기 위해 본격적인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2013년 홍익대학교 미술디자인교육원에서 2년 동안 동양화 채색화를 배우며 한국화에 매료됐고, 이론 공부를 하기 위해 2014년 서울디지털대학교 회화과에 입학하여 사회복지와 복수 전공으로 공부했다.

그러면서 2015년도에는 중앙대학교 문화예술교육사과정에서 미술 전공을 하여 문화예술교육사 자격증을 땄다. 공부를 하는 동안에는 주중은 물론 주말에 실기 수업까지 수강해야 해서 다른 외부 활동을 전혀 할 수 없었다.

화가 최지현

서울시 관악구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그녀는 그림을 그린다. 경추신경 손상으로 사지마비가 되면서 손을 사용하지 못하지만 어깨 힘을 이용해 팔을 들어올릴 수는 있다. 그래서 그녀는 붓에 나무막대 네댓 개를 이어붙인 후 손목에 밴드로 고정을 시켜 그림을 그린다.

휠체어에 이젤이 걸리기 때문에 그녀는 몸을 옆으로 튼 자세로 작업을 해야 하는데다 여러 번에 걸쳐 색을 쌓아 입히는 채색화 특성상 얇은 붓으로 그림을 그려야 하는 세밀한 일이기 때문에 작업을 마치고 나면 몸의 여기저기가 쑤시는 근육통에 시달리고 있다.

손에 힘이 없어서 붓을 떨어뜨리거나 먹물을 쏟는 일이 다반사이다. 손에 감각도 없다 보니 직선 하나를 긋기 위해서는 연필로 50번을 그렸다 지웠다 반복해야 한다. 그래서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 10개월이 걸릴 때도 있을 만큼 작업이 쉽지 않다.

그녀는 먹과 한지를 이용한 동양화 채색화를 전문적으로 그리고 있다. 분채(粉彩)를 아교(阿膠)에 개어 한지에 작업하는 한국화도 그녀의 주특기이다.

그녀는 고양이를 그린 작품이 많다. 그녀가 키우는 페르시안 고양이가 모델이다. 고양이 이름은 야동(이끌 야(惹), 움직일 동(動))으로 움직임을 이끈다는 뜻이다.

고양이는 그녀의 페르소나(Persona,작가의 분신)다. 그녀가 그린 고양이는 모두 파란색이라는 특징이 있다. 2009년 개봉한 영화 <아바타>에서 영감을 받았다. 영화 속에서 장애를 가진 주인공은 아바타를 통해 자유를 얻게 된다. 그녀 역시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를 통해 자신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작품에는 고양이 외에도 손과 발, 핑크색 리본 등이 자주 등장한다. 손과 발은 자유롭지 못한 화가 본인을 나타낸다. 핑크색 리본은 유방암 수술 후부터 그리기 시작했다. 핑크색 리본은 유방암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녀 작품의 최근 주제는 연꽃이다. 삶을 포기할까 고민하던 순간 ‘진흙에서 피어난 연꽃’ 이라는 글귀가 마음에 와닿았다.

힘든 상황에서도 꽃을 피워내는 연꽃처럼 살기로 결심하였기 때문이다. 수묵담채, 전통채색, 디지털콜라주로 연꽃에 다양하게 표현되는 한국화의 매력을 담았다. 재미없고 진부한 한국화가 아니라, 새롭고 신비로운 한국화로 변신시키고 싶어서이다.

암과 투병하며 대학원 도전

2016년 겨울 가슴에 큰 몽우리가 잡혔다. 직감적으로 유방암이란 것을 알았다. 인터넷에서 유방암 증상을 찾아보니 딱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죽을 수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 사실을 알아챈 남편이 눈물로 호소하는 바람에 2017년 8월 유방암 수술을 받고 붓을 내려놓아야 했다.

“곰곰이 죽고 싶단 생각은 사실 간절하게 살고 싶단 말과 같더라구요. 진통에서 벗어나자 바로 ‘뭘 그려 볼까?’라며 새로운 욕구가 생겼어요.” 몸을 추스른 후 2018년 홍익대 미술대학원 석사과정동양화 전공)에 입학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편하게 살라고 충고해 주지만 숨만 쉬고 산다면 그것은 죽은 것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살아 있는 한 계속 도전하는 삶을 살고 있다.

김병진 작가님과. ⓒ최지현

사랑과 결혼

최지현은 2007년 3월 24일에 국립재활원 강당에서 이범석 부장(현재는 원장)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올해로 결혼 12주년이 되지만 아직도 신혼처럼 살고 있다.

남편을 만난 것은 재활병원에서였다. 남편 조남현은 그녀보다 3세 위인 작업치료사였는데 그녀 담당도 아니었지만 그녀 병실에 찾아와서 상태를 살펴보며 밥을 잘 안 먹으면 죽을 사다 주고, 딸기도 사다 주는 등 최지현을 챙겨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먹을 것을 잘 사다 주는 친절한 치료사라고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어느 날 입원 동료가 귀띔해 주었다.

“조 선생이 너 남친 있냐고 물어보길래, 다치고 나서 헤어졌다고 했다. 너한테 관심이 많던데.”

지현은 그 말에 쓸데없는 소리한다고 핀잔을 줬지만 조 선생의 관심에 신경이 쓰였다. 그러다 서로 호감을 갖는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 그가 성급하지 않게 다가가겠다는 고백을 했다.

얼마 후 조 선생 어머니께서 병원에 찾아오셨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얘기 많이 들었다며 지현의 손을 잡고 ‘내 며느리가 될 것 같네.’라고 말씀하셨다. 얼마 후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도 병원에 찾아오셨다.

“나는 순서가 바뀌었다고 생각할 뿐이다. 며느리가 된 후 다친 것과 다친 후 며느리가 된 것과 무엇이 다르겠니.” 이미 남편이 부모님을 설득하여 허락을 받아 놓았던 것이다.

오히려 지현 어머니께서 반대하셨다. 살다 보면 어려운 일이 많이 생기는데 마음이 변해 헤어지면 딸이 받게 될 상처가 더클 것이라는 염려에서였다.

“남편과 함께 다니면 주변에서 ‘남편이 천사야’, ‘아내 돌보느라 힘들지’, ‘신랑이 착하네’ 등의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단지 몸이 조금 불편하고 장소적인 제약이 따를 뿐이지 다른 부부와 같은데 제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평범하게 바라보지 않았죠. 그들의 말 속엔 늘 가시가 있어 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툭툭 던질 때마다 저뿐만 아니라 남편까지 깊은 상처를 받기 때문에 더 속상해요.”

그녀는 결혼하면서 자녀를 갖지 않기로 남편과 합의를 보았다. 서로에게 충실하기 위해서였다.

작품 <우정>. ⓒ최지현

앞으로 목표

복수 전공으로 사회복지학을 배우며 사회복지에도 관심이 생겨서 지역아동센터에서 어린이들을 위해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최지현 작가는 흔히 접할 수 없는 먹과 동양채색 등으로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미술 수업을 진행하기 때문에 어린이들이 무척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전공을 살려 보다 많은 사람을 돕고 싶어졌다. 미술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자신처럼 누구나 미술을 즐길 수 있게 하고 싶다는 꿈이 생긴 것이다.

여행스케치를 갔다가 욕창이 생겨 1년 동안 침대에서 지낸 적도 있고, 첫 개인전시회 준비를 하느라고 병이 나서 막상 전시회 내내 병원에 입원해 있느라고 주인공 없는 개인전시회였지만 600여 명의 관람객이 다녀갈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녀는 면역성이 떨어져 폐에 물이 차서 고열로 혼수상태에 빠지는 등 늘 건강의 위협을 받지만 자신의 작품을 인정해 주고 아껴 주는 사람들이 있어 자리를 털고 다시 캔버스 앞에 앉는다.

몇 시간을 달려온 건물에 주차할 곳이 없어서 돌아가야 하나 망설여야 하고, 휠체어가 들어가는 책상이 없어서 공부를 할 수가 없어 책상 구하러 다니느라고 남편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실습을 받아 주는 사회복지 기관이 없어서 여기저기에 사정을 해야 하고… 이렇듯 최지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하루도 싸우지 않는 날이 없다고 할 정도로 지금도 아슬 아슬하게 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그녀는 자신의 목표를 향해 숨차게 달려갈 것이다.

“스트레칭할 시간이예요.” 그림 작업을 하면 10시간씩 같은 자세로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남편이 인공지능 스피커에게 1시간에 한 번씩 목소리 알람을 해 주도록 설치해 놓았다. 이런 알뜰한 외조로 최지현은 장애와 투병이라는 무거운 운명과 맞서 화가로 발전하고 있다.

작품 <교감>. ⓒ최지현

최지현

# 학력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동양화 전공 석사과정/서울디지털대학교 회화과 졸업(사회복지학 복수 전공) 백제예술대학 전통공연예술과 전통무용 전공 졸업

# 자격증

국가공인/초ㆍ중등 음악실기교사 교원자격증, GTQ 그래픽기술자격 2급, 문화예술교육사(미술) 2급, 사회복지사 2급 민간/미술심리상담사 2급, 창의미술지도사, 창의미술심리지도사

# 주요 활동

2010, 11, 12, 15 한중일 국제누드드로잉 아트페어/2010, 12, 13, 14, 15, 17 선사랑드로잉회 회원전 2010 상록수 기획전‘ 세상을 향해 외치다’회원전/2010?꿈을 나누는 그림학교‘ 그림드림’ 작품발표회 2011 장애인미술가의 한마당‘ 희망축제’ 작품공모전 2013, 14, 15, 16, 17, 18 (사)수레바퀴선교회‘ 그림사랑’ 회원전/2014, 15, 16, 17, 18 (사)소울음‘ 일어서는 사람들의 기록전’ 2015 (사)로이사랑선교회 희망방송‘ 희망아트’ 창립전/2015 (사)한국장애인미술협회 서울지부‘ 행복한 동행전’ 2015 SDU 회화과 동아리‘ 오네트’ 미니기획전/2015 제7회 장애인문화예술축제‘ 장애인미술가의 「꿈」 이곳에서 펼쳐라’ 전시 2015 제7회 장애인문화예술축제 서양화 작품시연/2015, 16, 17 신촌세브란스 재활병원 재활병동 복도 전시 2016 신촌세브란스 암병동 제중관 브릿지 단체전/2016 제8회 장애인문화예술축제 리날레‘ 장애인미술가의‘ 꿈’ 날개를 달다’ 전시 2016 제8회 장애인문화예술축제 동양화 작품시연 및 체험부스/2016 에이치플러스양지병원 사진&그림‘ 아름다운 동행’ 2인전 2017 삼성서울병원 본관 1층 복도갤러리 곰두리 회원전/2017 제4회 장애인창작아트페어 한국화 아카이브 부스전 2017 제9회 장애인문화예술축제 偕x樂x響=「아트, 이음」 전시/2018 SDU 회화과 제7회 졸업전 2018 한일장애인과비장애인문화예술교류 다므기전/2018 동작구 예향회 창립전 2018 제10회 장애인문화예술축제“ Welcome to ART” 전시/2018 제10회 장애인문화예술축제 동양화 작품시연 및 체험부스

# 주요 경력

2014 (사)한국장애인미술협회‘ 희망키움’ 장애인미술경진대회 수채화 장려상 2015 제30회 (사)한국장애인미술협회‘ 희망키움’ 장애인미술경진대회 한국화 최우수상 2015 (사)장애인단체총연합회‘ JW어워드’ 입선 2015 제25회 (사)한국장애인미술협회‘ 대한민국장애인미술대전’ 한국화 입선 2016 제31회 (사)한국장애인미술협회‘ 희망키움’ 장애인미술경진대회 서양화 특선 2016 제6회 동작현충미술대전 일반부 공모전 수채화 입선 2016 제29회 (사)지체장애인협회‘ 전국장애인종합예술제’ 동양화 최우수상 2016 제1회 (사)한국장애인미술협회‘ 국제장애인미술대전’ 한국화 특선 2016 제26회 (사)한국장애인미술협회‘ 대한민국장애인미술대전’ 한국화 우수상 2017 제7회 동작현충미술대전 일반부 공모전 한국화 입선 2017 제27회 (사)한국장애인미술협회‘ 대한민국장애인미술대전’ 한국화 입선 2017 제6회 (사)꿈틔움 공모전‘ 꿈을 날다’ 서양화 특선/일러스트 입선 2017 제4회 (사)꿈틔움 JW아트어워즈‘ 꿈을 그리다’ 한국화 입선 2018 제7회 (사)꿈틔움 공모전‘ 꿈을 날다’ 일러스트 특선 2018 제31회 (사)지체장애인협회‘ 전국장애인종합예술제’ 일러스트 가작 <개인전> 2018 제1회 최지현 동양화‘ 형이상에 대한 고찰’ 展 인사동 경인미술관 제5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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