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장애인부모회 정기영 회장. ⓒ한국장애인부모회

8년 동안 시의원으로 정치를 했지만 아직도 임대아파트에 살며 지하철로 출퇴근을 하는 단체장은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에서는 낯설다.

단체장이 되면 의원급으로 대접받으며 모든 것이 의전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단체장들과는 사뭇 다르다.

장애인리더로 주목받는 정기영 한국장애인부모회장은 1968년생으로 단체장 가운데에서는 아주 젊은 편이다. 그리고 문화예술로 풍부한 감성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두 번씩 선거를 치러봐서 이기는 방법을 알고 있다. 게다가 표를 주는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으니 이보다 더 경쟁력 있는 리더가 또 있을까?

Q: 장애인부모회 회장이 휠체어를 사용하시는 분이라는 것이 아이러니컬했다.

재혼 가정이다. 아내에게 지적장애 딸이 있다. 나도 아내도 재혼인데 나한테는 자녀가 없었고, 아내는 딸 둘이 있었다. 결혼 후 딸 하나를 더 얻어 딸딸딸 아빠가 되었다.

나는 성남시장애인연합회 사무국장이었고, 아내는 성남시장애인부모회 총무였다. 그래서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장애인 부모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싱글맘이라고 하였다.

나도 그 당시 돌싱이어서 서로 처지가 비슷하였지만 호감 정도였지 결혼까지는 생각도 못했다. 용기를 낸 것은 아내였다. 우리는 2004년 10월 30일 결혼식을 올렸다.

장애인복지계에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의 일에 이해를 잘 한다는 점이 좋다.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같이 걱정하며 함께 해결해 나가고 있는 것도 큰 장점이다.

Q: 장애 자녀에 대한 양육 방식은.

나는 좋은 아빠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딸이 원하는 것을 무조건 해 주는 편이었다. 그런데 식욕을 억제해 주지 않으면 건강을 해칠 것 같아서 서로 역할을 바꿔 아내가 좋은 엄마가 되기로 하고 나는 딸의 다이어트를 강제로 실시하였다. 그 과정에서 아내와 다투기도 하였다. 아내는 딸을 무조건 보호하려는 모성본능이 강하다.

Q: 어떤 라이프 스토리를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내 성은 원래 김씨이다. 내가 소아마비에 걸리자 아빠는 나를 버리고 싶어서 엄마까지 내쫓았다. 의사가 엄마는 더 이상 아기를 낳을 수 없다고 했다며 장애아들이 대를 이을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내가 소아마비에 걸린 것도 홍역주사를 잘못 맞았기 때문이고 보면 나는 의료사고로 장애를 갖게 된 것이다. 엄마는 장애아를 데리고 재혼을 했다.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이 남자한테 의존하는 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결혼 후 두 명의 아이를 낳았다. 나는 가정에서 자연히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새아빠한테 많이 맞으면서 성장했다.

한국장애인부모회 사무실에서. ⓒ한국장애인부모회

Q: 일반학교를 쭉 다니셨는데 학교생활을 하며 장애 때문에 겪었던 차별이 있는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네 발로 기어다녔다. 학교에 가느라고 목발을 사 주셨는데 아이들이 병신이라고 놀리면 목발로 패서 반쯤 죽여 놓았다. 손힘이 세서 내손에 잡히면 꼼짝 못했다. 도망가는 아이들은 어쩌지 못했지만…….

Q: 학창시절에 예술활동을 했다고 들었다.

교회 성가대에서 활동하면서 마음을 잡을 수 있었다. 중학교 때는 밴드부 활동을 했고, 고등학교 때는 합창단에 들어갔다. 밴드부에서 트럼본을 연주하였다.

브라스밴드대회를 앞두고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연습에 한 명이라도 빠지면 운동장을 몇 바퀴 달리는 벌을 주셨는데 당시 음악 선생님인 남기중 선생님은 내가 달릴 수 없는 것을 아시고 다같이 기어서 한 바퀴를 도는 벌을 주셨다.

나를 열외로 만들지 않고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셨던 것이다. 그때 운동장을 기며 너무 가슴이 뿌듯했다.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기뻐서. 학창 시절의 목표는 목사가 되는 것이었다.

목사님은 용서하는 것을 가르치는 분이란 생각이 들어서 멋있어 보였다. 그래서 신학대학교에 합격을 했는데 대학을 갈 형편이 아니었다. 부모님은 목사가 되려고 대학에 간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Q: 사회생활은.

그래서 포기하고 경기도 광주에 있는 악세서리 공장에 취업을 했다. 그곳에서 먹고 자며 일을 했다. 하루 종일 납땜을 하는 일을 하다 보니 건강에 문제가 생겨 제화공장에서 제화기술을 배우며 본드 붙이는 잡일을 했는데 그것도 역시 폐를 병들게 했다.

그래서 전산사식으로 업종을 바꾸었다. 고3 담임인 한춘섭 선생님은 시인이었는데 한산문학회 활동을 적극 지원해 주셨다. 나는 한산문학회 회장으로 문학에도 심취해 있었다.

책을 좋아 하다 보니 인쇄업의 기술인 전산사식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우선 타이핑부터 익혀야 했다. 당시는 인쇄업이 잘될 때라서 회사에서 밤을 새워 작업을 하였다. 고단한 삶이었지만 그즈음 장애인운동에 눈을 떴다.

장애청년모임인 울림터에서 활동하며 수화를 배웠다. 장애인복지를 하려면 자기 장애뿐만이 아니라 다른 장애 유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곳에서 농아인협회 간사로 근무하던 여자와 사랑에 빠져 28살에 결혼을 하였다. 결혼 후 가정을 위해 더 열심히 일했지만 회사에서 일의 속도가 느리다고 권고사직을 당했다. 취업을 할 수 없어서 창업을 했다.

‘좋은기획’이라는 상호를 달고 내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인쇄업체는 어음으로 결제를 하였는데 IMF로 어음이 부도가 나서 5천만 원이라는 큰 빚을 지게 되었다.

아내에게 빚을 지울 수 없어서 이혼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을 다 잃었던 암울한 시절이었다.

(사진 좌)시의원 의정보고회, (사진 우) 성남시의회예산결산위원장 시절. ⓒ한국장애인부모회

Q: 5대와 6대 성남시 시의원을 하였는데 정치에 대한 꿈을 갖고 있었는가.

장애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성남시장애인연합회 간사였다.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무국장이 되었다. 성남시 장애인복지를 위해 정치인들을 만나면서 정치를 하면 장애인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도전을 하고 싶었다.

그때가 2006년 6·4지방선거 때였는데 5월 12일 출마를 결심했으니까 정말 무모한 도전이었다. 당시 성남에 영구임대아파트 2개 단지가 있었다. 그 표가 나한테 온다면 승산이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하지만 다들 안 된다고 하였다.

나는 당시 기초수급자였고, 장애인단체장도 아닌 사무국장에 불과한 경력으로 시의원이 될 수 없다고 말렸다. 아내에게 의논을 하자 아내는 하루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아내는 다음날 500만원을 내주며 내 뜻대로 해 보라고 하였다. 그때부터 전단지와 명함을 만들어 선거운동을 시작하였다.

나는 열린우리당으로 출마하여 선거를 치렀다. 개표방송 내내 4위였다. 나 자신도 ‘다음에, 다음에…’를 되뇌이며 실패를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새벽 3시에 뒤집혔다.

6대는 5대의 시정 활동이 인정을 받아 어렵지 않게 당선이 되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7대도 따놓은 당상이라고 하였지만 공천을 받지 못하였다.

아내가 성남시부모회 회장직을 맡고 있었는데 이재명 시장이 아내에게 욕설을 퍼부었다는 얘기를 듣고 이재명 시장과 맞서게 되었다. 장애인 부모가 무슨 죄가 있다고 욕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Q: 시의원을 하면서 어떤 성과를 냈는가.

시의원이 되자마자 전국의 장애인조례를 조사하여 성남시에 없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낸 후 한 가지씩 성남시 조례로 제정해 나갔다. 조례안을 통과시키기 위하여 한나라당과 협치를 하였다.

한국장애인인권포럼에서 매년 지방의회 활동을 조사해서 평가를 하고 있는데 나는 6년 연속 최우수의원으로 선정이 되었다. 장애인계에서 인정을 받은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8년 동안 시의원으로 활동하며 보건복지위원회는 물론이고 예산결산위원회 간사부터 위원장까지 맡아 성남시 장애인복지 예산을 마련하는 역할을 하였다.

Q: 사이버대학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하셨던데.

나중에 하려던 대학 공부를 살기 바빠서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사이버대학이 있는 것을 알고 뒤늦게 시작하여 2005년도에 졸업하였다. 사이버대학이 있어서 통학의 어려움이 있는 장애인들이 대학교육을 받기 쉬워졌다.

좌-전국시도별 장애인복지교육비교조사 결과발표 기자회견 / 우-장애인정보이용 차별철폐 성명발표 기자회견. ⓒ한국장애인부모회

Q: 장애인부모회에서 어떤 역할을.

장애인부모회 경기도지회장이 될 때 지체장애인협회에서도 지회장 제안이 왔었다. 사람들은 지체장애인협회가 더 장점이 많다고 조언해 주었지만 나는 장애인부모회를 택했다.

그 이유는 장애인 당사자로서 장애인 부모를 대변해 주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부모회가 당사자 단체가 아니라고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 회원이 4만명이고 4인 가정이라고 했을 때 16만 명이 우리 협회에 의해 움직인다고 생각하면 결코 작은 집단이 아니다.

우리는 꾸준히 정책 제안을 해 나갈 방침이다. 집회 방식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타협 하며 한 가지씩 이루어 낼 것이다.

지금 가장 시급한 문제는 통합교육을 주장하다 보니 특수학교가 신설되지 않아서 특수학교에 가야 할 아이들이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시대에 따른 대세가 있지만 통합교육이 옳고 특수교육은 필요없다는 논리는 매우 위험하다. 각각의 영역이 함께 발전하여야 한다.

Q: 정치를 했었기 때문에 뭔가 큰일을 할 것이란 기대를 하게 되는데 개인적인 목표는.

정치는 잘 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지만 잘못하면 큰 피해를 주기 때문에 보다 큰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자기 검증이 필요하다고 본다.

나는 8년 동안 시의원을 했어도 아직도 성남에 있는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고 출퇴근을 지하철로 하고 있다. 정치로 내 개인적인 이익을 취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지금 한국장애인부모회 회장으로서 장애인 부모들의 소망인 우리 아이 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일에 최선을 다 할 것이다.

당장 우리 가정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막내딸이 걱정이다. 14살인데 아빠도 장애인이고 언니도 장애인인 가정에서 자신의 역할은 두 사람을 도와주며 착한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을 갖고 있다. 요즘 코를 킁킁거리는 틱이 생겼다.

틱은 스트레스로 인해 일시적으로 생기지만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고착화될 수 있어서 막내딸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지적장애를 가진 둘째 딸이 28살이다. 둘째 딸을 비롯해서 대한민국의 모든 장애 자녀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물려줄 것이 없이 가난한 아빠가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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