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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 보는 장애인사 ‘서당 이덕수’

청각장애인으로 필담 정치…영조의 총애 받아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17-12-18 10:00:46
필담으로 정치한 이덕수 ⓒ한국장애예술인협회 에이블포토로 보기 필담으로 정치한 이덕수 ⓒ한국장애예술인협회
서당(西堂) 이덕수(李德壽: 1673~1744)는 조선 후기 영조대의 대표적인 문신으로 저서로 『서당집』, 『서당사재』 등을 남겼다. 이덕수는 조상의 덕으로 직장(直長)을 지내다가 숙종 39년 (171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문의현감으로 임명되었다.(한국문화민족대백과사전』이덕수 편.)

이후 홍문관과 예문관의 관직에 여러 차례 제수되었으며 대사성, 대제학, 대사 헌, 이조참판, 공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역임함과 동시에 개성 유수를 지내기도 했다. 이덕수는 8세에 여러 번 병을 앓아 귀가 잘 안 들리게 되었는데, 귀앓이는 그를 평생 동안 괴롭혔고, 1738년에 이르러서 그 증세는 대화가 어려울 정도로 심각해졌다.(강성숙(2007), 「기억을 통해 드러나는 18세기 사대부의 여성상-서당 이덕수의 어머니, 아내, 딸을 중심으로」, 『겨레어문학』 제38 집, 겨레어문학회, 83면.)

사는 동안 병세의 강약은 각기 달랐지만 이덕수는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청각장애인으로 살아야 했다. 그러나 듣지도 못하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이덕수의 관직 생활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이덕수를 향한 영조의 깊은 신임 덕분이기도 했다. 물론 상대방과의 의사소통이 쉽지 않아 이덕수는 심적 으로 많이 힘들어했던 듯하다. 다음의 자료는 이덕수가 청각장애를 이유로 들어 영조에게 사직을 청한 내용이다.

도승지 이덕수(李德壽)가 상소하여 중청(中聽) 때문에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직무(職務)에 나아갔다. 이덕수가 소리를 듣지 못해 연석에 오를 적마다 번번이 곁의 사람으로 하여금 높은 소리로 크게 부르짖어 대신 상교를 전해 주게 하니, 사람들이 대부분 목소(目笑) 하였다. (『영조실록』 38권, 영조 10년(1734) 7월 21일조.)

듣고 말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이덕수는 매번 임금과 다른 신료들을 대면하는 자리에서 옆사람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이것은 이덕수 자신에게 적잖이 스트레스를 주었고, 장애를 이유로 하여 왕에게 사직을 청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영조이덕수의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에 이를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여러 가지 편의를 봐주며 그가 관직 생활을 이어 나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러나 일부 신료들은 그런 이덕수를 조금은 질투했었던 듯하다. 이덕수가 1735년 동지정 사로 청나라에 가게 되자 그의 청각장애를 이유로 들어 여러 신료들이 반대를 했기 때문이다. 다음은 이와 관련된 자료 중 하나이다.

또 아뢰기를, “동지정사(冬至正使) 이덕수(李德壽)는 문학과 지조에 있어서 비록 당세에 제일가지만, 다른 나라에 가서 전대하는 일은 아마도 그 적임이 아닐 듯합니다. 만약 뜻밖에 수작할 일이 있을 경우 이는 진실로 염려스러 우니, 마땅히 체개(遞改) 해야 합니다.” 하였다. 이것은 이덕수의 귀가 어둡기 때문이었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한어(漢語)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모두 귀머거리인데, 어찌 이를 병폐로 여길 것이 있겠는가마는, 이미 대관의 말이 나왔으므로 반드시 가지 않으려고 할 것이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영조실록』 47권, 영조 14년(1738) 10월 15일조.)

왕을 대신하여 청나라에 파견되는 관료가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영조의 생각은 달랐다. 중국어가 외국어인 만큼 말을 할 수 있는 자이든 아니든 간에 모두 똑같은 조건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영조의 배려 덕분에 이덕수는 무사히 청나라에서 자신의 소임을 다 하고 돌아올 수 있었다. 이덕수를 향한 영조의 마음씀씀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영조는 들을 수 없는 이덕수가 자신의 말을 제대로 전달받을 수 있도록 사관에게 글을 써서 직접 그에게 가져다 주는 등의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이는 다음의 자료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우참찬 이덕수(李德壽)도 함께 입시할 것을 명했는데, 이덕수는 늙어서도 책을 좋아하여 다방면으로 박식하였으므로, 임금이 매우 귀하게 여겼다. 《주자어류》의 글을 진강(進講) 했는데, 어려운 것을 묻는 것이 있으면 이덕수가 대답하는 것이 매우 상세하였다.(중략)

이덕수는 본디 소리를 듣지 못해 여러 신하들이 강독하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책만 어루만지면서 부앙(俯仰) 하며 좌우를 보면서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그의 형모가 시세에 맞지 않았으나, 말은 질박하였다. 임금이 하순할 것이 있으면 번번이 사관에게 써서 보이게 하는 등 권대(眷待)가 자못 두터웠으나, 이덕수가 성현의 뜻으로 임금의 마음을 계옥(啓沃) 하지 못한 채 불로(佛老)를 이야기하는 곳에 이르러 서는 싫어하지 않고 친절히 설명하였으므로, 식자들이 이를 단점으로 여겼다.(『영조실록』 52권, 영조 16년(1740) 11월 21일조.)

영조는 학문에 조예가 깊었던 이덕수를 특별히 아꼈다. 그런 이유로 영조이덕수가 자신과의 의사소통에서 어려움이 없도록 의례적으로 글로써 임금과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다.

영조이덕수의 사직 요청만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 이덕수가 하는 말에 대부분 귀를 기울이며 그의 주장에 따르려 했다. 또한 이덕수는 자신이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지 숙종 때 문인이었던 졸수재(拙修齋) 조성기(趙聖期)에게 벼슬을 추증하는 일을 건의한 적이 있었다.

조성기는 척추장애인으로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불편한 몸으로 인해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평생 동안 학문에만 몰두한 인물이었다. 다음의 자료는 이덕수조성기의 벼슬 추증을 건의한 내용이다.

부제학(副提學) 이덕수(李德壽) 가 상소하여 근세의 처사 조성기(趙聖期)를 포양할 것을 청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저 학문을 논한다면 오직 이치를 궁구(窮究)하는 것과 몸가짐을 경근(敬謹) 하는 것 두 가지뿐입니다. 이제 조성기의 학문이 만약 몸가짐을 경근하는 것으로 논한다면 신이 그 어떠한가를 알지 못하지마는, 만약 이치를 궁구한 것을 말한다면 그 이룩된 경지가 또한 뛰어납니다. 그 높고 밝은 경지에 마음을 두고 풍경과 화초에 흥취를 붙이는 것은 소옹과 비슷하고, 고금의 사적을 관철하여 치란의 이치를 궁구한 것은 여조겸에 근사하며, 고담준론이 강하의 물결같이 용솟음치는 것은 진양과 같고, 근본에 돌아가서 만 가지 이치를 종합하는 것은 반드시 고정을 본받았으니, 우리나라 3백년 이래 석학 거유를 손꼽아 보더라도 아마 견줄 자가 없을 것입니다. 고(故) 참판 임영(林泳)과 고(故) 판서 김창협(金昌協) 등 여러 사람들이 함께 사귀어 의심된 것을 물어보고 매양 망양(望洋)의 한탄을 하였습니다. 만약 조성기가 중조(中朝)에 태어났다면 조가(朝家)에서 포장하여 등용하고 유림에서 우러러 사모하여 명성이 한 세대에 빛났을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옛 도를 좋아하고 인재를 사랑하는 기풍이 전혀 없었으므로, 비록 조성기와 같은 뛰어나고 기이한 인물에 게도 그 생전에 징소(徵召)가 미치지 못하고 사후에도 포장이 없었으니, 어찌 차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특별히 증직을 내리라고 명하였다.(『영조실록』 26권, 영조 6년(1730) 5월 28일조.)

영조이덕수의 말에 따라 조성기에게 벼슬을 내렸다. 이에 조성기는 자신이 죽은 지 약 40년 후에 청각장애인 관료 이덕수에 의해 역사 속에 자신의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영조가 이처럼 이덕수를 아낀 이유는 출중한 문장력과 높은 식견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성품이 부지런하고 온화하여 당쟁에 휘말리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덕수는 이밖에도 금석문에 능하고 사적을 기술하는 데 뛰어나 당시 그의 집은 묘도문을 부탁하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강성숙(2007), 앞의 논문, 82면.)

어려서부터 듣지 못해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던 이덕수는 정계에서 자신의 세를 넓히지는 못했지만 이덕수는 동지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것은 물론 영조의 총애를 받으며 오랫동안 관직 생활을 해 나갔던 인물이었다.

요즘 사람들은 장애를 가진 사람은 고위직 관리가 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조선 시대에 수많은 관료들은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능력껏 스스로의 관직 생활을 이어 나갔고, 이는 이덕수도 마찬가지였다.

청각장애인이었던 이덕수가 오랜 시간 장애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영조라는 조력자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덕수영조의 관계를 통해 장애를 가진 사람의 의지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 특히 정부 수반이 그들에게 어떤 배려와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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