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먼저실천운동본부가 전국의 초등학생 및 중학생을 대상으로 장애인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매년 전국 초·중학생 백일장을 개최하고 있다.

올해로 15회째를 맞은 이번 백일장에서는 대상(교육부장관상) 6명, 최우수상 69명(시·도지사상 18명, 교육감상 34명 시·도의회의장상 17명), 우수상 30명, 장려상 60명, 가작 1817명이 영예를 안았다.

이에 본지는 중학생 방송소감문 35편, 산문 32편, 초등학생 산문 25편, 시 24편, 독후감 22편, 방송소감문 27편 등 6개 부문 총 165편의 작품을 소개한다. 세 번째는 중학생 산문 대상과 최우수상 작품이다.

산문 부문 대상

Volume 100 / 광주 대성여자중학교 3-3 김수미

외할머니 집에 도착하면 멍멍 개 짖는 소리 사이로 텔레비전 소리가 크게 울린다.

‘아! 오늘도 외할머니댁 담을 살짝 넘어 가야겠구나.’

역시 텔레비전 음량이 100으로 되어 있었다. 외할머니께 인사드릴 틈도 없이 나는 먼저 옆집으로 달리곤 했다. 귀가 들리지 않고 말을 못하는 벙어리 노부부의 텔레비전이 침묵을 지켜야 동네가 조용해진다.

오늘은 벙어리 할아버지는 마실 사셨는지 할머니 혼자서 텔레비전을 보고 계셨다. 매우 큰소리로 안녕하세요? 라고 외치며 고개를 숙여도 분명 내 소리는 못 들으시지만 꼭 이렇게 인사를 한다. 내 입 모양을 보고 아시길 바라는 간절함 때문에.

그 할머니는 오른손 검지를 머리 위에 올리고 머리카락을 동그랗게 만 후, 그 손가락을 가슴 앞에 대고 아래쪽을 가리켰다. 나는 입으로는 네 하면서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엄마도 같이 왔냐고 물으신 것이다. 나도 할머니의 남편이신 할아버지가 어디 가셨는지 궁금하여 한손을 머리 가운데 올려놓고 오른손 바닥으로 머리를 쓸어 내렸다.

할머니는 양손으로 네모를 그리고 호미질 하는 흉내를 내셨다. 아, 밭에 일하러 가셨구나. 엄마의 도움 없이 내 힘으로 텔레비전 소리 줄이고 안부까지 여쭙던 첫 번째 날이었다. 수화가 성공한날 비록 공식적인 수화는 아닐지라도 다시 담을 넘어 우리 외할머니 댁으로 들어와 의사소통의 기쁨을 자랑했다.

처음 그분들을 보았을 때 느꼈던 답답함과 무슨 말을 하시든지 어버버만 반복해 두려움까지 느꼈었다. 그런데 기쁨과 자랑스러움이 그 자리를 채웠다.동네에서 그분들과 의사소통의 어려움이 많아 엄마가 사람들의 특징을 찾아 몇 가지를 간단하게 만들었다고 하셨다. 엄마표 동네 수화다. 할머니를 표현할 땐 주먹을 쥐어 뒷머리에 대면 된다.

할머니들은 비녀를 꽂았기 때문에 그렇게 만드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양손을 턱 밑에 대고 긴 수염을 쓰다듬는 흉내를 내면 된다. 서로 쉽게 기억할 수 있도록 동네 사람을 모아놓고 특별과외를 한 셈이었다. 그래서 엄마는 동네 사람들이 부르면 달려가 서로의 이야기를 가운데서 전달해 주셨다고 하셨다.

귀가 들리지 않아 텔레비전 소리가 동네를 울려도 그저 화면만 보고 웃으시는 두 분 음량 버튼을 누르면 동네가 들썩여서 귀가 아프다고 할 땐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시지만 종종 또 실수를 하시는 두 분 이런 일로 동네 사람들은 짜증내지 않으신다고 하신다. 그분들과 70년 이상을 사시면서 한 가족이 되셨다. 텔레비전을 켜 놓고 주무셔서 치치칙 끊는 소리가 나면 가까이 사는 할머니는 오히려 텔레비전과 전등을 꺼주셨다.

나도 동네표 수화 실력이 늘어 지난겨울방학에는 큰 궁금증을 해결해 보려고 시도했다.왜 귀가 들리지 않게 되었는지 여쭤보았다. 10살 때 머리에 열이 난 후 귀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고 하셨다. 그 전에는 말도 했고 귀로 들을 수도 있었다고 하셨다. 처음부터 안 들린 게 아니었다니 놀라웠다. 두 분 모두 그러셨다니 가슴이 울컥했다.

소음 때문에 벌어지는 이웃 간의 다툼이 뉴스에 보도될 때 마다 동네에 울려 퍼지는 벙어리 할머니 할아버지의 텔레비전 소리가 떠오른다. 따뜻함으로 손을 내밀고 달려가는 사람들. 그곳엔 본명 장애인은 있었지만 장애인이 마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같은 사람들만 모여 살 뿐이다.

산문 부문 최우수상

장애를 가진 친구와 생활하면서 느낀 점 / 강원 강릉여자중학교 3-1 김서현

우리 반의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 왠지 모르게 들떠있기도 하고 어수선하기도 하며 시끄럽기까지 하다. 이 알 수 없는 흐름은 뭘까? 난 한 번 교실을 훑어보고는 유독 눈에 띄는 친구가 있음을 알아차린다. 물론 다른 아이들도 조잘대고 떠들기는 마찬가지지만 금세 나의 눈을 사로잡은 한 친구를 난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뭔가 이상하지만 난 왠지 모르게 잘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친구들은 말한다. 지적장애인이라고. 원래 그런 아이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난 왜 자꾸 신경이 쓰이는 것일까? 어떻게 원만하게 친구들 사이를 잘 풀어 나갈 수는 없을까? 잘 놀다가도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고는 꼭 지켜보기라도 하라는 듯 눈에 불을 켜고 노려보고 있다. 어떤 때는 무섭기까지 하다.

정말 원래 그런 것일까? 하지만 난 왠지 내가 모두를 위해 뭔가 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다. 책임감이라고 할까? 아니면 내가 할 수 있다는 막연한 자신감 때문일까? 내가 나서고 만다. 결과는 매 번 좋지 않지만 나쁘지도 않다. 지적장애인이란? 자꾸만 되풀이하며 나에게 물어보기도 한다. 하지만 번번이 잘 모르겠다는 대답뿐이다. 그냥 무조건 잘해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청소시간이다. 청소를 잘하다가도 무작정 덤빈다.

왠지 잘 모르겠다. 친구들 앞으로 막대걸레를 들고 돌진해 온다. 난감하기만 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친구들은 내게 달려온다. 그럼 난 무섭기도 하지만 막아서고 만다. 하지 말라고 타이르기도 하고 선생님께 말하겠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면 그때서야 비로소 막대걸레를 내려놓고 간다. 매번 그러니까 이제는 또 그러면 어떻게 할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답은 없지만 애써 참으려 한다. 한숨만 나오고 또 오늘도 하루가 지나간다는 안도의 숨을 쉬고 만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아이인가 보다. 언제가 한 번 TV를 통해 지적장애인에 대해 보았던 생각이 난다. 지적장애인은 몸만 어른이고 마음은 아이라는 것을 떠올려 본다. 그 때는 정말 그럴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지만 지금의 나는 정말 그렇다고 생각할 정도로 다시 한 번 그때의 장면들을 떠올려 본다. 수학여행 때의 일이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다.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우리 반은 지적장애인 친구가 있으니까 모두 서로 틈틈이 손을 잡고 가고 돌봐 주라고 하셨다. 친구들은 찡그린다.

하지만 난 왠지 잘 돌봐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혹시 따라다녀야 하는 걱정스러운 점도 있었지만 잘 할 수 있을 것처럼 여겨졌다. 다른 친구들과도 잘 지내야 되는데 지적장애인 친구와 같이 다닌다면 어떻게 하지? 라는 면도 없지 않았지만 ‘나 라도 하지 않는다면’하는 생각으로 조금 힘들더라도 잘 챙겨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해 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정작 수학여행 날에는 내 걱정을 무시하기라도 하듯 잘 다녔다. 무사히 수학여행을 마치게 해 달라는 내 기도를 들어주신 것처럼 느껴졌다.

같이 걷다보면 이내 친구들 속으로 잘 흡수해 준다. 고맙기까지 하다. 그러면서 나는 생각해 본다. 어쩌면 모두들 우려하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들과 똑같은 존재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 그냥 가끔 관심을 가져 달라고 손을 내미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친구가 있어 어디를 가든 장애인 표시가 있으면 그 친구를 떠올리게 된다. 정말 내가 다른 이들보다 좀 더 잘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함께 생활하며 지냈던 여러 가지 일들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에 남아서 인가 보다. 또한 그 친구들도 여러 가지 다른 일들을 스스로 잘 수행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다. 손을 잡아주고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겐 커다란 힘이 된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다. 처음 본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려 한 행동들 이었다고 생각하며 모두들 그 때의 소중했던 시간들을 기억하리라 믿어본다. 앞으로도 그런 친구들과도 더불어 같이 잘 지낼 수 있는 우리가 되리라 믿어본다.

산문 부문 최우수상

내 친구 이름은 …./ 경기도 포천여자중학교 2-1 이다은

나에게는 장애인 고모가 있다.

고모 이름은 이화숙······. 가족이라서 그런지, 소아마비로 서서 걷지도 못하는 고모를 나는 한 번도 부끄러워한 적이 없었다. 그랬다.

나는 장애에 대해서는 이미 어릴 적부터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고모를 보면서.

초등학교 때부터 매년 ‘장애인의 날’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르치셨다. ‘장애인들을 차별해서는 안 돼.’ 굳이 그렇게 가르치지 않아도 모든 사람들은 알 것이다. 장애인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고. 하지만, 같다고 똑같다고 말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편견, 그것이 장애인 친구들에게 큰 상처가 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단지 알고만 있을 뿐이다. 장애인 가족을 가진 나조차도 초등학교에서 만난 몸이 불편한 친구들을 피하고 무서워했으니까. 차별했으니까.

초등학교 때 우리 학교에는 6명 정도의 장애 친구들이 있었다. 나는 6년이란 길고 긴 시간 동안 그 친구들과 한 마디의 말도 나눠보지 않았다. 내 눈에 그 아이들은 무서워 보였던 것이다. 괴물처럼 나에게 다가와서 나를 만지고 쳐다보고 알 수 없는 말을 해대는 그 아이들을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려고 생각하지도 않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 그런 마음을 가졌던 내가 후회스럽다.

내 생각이 바뀌게 된 것은 중학교에 입학하고부터다.

포천여중, 우리 학교는 특수학생들이 수업 받는 반을 ‘특수반’ 이라고 하지 않고 ‘도담반’이라고 부른다. ‘도담반’이라는 말에는 ‘도도하고 당차고 슬기롭게 생활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도담반에서는 공부나 학교생활을 하는데 좀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한 학생들이 자신에게 맞는 방법으로 공부하고 있다.

포천여중에 입학한 작년, 우리 반에도 도담반 친구가 있었다. 난 그 친구와 초등학교도 같이 다녔지만, 그 친구와 그렇게 가까이 마주했던 적은 처음이었다. 나는 그 친구의 뒷 번호여서 번호 순서대로 줄을 서거나 번호대로 모둠활동을 할 때마다 그 아이와 함께 해야 했고, 선생님께서도 앞 번호인 그 친구를 잘 챙기라는 말씀을 내게 꼭 하셨다.

처음에는 정말 짜증나고 속상했다. 내가 속상해하고 있을 때, 다른 우리 반 아이들 역시 그 친구를 툭 치고 도망가는 장난을 치곤했다. 장난을 쳐도 아무렇지 않게 웃는 그 아이의 모습이 너무 우스웠고, 한편으로는 그 친구에게 장난치는 아이들의 모습이 마치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아 통쾌하기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는 한 친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도담반 친구인 그 아이도 우리가 무슨 말 하는지 다 알아듣는다고 말해준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표현이 우리와 다르기는 했지만, 우리 행동에 따라 약간씩 다르게 반응하던 그 얼굴, 그 표정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담반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는 다른 친구로 인해 엉겁결에 나도 그 친구와 인사를 하게 됐다. 그 친구는 인사를 할 때마다 손을 내밀었는데, 그 손을 잡아줄 용기가 쉽게 나지 않아 5개월 동안 그 손을 외면해왔던 것이었다.

우연히 하게 된 악수였지만, 그 아이와 내가 악수한 순서는 우리 반에서 세 번째였다. 그 친구는 악수를 하면서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흔든다. 비록 표정은 우리와 달랐지만 좋아하고 있다는 것은 어느 누가 봐도 확실했다. 그렇게 한 명 한명, 천천히 우리는 그 아이에게 다가갔고, 그 친구도 우리를 전혀 꺼려하지 않았다. 몇 달이 지나고 우리는 그 친구가 침을 흘려도 아무렇지 않게 휴지도 주고 손수건도 건넬 수 있을 만큼 친해졌다.

아직도 나는 그 친구의 손을 처음 잡았던 때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 이후로 이동수업 때마다 그 친구와 함께 교실로 가기도 하고, 같이 떠들기도 하고, 점심시간에는 그 때 유행어였던 ‘뿌잉뿌잉’이라는 말도 가르쳐 줬다. 그러던 중 사건이 터졌다. 다른 반 아이들이 그 친구를 화장실에 가둔 것이다. 우리 반 아이들은 모두 화가 났고, 울고 있는 그 친구를 달랬다. 나는 그 동안 장애인 친구도 울 수 있다는 것을 몰랐었다. 놀려대도 웃기만 해서 정말 웃는 것밖에 모르는 줄 알았다.

머릿속에서는 장애인도 우리와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은 다르게 대했던 것이다. 겉모습이 다르다고, 행동이 다르다고 다른 모든 것들도 우리와 다를 줄 알았던 나의 생각이 얼마나 짧았던 건지······.

친해지고 정이 들어갈 때쯤엔 이미 창 밖에 눈이 내리고 있었고, 아쉽게도 1학년이 끝나갔다.

아직도 학교에서 그 친구를 보면 서로 손을 마주잡고 인사를 한다. 우리는 인사를 한 것뿐인데 작년에 우리 반이 아니었던 학생들은 우릴 이상하게 본다. 내가 처음에 도담반 친구들을 보던 눈빛과 똑같이. 아마 그 아이들도 차별하는 눈으로 도담반 친구들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버린다면, 조금만 더 배려하고 보살펴준다면 모두가 행복한 사회가 될 것이다. 우리 반 아이들이 도담반 친구와 어울려 행복하게 지냈듯이. 그 친구로 인해 새로운 사실들을 깨달아 나갔듯이.

나는 아직도 예전의 나를 생각하면 그 친구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워진다.

그래서 차마 그 친구의 이름을 쓰지 못했다. 나는 앞으로도 장애인 친구들에게 웃어줄 것이고, 그 친구들의 손을 잡아줄 것이다.

장애인들을 차별하는 사람들이 그 아이들의 마음을 한번이라도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우리와 같이 표현도 할 줄 알고, 마음도 있고, 생각도 있고, 누구보다 깊은 상처를 가졌을 그 아이들을······.

산문 부문 – 최우수상

자전거 아저씨/ 경북 의성 비안중학교 2-1 손민영

우리 마을에는 아무 걱정 없는 표정으로 항상 싱글벙글 웃으면서 매일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아저씨 한 분이 계신다. 나는 그 아저씨를 ‘자전거 아저씨’라고 부르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아저씨를 나와 조금 다르게 ‘머리 이상한 아저씨’ 라고 부른다. 사실 그 아저씨는 30정도 되는 나이지만 지능이 5살인 정신지체장애인이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장애인이라는 편견으로 멀리하고 눈치를 주고 싫어한다.

내가 유치원에 다녔을 때, 초등학생이던 오빠의 말이 생각난다. 학교에 돌아온 오빠가 얼굴이 울상이 되어서는 엄마에게 “엄마, 세상이 너무 불공평한 것 같아. 약자를 괴롭히고……” 라면서 울었다.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니 아이들이 한 무리를 지어 와서는 장애인을 때리고, 괴롭혔는데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때는 어려서 이해가 잘 안 됐었지만 이제 생각해보니 정말 초등학생도 느낄 수 있을 만큼 불공평한 세상이 맞긴 맞는 것 같다. 정말 세상은 너무 강자 위주로 돌아가면서 약자를 무시하고 존중하지 않는다.

작년 우리 모두에게 충격을 준 ‘도가니’ 사건만 해도 그렇다. 장애인 학교에서 성폭력 문제가 그렇게 심각하게 발생한 것도 결국은 말 못하는 학생이니까, 그런 아이들에게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것이라는, 장애인을 무시하고 일반사람처럼 취급하지 않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명백한 범죄였음에도 가해자가 법정에서 무죄판결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가해자는 강자이고 피해자는 약자인 장애인이었기 때문이다.

요즘은 장애인의 날에 많은 행사를 하고, 장애 인식 개선을 위한 글짓기도 하고, 장애인을 위한 시설도 전보다 많은데도 사람들이 장애인을 생각하는 마음에는 전혀 변화가 없는 것 같다. 물론 예전처럼 대놓고 괴롭히고 때리는 것은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장애인에 대한 그릇된 시선은 아직도 많이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사람들은 장애인을 보면 ‘불쌍한 사람이니까 도와줘야지.’ 라는 시선으로 보면서, 보통 사람과 달라 아무것도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와 똑같은 사람인데도 왠지 좀 멀리하고 꺼려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할머니께서도 ‘지체장애 3급’ 판정을 받으신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장애인’ 이시다. 할머니가 장애인이시다 보니 더욱 장애인들의 고충에 공감이 가고 이해가 된다. 항상 할머니와 함께 다니다 보면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고 눈치를 주는 게 느껴진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좋지 않게 보는 시선이 더 상처를 준다. 그리고 장애인을 위한 시설을 많이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농촌에 사는 우리 할머니가 받을 수 있는 혜택은 거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장애인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지만 장애인이나, 장애인 가족이 되어 직접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그 노력이 좋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른다고 생각한다.

몇 주 전, 우리 마을에서는 면민체육대회 겸 경로잔치가 있었다. 그 때도 역시나 사람들의 시선은 자전거 아저씨에게로 향하곤 했고 줄 곧 눈치를 주고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항상 밝은 얼굴로 고민거리 없어 보이던 아저씨의 표정도 그날만은 왠지 편해 보이진 않았다. 만약 아저씨가 장애인이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사람들이 눈치를 주고, 혹은 불쌍해하고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장애인이 아니었다면 우리 면의 모든 사람들이 즐기는 자리에서 함께 즐거워할 수 있도록 가만히 두었을 것이다.

결국 장애인을 힘들게 하는 것은 장애 그 자체보다도 장애인을 비장애인과 구분지어 자꾸만 ‘특별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아닐까 생각한다. 장애인을 불쌍하게 바라보면서 도와주려고 하는 것이 장애인 스스로 일반사람이 아니라 불쌍한 사람이라고 느껴 상처를 받게 한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려면 먼저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좋지 않은 시선, 장애인으로 구분지어 특별하게 보려는 태도를 바꾸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장애인 스스로 생활하도록 도와주는 장애인 시설을 모든 지역에 골고루 마련해야 한다. 자전거 아저씨나 우리 할머니처럼 농촌 지역에 사는 사람들도 혜택을 볼 수 있도록 말이다. 이런 부분들이 개선되어 모든 장애인들이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일반사람과 똑같은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산문 부문 최우수상

데이지의 꿈 / 대구 북중학교 1-2 정예진

유난히 따뜻한 바람이 불었던 그 날, 나는 그 느낌을 잊을 수 없었다. 내 눈 위에 쏟아지던 그 빛은 날 멍하게 만들었고 달콤한 초콜릿을 먹은 것처럼 입 꼬리가 쓰윽 올라갔다. 나는 그렇게 한껏 따뜻한 오후의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자, 오늘은 짝 피구를 할 거예요. 서로 짝을 지어 보세요.”

그 때, 우리 반을 홀수였기 때문에 누군가 한 명은 짝 피구를 하지 못했고 그 누군가는 항상 그 아이가 되었다.

“야! 넌 어차피 피구 못하니까 빠져 있어.”

“맞아! 너만 없으면 숫자가 딱 맞네! 저기에서 구경이나 하고 있어라.”

체육 선생님은 항상 그 아이가 빠지는 것에 대해 무어라 하지 않았고 바로 게임을 시작했다. 그 아이가 체육 시간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 되었고 그 때마다 그 아이는 애써 시무룩한 얼굴을 감추고는 운동장 저 편으로 갔다.

동글동글한 얼굴형에 쌍꺼풀이 없는 작은 눈, 내가 좋아하는 밀크초콜릿같이 하얀 피부는 무언가 날 자석처럼 끌리게 하였다.

그 아이의 이름은 최미르. 휠체어에 자기 몸을 맡기고는, 항상 노 젓는 사람처럼 바퀴를 굴린다. 아이들이 말을 걸으면 매일 웃는 얼굴로 대하였고 꼭 잇몸을 보이며 웃는 그 모습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런 그 아이의 얼굴에 그늘이 생기는 시간은 체육시간 밖에 없었다. 체육시간마다 체육복과 운동화를 꼭 챙겨 오지만, 땀 한 방울 흘리지 못하고 항상 지켜만 보곤 했다. 왜냐하면 그 아이는 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 시간 가량의 혈투 끝에 결국 우리 팀이 이겼고 아이들은 비 맞은 것처럼 홀딱 젖은 얼굴로 수돗가에 몰려들었다. 교실에 도착한 아이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하필 그 날이 청소 당번인 나는 빗자루를 가지고 왔다. 아무 생각 없이 바닥을 쓸고 있었는데 맨 뒷자리에 파란 공책이 떨어져 있었다. 호기심이 생겨 무심코 그 공책을 펼쳐 보았다. 꽃이 그려져 있었다. 공책 한 면이 그 꽃으로 가득했다. 무슨 꽃인지는 몰랐지만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그 때, 이리저리 바닥을 보고 있는 미르가 보여 나느 물었다.

“혹시 이거 네 꺼야?”

“어? 그게 왜 거기 있지?”

난 미르에게 그 공책을 줬다.

“땅바닥에 떨어져 있더라. 그런데 그 안에 그려져 있는 꽃 있잖아. 이름이 뭐야?”

“아~ 그 꽃 이름? 데이지야.”

처음 들어 보았다. 데이지라고 하는 식물을.

“오늘 그 꽃 그리러 가는데 같이 갈래?”

난 가고 싶었다. 그 꽃을 실제로 보고 싶었다. 식물엔 관심이 없었던 나인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마 그 포근한 느낌을 느껴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응. 갈래. 그런데 거기가 어딘데?"

“아주 가까운 곳에 있어.”

난 미르를 따라 갔다. 미르의 휠체어는 나의 걸음속도와 비슷했다. 그렇게 열심히 휠체어 바퀴를 굴리던 미르는 교문 앞에 멈추었다.

“여기야. 데이지가 있는 곳이.”

데이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큰 해바라기가 있을 뿐 그 포근함이 느껴지는 꽃은 어디에도 없었다.

“응? 어디에 있는데?”

미르는 살짝 웃으며 아래를 가리켰다. 아주 작은 꽃이 있었다. 연분홍색 빛깔의 작은 꽃. 내 엄지손가락만한 길이였다. 미르는 그 공책을 꺼내더니 데이지를 한 번 어루만지고는 그리기 시작하였다. 데이지가 이렇게 작을 줄은 몰랐다. 그런데 미르는 그 꽃을 종이 한가득 그렸다.

“데이지는 정말 작은 꽃이야. 하지만 데이지는 정말 예쁜 꽃이야. 비록 크고 화려한 다른 꽃들 사이에 있지만, 그 속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어. 언젠가 그 아름다움을 뽐낼 날이 올 거야. 언젠가.”

그러면서 미르는 활짝 웃었다. 비록 작고 가냘프지만 미르는 희망이란 아주 소중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에게나 있지 않을 아름다움을 미르는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다음 날, 체육시간이었다. 그 날도 여느 때처럼 짝 피구를 하였다. 미르는 당연한 듯 또 운동장 구석으로 갔다. 그 때, 난 선생님에게 말했다. “선생님! 미르가 항상 이 게임에 빠지는 것은 불공평해요. 골고루 번갈아 가며 하는 것은 어때요?”

어디서 그런 용기 생겼는지 모르겠다. 미르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던 걸까. 체육 선생님은 헛기침을 하시더니 다른 친구와 미르를 교체해 주었다. 난 조용히 미르 곁으로 가 속삭였다.

“네 아름다움을 보여줘 봐. 항상 멋진 네 모습을.”

미르는 잇몸을 보이며 활짝 웃었다. 그 날, 미르는 따뜻한 햇살 아래 땀을 흘렸다. 그 아이의 웃음은 데이지의 꿈이었고 그 아이는 세상 누구보다 아름다웠다. 반짝이는 햇살이 그 아이의 웃음을 밝게 비추어 준 그 날은 참 좋은 날이었다.

산문 부문 최우수상

함께하는 세상을 희망하며/ 대전 태평중학교 1-7 송민재

오늘은 운이 나빴다.

엄마 몰래 핸드폰 게임을 하다가 들켰기 때문이다. 시험기간에 정신을 못 차린다는 엄마의 잔소리가 싫어서 나도 모르게 그만 “제 공부는 제가 알아서 할 거에요.”라고 큰소리로 말하며 엄마와 눈이 마주쳤는데, 순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엄마께서 볼일 보러 집을 비운 사이 난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재빨리 거실로 나가 텔레비전 리모컨을 누르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왜 시험기간에는 텔레비전이나 핸드폰 게임이 더 재미있게 느껴지는 걸까?

엄마께서 다시 돌아오시기 전까지 조금만 본다면 괜찮을 거란 생각에 조급한 마음으로 여기저기 채널을 돌리다가 내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찾았다. 일곱 명의 멤버가 매주 미션을 수행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인데 그들의 우스꽝스런 몸짓과 말투가 매우 재미있는 프로그램이다. 혼자서 낄낄거리고 웃으며 보고 있는데 갑자기 광고가 나왔다. 처음 보는 광고였는데 미국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했다는 연예인이 나오는 광고였다.

‘사흘만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첫째 날은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보겠다. 둘째 날은 밤이 아침으로 바뀌는 기적을 보리라. 셋째 날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평범한 거리를 보고 싶다. 단언컨대 본다는 것은 가장 큰 축복입니다.’ 마지막 자막에는 ‘보는 것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준 헬렌 켈러에게 감사하며’라고 적혀있었다.

그때 문득 준욱이 형이 떠올랐다. 내겐 특별한 사촌형이 있다. 형은 고모의 아들인데 나보다 두 살이 더 많다. 유희왕 카드 게임부터 레고조립까지 우린 좋아하는 것도 비슷했다. 형은 뭐든지 잘했다. 내가 모르는 것도 척척 잘 가르쳐주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들려주었기 때문에, 난 그런 형이 무척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형이 큰 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되었다. 가끔 형이 머리가 아프다고 했지만 난 형이 나랑 놀아주기 싫어서 꾀병을 부리는 거라 생각했지 진짜 아플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수술이 끝나고 부모님과 형의 문병을 가게 되었다. 나는 아빠께 형의 병이 어떤 것인지 여쭤보았다. 아빠께서는 형이 ‘모야모야’란 병에 걸렸다고 말씀해주셨다.

그것은 뇌 속의 혈관이 좁아져 막히는 병인데 피가 잘 통할 수 있도록 뚫어주는 수술을 했다고 한다. 수술이 끝나고 형을 병문안 갔을 때 형이 웅얼거리며 알 수 없는 소리를 내서 나는 깜짝 놀랐다. 고모께서는 형이 수술을 받고 난 후 마비 증세가 와서 말이 어눌해졌다고 했다. 형은 말도 이상했지만 행동도 이상하게 변했다.

자기 뜻대로 안되면 고모께 막 화를 내고 아기처럼 떼를 쓰기도 했다. 갑자기 아기처럼 변한 나의 사촌형이 왠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부모님께서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형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아직 형이 치료 중이고 아픈 단계이기 때문에 형을 이해하고 도와줘야 한다고. 나도 몇 번이고 그래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지만 왠지 형이 낯설게 느껴졌다. 몇 달이 지난 뒤 할머니 생신 날 우연히 형을 다시 보게 되었다. 형은 혼자서 로봇을 조립하고 있었다. 옆에서 보니 마음대로 부품이 끼워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형에게 “이건 이렇게 하고, 여기는 반대쪽으로 끼우면 되지?”라고 말을 걸며 도와주었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형이 웃었다. 형이 웃는 모습을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그 날 이후로 우린 다시 금방 친해졌다. 이젠 형과 내가 역할이 조금 바뀌었을 뿐 우리는 예전처럼 친하다. 처음엔 잘 몰랐지만 시간이 지라수록 형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형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형을 도와줄 때 나도 모르게 내게 마치 동생이 하나 생긴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이 흐뭇하고 기쁘기도 하다. 예전에 형도 나를 도와줄 때 그런 말음이었을 것 같았다. 나는 형을 통해서 지금도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닫는다. 장애를 가진 친구가 있으면 도와주고 배려하며 함께 어울려 같이 살아가야지 따돌리거나 놀리지 않았으면 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내일도 오늘과 같은 삶이 될 거라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장애란 것은 누구에게나 갑자기 예고 없이 찾아 올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진심어린 마음으로 먼저 손 내밀고 다가간다면 그들이 더 이상 장애로 마음 아파하는 일들은 없을 것 같다. 내가 만약 사흘만 세상을 볼 수 있었다면 과연 세상의 어떤 것을 그리워하며 보고 싶어 했을까?

산문 부문 최우수상

삐딱한 세상을 가진 멋진 작가/ 부산 하남중학교 2-5 김서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맘때였다. 흐드러지게 피었던 벚꽃이 지고 철쭉이 막 꽃망울을 틔우던 때. 지금으로부터 4년 전, 어린 11살 꼬마였던 나는 개학 첫날 내 옆에는 누가 앉게 될까 기대하며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런데 내 옆자리에 앉은 남자아이는 전교생이 다 알고 있고 나도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본 발달장애인이었다.

나는 낸 새로운 짝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방긋 웃으며 인사하는 것 말고는 없었다. 나는 멍하니 그날 1교시를 보냈고 쉬는 시간에 아이들의 위로를 받으며 이왕 하는 거, 열심히 해보기로 했다. 그 아이는 2교시 수업시간 내내 책도 펴지 않고 새하얀 종이 위에 검은색 연필로 무언가를 끼적였다. 그림도 있었고, 간혹 가다 글자도 있었다. 그 아이의 종이를 흘끗 본 나는 정말 놀랐다. 장애인이라고 했으니까 당연히 글자도 하나도 모르고 숫자도 하나도 모를 줄 알았는데 그 아이의 글씨는 정말 반듯반듯했다.

나보다 잘 쓴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장애인도 글을 쓸 줄 알고 숫자를 안다는 것. 그 사실은 11살 어렸던 내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장애인은 몸이 조금 불편한 사람이라는 것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지만 그 사실이 그토록 마음에 다가온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 아이는 항상 수업시간에 교과서 대신 하얀 종이를 올려놓고 그림을 그리거나 숫자를 써내려가곤 했다. 가끔씩 수업시간에 조용히 그림을 그리다가 그 아이는 내게 작품에 대한 해설을 해주려고 했다.

해설을 듣다간 수업을 다 놓치겠다는 생각에 생각해낸 것이 쉬는 시간에 설명해 달라고 하는 방법이었다. 그 아이의 작품해설은 내게 별로 와 닿지 않았다. 그냥 허무맹랑한 4살짜리가 지은 한편의 이야기 정도? 하지만 그냥 나는 생긋 웃으며 칭찬을 해주었다. 나는 그런 식으로 그 아이와 꽤 잘 지냈다. 수업시간에 ‘여기다가 이걸 쓰면 되는 거야.’하고 가르쳐주기도 하고 칭찬도 자주 해 주었다.

그런 나를 보고 그 아이의 보조 선생님과 담임선생님은 나보고 착하다며 칭찬을 해주셨고 나는 그게 또 좋아서 그 아이에게 더 잘해 주었다. 하지만 그것이 계속 갈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금요일 아침, 안전방송을 하는 날이었던지라 방송화면에서는 한 여자아이가 손가락을 베어 피를 흘리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그 때 내 옆에 앉아있던 그 아이가 우욱, 하며 내 옷이며 가방을 토사물로 흠뻑 적셔놓았다. 찝찝함, 불쾌함, 짜증이 어우러져 나는 눈에 눈물을 매달고 소리를 바락바락 질러대며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아이에게 짜증을 냈고 나는 그날 생전 처음으로 조퇴를 했다. 나는 그 다음날부터 그 아이를 철저하게 무시했다. 내가 그런 식으로 못되게 굴 때면 그 아이는 어색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말하려다

“아유, 아, 알았어. 내가 그냥 가면 되잖아.”하며 잔뜩 울상을 짓고는 가버렸다. 울상인 아이의 얼굴을 볼 때마다 마음한 구석이 따끔거렸지만 나는 그 통증을 무시해버렸다. 그렇게 나는 4학년을 보냈다. 기억 저편에 묻혀 잊고 있던 그 아이가 다시 생각난 것은 얼마 전 지하철을 타고 있을 때였다. 지루함을 달래고자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듣고 있었는데, 갑자기 멀쩡히 앉아 있던 사람 한 명이 벌떡 이러나 지하철 벽면에 붙어있는 한의원 광고지와 아파트 분양 광고지를 바꿔 끼웠다. 뭐하는 건가, 하고 보다가 그 사람이 팔을 흔들며 아래위로 뛰는 걸 보고 정상인인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 사실을 알아챔과 동시에 내 머릿속에 선명히 새겨지는 이미지는 그 아이의 얼굴과 반듯반듯한 글씨, 그리고 해맑은 미소였다.

내 옆에서는 한 아주머니와 작은 꼬마아이가 장애인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 사람은 왜 저러냐고 물어보는 아이에게 아주머니는

“음…. 그러니까 저 사람은 우리랑 약간 다른 거야. 몸이 불편한 장애인들도 있지만 특히 저 사람은 세상을 우리처럼 바라보는 게 아니고 약간 삐딱한 곳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는 거야. 우리한테는 그냥 광고지지만 저 사람한테는 저게 엄청 멋진 종이로 보일 수도 있는 거지. 그러니까 놀리거나 그러면 안 돼. 알았지?”

이어폰을 낀 상태였고 음악은 여전히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그 말은 똑똑히 내게 들려왔다. 삐딱한 곳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 그 말이 정말 머릿속에 메아리치듯 울렸다. 그리고 내 짝이었던 그 아이가 울상 짓던 모습이 다시 떠오르며 마음 한 구석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세상을 다르게 보던 그 아이의 하얀 종이 위엔 온갖 이야기와 온갖 세상이 다 들어가 있었다. 반듯한 글씨고 쓰여 있던 글자들은 삐딱한 세상을 담고 있었다. 그 아이는 나보다 훨씬 더 뛰어난 상상력을 가진 작가였다. 그 사실을 안 순간, 더 이상 그 아이는 내게 장애인이 아니었다. 자신만의 삐딱한 세상을 반듯하게 써내려가던 멋진 작가였다.

추운 겨울이 끝나가고 봄이 오기 시작할 준비를 하는 2월 말, 덜컹거리는 지하철 속에서 4학년 때 내 짝이었던 그 아이는 내 마음속에 또렷이 각인되었다.

산문 부문 최우수상

‘우리는 외계인이다’를 읽고/ 서울 인수중학교 2-5 안세빈

우리 아버지는 지난 해 10월 28일,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으나 아버지는 순식간에 왼 팔과 왼 다리를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버지는 걸으실 수도 없으셨고 혼자 머리를 감거나 세수하는 일 또한 불가능하셨다. 아버지가 다치시고 나자 나는 새삼 장애인에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멀리, 저 아득히 있을 것만 같았던 장애인들은 우리 곁에, 내 곁에 많이 있었다. 단지 내가 그런 장애인들에 대해서 많이 관심가지지 못한 것뿐이었다. 어쩜 이리도 한심스러울 수가 있을까? 그들을 이해한다고 믿고 있었던 나는 그저 장애인의 관한 행사가 있으면 말만 번지르르하게 글을 써서 내고는 뻔뻔스레 면상을 들고 장애인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유세를 떨던 것이었다.

진정으로 한번이라도 생각해본 적이 있었더라면 그들의 대변인인 냥 나서면 안됐던 것 아닐까? 우리 아버지께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이 찾아와

“저는 장애인들을 매우 사랑합니다. 저런, 몸이 안 좋으시군요? 도와드릴까요?”하고 어설프게 나선다면 정말 한 대 때려주고 싶지 않을까? 입으로만 번지르르 떠들면서 구청에 장애인 편의시설에 건의해본 적 없다는 게, 학교에 물어보지 않았던 게 새삼 부끄럽고 부끄러웠다.

아버지의 몸이 불편해진 뒤 생각나는 아이가 있었다. 우리 동네에는 ‘도봉도서관’이라는 도서관이 있는데, 가끔 그 곳으로 장애아동들이 단체견학을 오는 경우가 있었다. 당시 나는 도서관에서 봉사활동으로 사서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책을 꽂다 어린이 방에 아이들이 한 가득 모여앉아 책을 읽는 모습을 보았다. 모두 떼를 지어 앉아서 서로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소리 지르고-. 나는 장애아동들을 보면서 연민을 느끼고, 동시에 내 생활에 대한 보장심리를 느꼈다.

‘쟤네 좀 봐! 얼굴을 일그러지고 말도 제대로 못해! 어머, 불쌍해라!’

이런 생각으로, 마치 6.25 전쟁으로 가난에 굶주린 한국 아이들에게 초콜릿을 나눠주는 미국 병사 같은 심정으로 그 아이들에게 다가섰다. 어쩌면 그 때 나는 내 스스로 대견하다고 느끼며 어머니께 칭찬받을 일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만큼 나는 유치했다. 그런 가볍고 상처가 되는 마음으로 장애아동에게 다가선 나는 꼴같잖은 친절을 베풀며 장애아동과 함께 어울렸다.

그 때 만난 아이 중 한명은 여자아이로 말이 어눌했고 자꾸만 침을 흘리는 아이였다. 책을 읽는 것이 재미가 났는지 아이는 자꾸만 방실방실 웃으면서 나를 보았다. 아이는 내가 가지고 있던 핸드폰이 퍽 신기해보였는지 자꾸만 내 주머니를 치며 관심을 보였다. 물론 미국병사는 한국 아이들에게 초콜릿 외에는 줄 생각이 없었다. 나는 아이가 내 말은 듣지도 않은 채 자꾸만 내 물건을 만지자 심통이나 어린이 방을 빠져나왔다.

뭣 모르는 아이는 그저 좋다고 나를 따라 나왔다. 장애아동이 자신을 따라오자 덜컥 겁이 난 어린 시절의 나는, 화장실로 가 문을 걸어 잠그고 아이가 갈 때까지 나가지 않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장애아동이 이상하게만 보였고 내가 한 행동이 잘한 짓으로만 알고 있었다. 우습게도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내 잘못도, 그 아이도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러다 이제야 생각이 난 것이다. 이기적이게도 나의 가족이 장애가 생긴 후에야 말이다.

너무나 속상했다. 그 아이의 부모도, 형제도, 모두 나와 같은 아픔과 당황스러움을 겪었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보다 빠른 시간에 경험했고, 익숙해질 틈도 없었을지 모른다. 나는 어릴 때에도 위선에 가득 차 있던 것이다. 나는 한참이나 내 잘못을 생각했지만 그 아이의 얼굴이,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 때의 나는 그 아이를 놀린 것에 결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에 나는 더욱 울적해졌다.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보다 결함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배척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 탓에 장애아들은 어쩔 수 없는 삶의 난간에 부딪히기도 할 것이고 어쩌면 목숨의 위협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슬픈 건 장애인들은 그런 상처 때문에 쓰리고 아프지만 비장애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외계인이다’에 나오는 성재와 같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인정하고, 장애인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직접 나서지 않더라도 마음으로 위안을 보내는 사람, 허풍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들을 위로하고 쓰다듬어주는 사람-. 그렇게 한탄하고 걱정하고 장애인을 대신해 분호하기 전에, 변론해주기 전에, 자신 주위에 있는 장애인부터 도와나가자.

산문 부문 최우수상

똑같은 친구니까/ 세종시 한솔중학교 1-16 손예인

내가 처음 장애인을 알게 되었을 때는 2학년 때였다. 처음에는 “저게 뭐지?”란 마음과 함께 무섭기도 하였다. 어린 마음에 나와 다른 사람을 보고 외계인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장애인들은 여러 가지로 나와 달랐다. 생김새도 다르고 하는 행동도 달랐다. 눈이 보이지 않다거나 구가 들리지 않는, 또 거동이 불편한 사람 등 아주 많은 장애인들이 있다. 어릴 때는 그런 장애인들을 보면 별로 좋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씩 커가면서 장애인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 갔다. 학교나 가정에서 항상 장애인에 대한 좋은 인식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가장 크게 장애인의 대한 인식이 바뀌었던 때는 6학년이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는 자폐증을 가진 오빠와 친구가 있었다. 이 둘 중에 나는 친구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그 친구는 비록 같은 반이 아니라 잘은 몰랐다.

하지만 그 친구의 반 친구들과 선생님이 항상 그 친구를 챙기는 것을 보았다. 우리 학교에는 장애인 친구를 위한 교실이 있었다. 그 곳에서 자폐증인 그 친구는 특수담당 선생님과 수업을 했다. 우리처럼 어려운 국어, 수학, 과학, 사회는 아니더라도 종이접기나 만들기 등 그 친구에게 재미있고 흥미를 줄 수 있는 수업을 받았다. 가끔씩 자신의 반에서 수업을 듣기도 하였다. 수업 중에 돌아다니거나 소리를 지르기도 했지만 반 친구들과 선생님은 그 친구에게 맞추어 가며 수업을 하는 듯하였다. 급식 실을 갈 때나 항상 그 친구 옆에는 선생님 또는 반 친구들이 옆에서 같이 도와주며 갔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지고 도와주는 친구들이 정말 마음이 예쁜 친구들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내가 장애인 친구도 똑같은 친구라는 것을 알게 해준 사건은 수학여행 때였다. 수학여행 때 그 친구도 함께 간 것이다. 처음에는 깜짝 놀랐다. 장애를 가진 친구가 며칠 동안의 이 수학여행을 잘 다녀올 수 있을지 가족과 떨어져서 잘 지낼 수 있을지 살짝 걱정도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 친구의 어머니는 이 친구가 다른 아이들처럼 똑같이 학교도 다니고 같이 수학여행도 가길 바라셨던 것 같다. 나는 장애를 가지고 있어도 우리와 똑같이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학년이 끝나 갈 때도 항상 그렇듯이 친구 옆에는 반 친구나 선생님이 계셨고 항상 옆에서 그 친구를 도와주었다.

어디를 갈 땐 함께 밥을 먹을 때도 함께였다. 비록 우리들처럼 마음대로 뛰어놀고 수다를 떨지는 못했지만 그 친구에게는 학교를 다니다는 것이 행복했을 것이다. 그리고 몇 개월 뒤, 우리는 졸업을 했다. 6학년 동안 나는 그 친구를 알았지만 같은 반도 아니고, 잘 모르게이 말 한 번 걸어보지 못했다. 지금은 내가 이사를 와서 그 친구를 보지도 못하고 잘 있는지도 모른다. 졸업앨범을 펴 보면 그 친구는 당당하게 앨범 속에서 미소 짓고 있다. 그 친구는 나처럼 지금 중학교란 큰 문턱 앞에 섰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처럼 중학교도 재미있는 중학교 생활을 하길 바란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에 한 친구로 인하여 배려를 배웠고, 도움을 배웠고, 함께하는 법을 배웠다. 또 장애인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장애인을 보면 나와 먼 존재, 상관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같이 학교생활을 해보니 장애인이란 사람이 멀게 느껴지기보단 가까운 친구로 느껴진다. 이런 계기로 나는 장애인들에 대해 좀 더 생각하게 되었다. 버스에타든, 화장실에 가든 항상 장애인 전용석이 있다. 한편으로 보면 배려라고 생각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장애인들도 같은 사람인데 우리와 똑같은 대우를 받고 싶을 것이다. 그 친구가 수학여행을 간 것도 다른 친구들과 같이 똑같은 대우를 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아닐까? 장애를 가진 친구와 같이 생활하면서 모든 사람은 똑같다는 것을 배웠다. 나는 우리나라 아니 전 세계가 장애인들을 자신과 똑같이 대우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산문 부문 최우수상

나는 착한 1번 언니 / 울산 서여자중학교 3-7 김현아

“이번엔 1학년이다! 빨리 가자!”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선거운동을 위해 만든 피켓을 들고 1학년 교실로 향했다.

“기호 1번 김현아! 기호 1번 김현아!”

“국민이 있어 나라가 존재하듯이 학생이 있어 학교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학생을 위하는, 학생이 원하는 학교를 만들겠습니다.”

나의 유세를 듣는 학생들을 일일이 둘러보았다.

여러 반을 돌며 선거유세를 하다 보니 쉬는 시간이 1분밖에 남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한 반만 더 들르기로 하고 앞 반으로 들어갔다.

짧게 소견발표를 하고 나오는데 어떤 아이가 소리를 쳤다.

“기호 1번 김현아. 1번 1번 헤헤.”

그 아이 옆에는 도우미 학생들이 있었다. 그 아인 장애를 가진 아이였다. 그 아이에게 다가가 말했다.

“그래 내가 기호 1번이야. 안녕? 잘 부탁해.”

내 마음은 진심이었다. 어차피 나선 회장선거였다. 한 표가 절실한 입장이었다. 한 번도 관심조차 갖지 않던 노인이며 장애인들에게 선거 때만 되면 유독 관심을 보이던 정치인들이 떠올랐지만 나는 다른 마음이라고 자부하며 교실로 돌아왔다.

그 후로 여러 교시가 지나는 동아 자꾸 생각나는 얼굴일 있었다. 소견발표 때 내 이름을 불렀던 아이의 얼굴이었다.

3학년만 해당되는 3교시 후의 점심시간이 지났다. 4교시 수업을 알리는 신호음을 듣고 교무실에서 헐레벌떡 교실로 뛰어가던 중이었다. 계단 앞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아아아 안 가 안 가~”

“지금 종 쳤는데 늦었어. 빨리 가자.”

“그래, 한나야. 3학년 언니들 수업해야 해.”

무슨 일인가 싶어 들여다보았더니 계속 머릿속에 맴돌던 그 아이였다. 그 아이는 바닥에 누워서 교실에 가기 싫다고 버티는 중이었다. 양쪽에 붙어선 두 도우미 학생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그 아이를 재촉하고 있었다.

“한나야, 일어나. 아까 1번 언니야. 김현아 언니, 알지/ 수업 시작할 시간이니 친구랑 빨리 교실 들어가야지.” 나는 도우미 학생이 불렀던 이름을 부르며 한나를 일으키려고 했다. 눈을 감고 있던 한나가 1번 언니라는 말을 듣고는 눈을 번쩍 떴다.

“1번 언니다. 헤헤.”

“그래. 한나 일어나자 으쌰~”

한나를 일으켜 세우고는 도우미 친구들에게 손을 쥐어주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한 후 아이들은 교실로 돌아갔다. 아이들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뿌듯했다. 우리 학교에 저렇게 착실하게 장애우를 돌보는 친구들이 있다니 말이다. 나는 장애아 시설인 혜진원에서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자주 본다. 성당에서 하던 봉사활동으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자발적으로 간다. 함께 보낸 시간들이 한나와 도우미 친구들을 도와주는데 보탬이 된 것 같았다.

며칠 후였다. 그날 따라 짐이 많았다. 책가방과 보조가방 두 개를 들고 등교를 해야 했다. 교문을 막 들어섰을 때였다. 혼자서 가던 한나를 만났다.

“안녕? 한나.”

“어? 착한 1번 언니다!”

나를 깜짝 반긴 한나는 내 짐을 보더니 자기가 들어준다고 했다. 말리거나 사양하는 것도 한나에겐 상처가 될 수 있어서 보조가방 한 개를 맡겼다. 두 개를 다 달라는 걸 나눠들자는 내 말에 한나는 한 개만 가져갔다. 한나는 그 가방을 우리 교실까지 같이 들고 가주었다. 정말 고마웠다.

세상에는 한나 같은 장애인이 많다. 특히 일반학교에 다닐 정도라면 거의가 한나와 비슷하다. 우리의 도움도 받지만 우리를 돕기도 하는 친구들이 대부분이다. 한나는 이런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좋게 변화시켜주는 친구다.

한나는 지금도 종종 만난다. 그때마다 나를 부르는 이름은 늘 ‘착한 1번 언니’다. 앞으로도 한나에게는 물로 다른 장애우들에게 그렇게 불리도록 해야겠다.

산문 부문 최우수상

미순이의 꿈/ 울산 연암중학교 3-8 권은지

우리 학교 1층에는 다솜반이 있다. 다솜반은 장애우들을 모아서 수업하는 교실이다. 다솜반 친구들은 가끔씩 우리가 공부하는 교실에 와서 수업을 들을 때도 있다. 그때마다 그런 친구들을 꺼리는 학생들이 많다. 나도 처음에는 그런 친구를 상대하는 일이 달갑지 않았다. 작년 5월, 자리를 바꾸는 날이었다. 친구들은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릴 만큼 긴장하고 있었다. 장애우와 짝이 될까 봐 두려운 것과 짝이 되고 싶은 친구와 짝이 되지 않을까봐 갖는 긴장감이었다.

‘아! 망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이름표를 뽑은 나는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가끔씩 함께 수업을 듣는 장애우 미순이와 짝이 되었기 때문이다. 미순이는 초등학교 2학년 때 교통사고로 다리를 심하게 다친 친구였다.

“꺄~ 지영아, 우리 짝이다.”

서로 짝이 된 친구들의 즐거운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가슴 속부터 화가 치밀어 올랐다. 도대체 왜 나는 미순이와 짝이 된 건지 뭔가 억울했다. 이 순간만큼은 이런 식으로 좌석배정을 하신 선생님이 야속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미순이가 우리와 함께 수업을 듣는 시간은 하루에 한두 시간 뿐이라는 것이었다.

자리 바꾸는 시간이 끝나고 미순이가 왔다. 미순이는 다리를 저는 지체장애인이었다. 나는 미순이가 오는 인기척을 느꼈지만 미순이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미순이는 자리에 앉았다. 자리바꾸기로 짜증났던 아침자습시간이 끝나고 어느새 1교시가 시작되었다. 1r시는 도덕시간이었다. 아침에 자리 바꿀 때 미순이를 뽑았던 게 불길한 징조였던 걸까? 미순이는 일과 중 두 번 정도 교실에 오는데 하필 모둠수업 때 왔다.

도덕시간에 차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이었다. 그날 과제는 짝지와 차별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왁자지껄 떠들었지만 나와 미순이는 가만히 있었다. 예전부터 장애우는 도와주어야 한다, 장애우라고 무시하면 안 된다는 식의 교육을 많이 받았고, 그런 식의 내용을 다룬 책도 많이 읽었다. 그럴 때마다 마음으로는 장애우를 위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행동은 따르지 못했다. 언행불일치다. 막상 장애우를 보면 거부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건 생각뿐이었다. 어색한 채 내가 먼저 다가가지 못하니 미순이가 먼저 다가왔다.

“안녕?”

“응? 으응······.”

미순이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 왔지만 나는 심드렁했다. 어색함 때문이었다. 교실을 돌며 이야기에 도움을 주시던 선생님이 우리 쪽으로 왔다.

“얘들아, 이야기 안하고 뭐하니.”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이번에도 미순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차별이란 것은 외국인, 흑인, 장애인 누가 받아도 슬픈 거야.”

미순이가 이렇게 말하자 나는 뜨끔했다. 미순이가 나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그것은 그동안 미순이가 참아왔던 가슴속의 말이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스스로의 편견을 인정하기 싫었지만 다른 친구들과 미순이를 차별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을 하다 보니 미순이도 많이 슬프고 고통스러웠을 것 같았다. 사고 나기 전과 후 사고로 인해 불편해진 몸 때문에도 슬펐을 것이지만 주위사람들이 대하는 태도나 차별 때문에 더 속이 상했겠다, 싶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미안한 마음에 우물쭈물하면서도 미순이의 이야기만 듣다가 그 시간이 끝났다. 쉬는 시간에 미순이 엄마가 오셨다. 미순이를 병원에 데리고 가시려는 것이었다.

“잘 갔다 와.”

자연스러운 이사였다. 그다지 용기가 필요한 말도 아닌데 그 말이 왜 그리 힘들었을까. 무심한 내 인사에 미순이는 환하게 웃었다. 내 마음에도 꽃등불이 켜진 것 같았다.

다음 날이었다. 과학시간에 미순이가 왔다. 혼자 앉아 있는 걸 보고 말을 걸었다.

“미순, 심심하지 않아?”

“응. 수업 재미없다.”

“근데······. 미안해.”

장애우인 미순이가 나에게 부담이라도 줄까봐 색안경을 끼고 본 것이 미안해서 한 말이었다.

“뭐가?”

“그냥… 그런 게 있어.”

얼렁뚱땅 넘겨버린 내 대답에 미순이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굳이 묻지는 않을게.”

“그래. 나도 비밀은 있거든.”

우리는 소곤대다 웃었다.

장애는 자신이 원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런 데도 그 때문에 받는 것은 너무 부할 것 같다. 장애는 몸을 불편하게 할 뿐, 마음은 누구보다 자유롭게 한다. 오히려 비장애인의 생각보다 훨씬 더 앞선다는 것도 알았다.

미순이는 불편이나 통증이 덜한 의족을 만들고 싶어 한다. 자신의 경험에서 얻어낸 지혜다. 그런 생각을 할 만큼 몸이 불편한데도 자신보다 더 불편한 사람을 위한 일을 하고 싶단다. 지금은 누구보다도 친하게 된 미순이. 그 소박하면서도 겸손한 꿈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산문 부문 최우수상

작은 행복 큰 기쁨/ 전남 구례중학교 1-2 조재훈

외할아버지는 우리나라 남쪽 지리산에서 태어나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계십니다.

엄마와 나는 사는 곳이 외할아버지 집과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자주 외할아버지 집에 다닙니다.

외할아버지는 올해 나이가 77살이시고 어려서 다리 한쪽을 다쳤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쪽 다리가 불편하십니다.

걸어 다닐 때는 지팡이로 짚고 다니시거나 절뚝거리면 다니십니다.

오랜 세월 한쪽 다리에만 힘이 들어가서 정상인 다리까지 많이 아프십니다. 그래서 몇 년 전에는 정상인 다리까지 관절염으로 수술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정신력이나 노동력에서 보면 일반인보다 더 열심히 생활하십니다.

이곳에서 밭농사, 논농사, 가축 키우기까지 못 하시는 게 없으십니다. 육체의 장애를 떠나 사람은 일하는 만큼 수확을 할 수 있는 정직함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농사에 있어서는 욕심도 많으시고, 할 일이 있으시면 새벽같이 일어나 논밭으로 나가십니다.

외할아버지는 하시는 모든 일에 책임감이 있으십니다.

작년에는 압사무소에서 하는 공공근로 일을 하셨는데 끝나고 집에 오셔서는 정말 일이 힘들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엄마는 공공근로는 적당히 시간 보내면 된다고 하니 외할아버지는 자기가 맡은 일은 누구보다 더 열심히 하여야 한다고 하십니다.

책임감과 부지런함은 외할아버지가 살아오신 인생이라고도 말씀합니다.

정말 내가 보아도 외할아버지는 할머니 없이 4남 2녀의 자식을 홀로 키워내신 힘이 그런 성실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되어집니다.

외할아버지는 비록 몸이 불편하시지만은 고향에 대한 애향심이 남다르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을 오염시키지 않고 농촌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자세히 가르쳐 주기도 하셨습니다.

지푸라기, 풀, 재 등을 쌓아 여러 달을 썩혀 그것을 퇴비로 만들어 논과 밭에 사용하면 땅과 물의 오염은 찾아볼 수 없고 자연을 거슬리지 않고 살 수 있다 하셨습니다.

수확기엔 산속 동물들의 먹이를 남겨두는 후한 인심도 있습니다.

나는 그런 외할아버지를 존경하고 많이 따릅니다. 아마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전혀 없는 것도 어려서부터 함께 생활하고 봐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말이면 외할아버지와 나는 많은 시간을 함께합니다.

한번은 화엄사 옆 개울가를 외할아버지와 산책하는데 야생의 반딧불을 보았습니다.

여러 마리의 반딧불이 깜깜한 밤에 작은 빛을 반짝이며 내 키보다 높은 곳에서 날아다니는 광경이 얼마나 신기하고 아름다운지 모른답니다.

외할아버지는 반딧불이 있는 이곳은 오염되지 않은 건강한 곳이라고 합니다. 이 곳 화엄사에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도 많습니다.

화엄사 입구를 지나 대웅전 앞마당에 마주보고 서 있는 동오층석탑과 서오층석탑, 건물이 웅장한 대웅전과 각황전, 봄에 활짝 핀 철쭉꽃과 잘 어울리는 각황전 앞 석등, 외할아버지 손을 잡고 계단을 오르내렸던 사자 삼층석탑 등은 우리 지역의 자랑이기도 합니다. 외할아버지는 고향에 대한 애착심과 자연환경보존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열정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곳 지리산 밑에도 봄이 도면 논밭에 고추도 심고 모도 심습니다.

이번에도 난 엄마와 함께 외할아버지를 도와 밭에 고추나무를 심었습니다.

물로 외할아버지는 모든 일을 혼자 다 하려 하시지만, 다리가 불편하신 할아버지와 함께 하는 일이 나는 즐겁습니다. 외할아버지와 엄마는 구례 5일 시장에서 고추모를 사온 후 밭에 지주목을 꽂습니다.

고추모를 지주목 옆에 심은 후 끈으로 고정을 시킵니다.

난 열심히 외할아버지 옆에서 심부름을 합니다.

지주목 옮기기, 고추나무에 물주기는 내가 맡은 일입니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기특하다고 웃으시는데 이마에 깊은 주름이 보입니다.

그런 외할아버지를 보고 엄마도 웃고, 크게 웃으시는 엄마를 보고 나도 웃습니다.

난 당연한 일을 한 것 뿐 인데 기분이 좋습니다.

엄마는 효도를 한다는 것은 작은 일이라도 어른들을 기쁘게 만드는 것이 효도라고 하셨습니다.

엄마가 외할아버지 마음을 편하게 해주시는 것을 보고, 내가 어떻게 하면 부모님이 좋아하는지 알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나의 작은 행동 하나 하나가 다리가 아프신 외할아버지에게 큰 기쁨을 줄 수 있습니다.

외할아버지는 그 동안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을 하셨고, 가족과 고향을 소중하게 지켜오고 계십니다.

언제까지나 외할아버지가 원하는 일을 하시면서 건강했으면 좋겠습니다.

산문 부문 최우수상

차이가 아닌 특별함/ 순창 여자중학교 2-3 최은지

나는 장애인에 대한 관심이 많다. 왜냐하면 내 주변 가까이에는 몸이 불편하신 삼촌들과 나의 아빠가 있기 때문이다. 몸이 불편하실 뿐이지 사실 우리들과 다른 점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들과 같이 감정을 느끼고, 장애인이라고 해서 일을 더 못하거나 그러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몸이 불편하신 우리 아빠는 지금 하시고 있는 가게 일도 열심히 하고 장애인 배구 대회에서도 여러 삼촌들과 함께 상도 많이 타시고 취미 생활도 즐길 줄 아시는 분이다. 이처럼 몸이 불편한 장애인분들이라도 우리들과 같이 운동도 잘할 수 있고 취미 생활도 하면서 일도 열심히 하실 수 있다. 아니, 오히려 우리보다 더 열심히 일하시고 긍정적으로 살아가시는 분들도 많이 계신다.

사실 어느 누군가가 자신이 장애인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장애인이 되고 싶어 할까?

자신이 장애인이 되고 싶어서 장애인이 된 사람은 아마 없을 것 이다. 아마도 단순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큰 사고나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아픈 선천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신 분이 주로 장애인분들 이실 것이다. 과연 이러한 사고나, 선천적으로 몸이 불편한 것 들이 장애인 분들의 죄일까?

이렇게 생각하면 모든 사람들의 대부분이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 단지 운이 없었을 뿐이지 장애인이 된 것은 아무의 잘못도 아니다. 하지만 요즘 청소년이나 기업, 사회는 장애인이라고 하면 안 좋은 인식이 강하며 눈살을 찌푸리는 일이 대부분 이라고 생각한다. 겉으로는 장애우 사랑, 장애인 배려하기, 사랑하기라고는 말하지만 직접 장애인을 보면 뒤에서는 웃거나 욕을 하며 놀리기 일쑤이다. 그리고 장애인이라고 하면 일을 더 못하겠지, 뭔가 부족하겠지 라는 생각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것 같다. 하지만 아까 내가 이야기한 것처럼 장애인분들이 모두 일을 못하거나 그러한 것은 아니다.

물로 정신적 장애나 크게 몸이 불편하신 분들은 일하기에 불편하시거나 힘든 점은 있을 테지만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언젠간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몸이 불편하더라도 계속 시도해보고 노력한다면 어떠한 일이라도 장애인분들도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된다. 결국 그렇다면 몸이 불편하신 분들은 우리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도 열심히 하실 수 있으며, 자신이 즐겨하는 취미생활도 하실 수 있고, 마지막으로 몸이 불하더라도 도전하는 정신이라는 우리보다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다.

다만 사람이 모두 장점만 있는 게 아니라 단점이 있는 것처럼 몸이 건강하고 유연한 사람이 있듯이 반대로 몸이 불편한 사람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장애인분들에게 우리와 조금 다른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장애인분들은 우리와는 조금 특별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특별한 재능이 있듯이 장애인 분들도 모두 특별함 하나씩을 갖고 생활하시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까 나는 모두가 이 특별함을 이해하고 서로 배려하는 사회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애인이라고 모두 일을 못할 거라는, 공부도 못하고 사회생활 잘하지 못할 것 이라는 등 우리가 장애인에 대해 갖고 있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특별함을 인정하며 서로 배려하며 생활한다면 우리 모두 장애인 차별 없이 생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고정관념을 쉽게 버릴 수는 없다. 그래도 이러한 고정관념을 버리기 위해서는 정부와 국가, 대중매체의 노력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장애인과 함께하는 캠프나,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조금이나마 개선할 수 있는 강의나 장애인을 직접 배려하고 만나서 봉사하며 직접 몸소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을 정부나 국가에서 지원해준다면 ‘장애인분들은 몸만 불편할 뿐이지 우리와 같이 즐거움과 슬픔을 느낄 수 있는 하나다’라고 생각하며 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편견을 바꿀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도와가며 생활하고 안 좋은 인식과 고정관념이 바뀌는 그날까지 우리 모두 함께 노력하자.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는 날까지 모두 함께 도와가며 생활하자!

산문 부문 최우수상

장애인에 대한 내 생각/ 제주대학교사범대학부설중학교 2-3 홍수정

장애인인식교육을 받고 나면

“아… 장애인들 많이 도와줘야지”

하지만 거리를 걷고 놀러 다니다가 생각해보면 수많은 장애인들을 그냥 지나쳤구나. 그래도 다른 사람들처럼 벌레 보듯이 쳐다보진 않았잖아? 도와주지도 못했으면서 그런 말을 한다. 우리 할아버지도 고막이 터져서 수술을 받았지만 청각장애진단을 받았다. 들리시기는 하지만 크게 말씀해드려야 알아들으신다.

본인도 불편해하시고 주위에 있는 사람도 불편한 게 장애라는 게 맞다. 그리고 예전에 초등학생 때 애국조회 시간에 비장애인과 장애인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물론 선천적 장애인도 있지만 후천적인 장애인이 않은 것처럼 비장애인도 조금만 해도 사고, 조금만 해도 병으로 몇 등급의 장애는 아니더라도 장애판정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한 여러 장애로 생활에서도 고통을 받지만 사람들의 태도에도 많은 고통을 받는다. 조용히 하고 있으면 안 다가와주고 먼저 다가가면 힘든데 왜 무리하냐? 그러고 쟤 왜 저래 등의 반응이 온다. 장애인들은 가만있어도 욕, 다가가도 욕(물론, 정말 친절한 사람들도 있다!) 자신이 언젠간 장애인이 될 수도 있는 건데 그때를 생각하여 장애인들에게 잘해주었으면 한다!

잘해주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시각장애인이 횡단보도에 서 있을 땐 신호를 알려주고 버스를 기다리면 버스번호를 알려주고 앞의 장애물들을 말해주고 청각장애인에겐 말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수화를 모르더라도 동작으로 알아들을 수 있게 보여준다. 거동이 불편한 분들께는 휠체어를 끌어드리거나 간단한 심부름 해드리기, 말벗되어 드리기 등… 물론 이렇게 써놓은 나도 실천이 잘 안되지만 앞으로는 더 노력하기로 하고… 물론! 주의사항은 있다!! 도와드릴지 물어보는 건 도움 받는 것을 싫어하시는 분도 계시기 때문이고 안내 견을 길들이지 말라는 것은 길들여버리면 안내건 주인이 제대로 된 안내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주의 한 두 가지를 꼭 명심해두고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들자!!

산문 부문 최우수상

편견과 차별의 벽을 허물어 / 제주대학교사범대학부설중학교 2-3 양영주

요즈음 우리나라 사회의 사람들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라고 단정 지어 그들을 낯선 눈빛으로 바라보고 불쾌한 생각을 갖고,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서슴없이 하는 행동들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2011년 9월 22일 개봉하였던 영화 ‘도가니’를 나는 작년에 국어선생님의 추천으로 공지영 작가의 책으로나마 보게 되었다.

도가니는 장애 학생들의 성폭력 실화를 주제로 다룬 책인데, 그 이야기를 읽은 독자들이 분노하였던 가장 큰 이유는 사회적 약자로써 보호를 받아야 하는 장애인의 대한 성범죄가 아이들이 믿고 교육을 받는 교육기관에서 벌어졌다는 점과, 법의 공정한 심판조차 없었으며 언론 및 사회에서 은폐 되었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사회적 지도층이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을 보호하기는커녕, 교육계의 비난여론을 우려해 언론과 경찰을 매수하여 피해를 악화시킨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또한 장애인 성범죄에 대한 사전 예방을 철저히 하고 법에 대한 강력한 벌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쯤에서 ‘차별’과 ‘차이’에 대한 구별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장애인을 배려하고 보호해준다는 것은 그들을 안쓰러운 시선으로 보는 것이 아닌, 그들이 살아가며 사람들과 소통하고, 사회생활을 하는데 에 수월하고, 지장이 없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다. ‘차이’가 절대 ‘차별’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어찌 보면, 장애는 혼혈과 비슷한 처지인 것 같다. 사람들은 이 두 경우를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다. 자신과 조금 다른 것을 틀리다고 생각하기 때문 아닐까? 안타깝게도 그들은 ‘장애를 가지고 있으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라는 마음의 벽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은 오산이며, 하루 빨리 그 벽은 허물어 져야 한다. 우리가 태어나 걸음마를 배우고, 말을 배우듯이 그들도 주위사람들의 격려와 배려, 도움만 있다면 전혀 ‘장애’가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내가 제일 감명 깊게 보았던 영화 ‘말아톤’이 그 대표적인 예로 꼽을 수 있다. 말아톤의 주인공인 윤초원은 자폐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주위사람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마라톤을 해내었다. 이 영화의 감독은 아마 ‘장애를 가졌더라도 그들이 해낼 수 있는 일은 어쩌면 일반인들 보다 더 무궁무진 하다.’라는 것을 전달하고 싶어 했지 않았을까?

장애인들은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지 못하는 것도, 앞을 보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과 방식이 조금 다를 뿐·······.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은 왜 생겨난 것일까? 아마 장애인의 의미와 그들을 대하는 방법에 대한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자는 취지에서 생겨난 것 아닐까?

나는 제작년 말에 오토 다케 히로타다의 베스트셀러인 ‘오체불만족’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책의 저자이자 주인공인 오토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자신의 유년기에서부터 현재까지의 일생을 담았다. 그는 ‘선천성 사지 절단’이라는 희귀병을 가지고 태어났다. 선천성 사지절단이란, 말 그대로 팔과 다리가 없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생김새를 신체적 약점이라 생각하지 않고 심지어 ‘초개성’이라 표현 하였고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

이 책에서 오토는 한 번도 자신의 장애를 비관하거나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나는 만약 장애로 인해 고통 받고 자신을 비관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꼭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다. 장애는 절대 삶을 살아가는데 에 걸림 돌이 되지 않는다. 지금 당장 주위를 둘러보아 장애를 가져 힘들어 하는 이가 있다면, 위로의 말 한마디와 따뜻한 손길을 건네주는 건 어떨까? 아마 그 사람에겐 작은 관심 하나하나가 작아져 가는 마음을 힘차게 일으켜 세워주는 큰 원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앞으로 우리는 장애인 복지 시설과 교육기관을 한층 더 확대시키고, 장애인 보호법을 강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장애를 이해하고, 편견과 차별의 벽을 허문다면 분명 우리나라와 전 세계의 미래는 더더욱 밝게 빛나게 될 것이다.

산문 부문 최우수상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하여 / 충남 당진중학교 3-2 방효정

“효정아, 이 것 좀 해주라.”

“아, 싫어. 언니가 해.”

그러면 옆에 계시던 할머니는 “네가 좀 도와줘라. 어떻게 된 애가 항상 그러니?”

‘아, 할머니의 저 말은 언제나 나를 화나게 하네.’

우리 언니는 지금 고3이다. 다른 고 3들이라면 입시준비에 항상 바쁘겠지만, 언니는 늘 한가하다. 지능이 고작 세, 네 살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언니를 볼 때 마다 ‘정상인이라면 어땠을까’ 라는 측은함도 있지만, 가끔은 짜증이 날 때도 있다.

몇 주 전이었다. 밤에 있는데 언니가 잠 든 사이 아빠가 나를 불러서 야단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내가 언니에게 대놓고 장애인이라는 단어를 쓴 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억울했다. 전 날 저녁쯤 이였다. 내 방에서 수학을 풀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머리에 퍽하고 충격이 가해졌다. 또 언니다. 언니는 가끔 아무 이유 없이 느닷없이 나를 때릴 때가 있다. 언니 딴에는 애정표현이겠지만, 나는 기분이 몹시 나쁘다. 아프고 짜증나서 소리를 버럭 질렀더니, 그 에 맞서 언니는 한 대를 더 때린다. 급기야 우리는 욕을 하고 싸움으로 번져버렸다.

늘 있는 일이지만 그 날은 할머니까지 나서서 언니 편을 들며 “언니한테 하는 것 좀 봐. 더러운 성질 또 나오네.”라고 하시면서 나만 혼냈다. 억울하고 짜증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언니에게 몹쓸 말을 해버렸던 것이다. 근데 이 일이 하루가 지난 다음날에서야 언니는 갑자기 엄마와 아빠에게 울면서 일러바쳤던 것이다. 결국 그 날 저녁 화가 무지하게 많이 나신 아빠께서 엄청 서럽게 날 혼내셨다. 몇 시간 후엔 엄마까지…. 휴…. 그런데 그 때 내 마음에 비수처럼 박힌 말이 있다. “너한테 바라는 거 없어. 네가 뭘 하든 엄마 아빠는 소연이 먼저 보내고 죽을 거야. 어차피 네가 커서 언니 거둘 것도 아니잖아.”

평소에도 엄마, 아빠는 언니의 장래에 대해서 고민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지만, 이 날 만큼은 더욱 더 절실해보였다. 사실 확률로도 언니보다 엄마, 아빠가 먼저 세상을 떠나실 테니까 그럴만하기도 하다. 나는 이런 상황이 싫고, 반응이 싫어서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가족 이야기를 자제하는 편이다. 어쩌다 언니 이야기를 알게 되면 친구들은 ‘에이, 거짓말.’ 이라거나 ‘아…“ 하고 입을 다물기도 한다. 혹은 가끔가다 동정심 또는 지나친 배려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도 사실은 부담스럽긴 마찬가지이다. 그러고 보면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장애인에 대하여 그저 불쌍하다거나 외계인처럼 대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뭔가 나름 그들도 잘 할 수 있는 부분도 있을 것이고, 오히려 뛰어난 부분도 있을 텐데 그런 것은 보려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보니 장애인에 대한 미래에 대해서도 할 수 있는 일이나 비전이 그다지 밝지 않은 것 같다. 단순한 기능직이나 시혜적 태도뿐이라 자립할 수 있는 여건이 어렵다. 우리 언니만 해도 다른 부분은 약하지만 숫자 암기능력은 탁월하다. 그러나 이것을 언니의 장래와 누가 어떻게 연관 지어 줄 수 있을까? 우리는 가족이니까 힘닿는데 까지 돌보아주고 감싸주겠지만 언니가 과연 성인으로서 한사람의 몫을 해내지 못하고 보살핌만 받는다면 그 때도 행복할까?

우리는 가끔 장애를 가졌지만 이것을 극복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례를 접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 희아나 영화 <말아톤>에 나오는 초원이, 장애인 수영선수 김진호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들이 비장애인처럼 현역에서 은퇴하여도 과연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예전보다는 장애인 복지정책이나 제도, 대중들의 인식이 많이 개선되었으며 더 좋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하다. 길거리에 턱을 없앤 것과 점자판이나 유도 블록 또는 소리 나는 신호등이 설치되어 있는 곳도 많아졌다. 그리고 중증 장애인을 위해서는 도우미 제도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앞서 해결해야할 문제는 아직도 남아있는 장애인에 대한 동정 또는 편견이다. 무조건 도와줘야 하고 아무 것도 못 할 거라는 생각은 ‘장애인이기 때문에 자긍심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좀 더디더라도 무언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주고 활용할 수 있도록, 그래서 자립할 수 있도록 길을 찾아주어야 한다. 비장애인도 하기 싫은 인형 눈 붙이는 일을 장애인이라고 해서 좋아할 리가 없지 않은가! 물론, 이것은 시간도 많이 걸리는 일이고 일손도 부족하고, 재원 마련도 쉽지 않을 것이다.

시작은 반이라고 했다. 일단 우리사회가 사회복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니 조금만 더 촘촘하게 계획을 세워보자. 우리에겐 인간으로서 약자에 대한 측은지심도 있고. 이를 적극적으로 펼쳐나갈 ‘IT강국’이라는 인터넷 매체도 있다. 뜻을 알리고, 사람들의 지혜를 모은다면 장애인의 내일은 오늘보다는 조금 더 나은 내일이 될 것이며 모레는 내일보다 조금 더 나은 날이 될 것이다. 숫자암기를 좋아하는 우리 언니가 꿈을 펼칠 수 있는 내일과 모레, 그리고 미래가 되길 소망해본다.

산문 부문 최우수상

마음을 여는 한마디 “같이 하자” / 충북 음성중학교 2-1 이장우

봄이다. 새로운 새싹이 움트고, 따뜻한 바람이 불ㄹ어 몸도 마음도 따뜻해지는 봄이 왔다. 아마 원준이를 처음 만났던 것도 2년 전 이맘 때 즈음이었던 것 같다. 원준이의 도우미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선생님의 말씀에 나는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해보겠다고 승낙하였다.

내가 처음에 원준이를 보았을 때 원준이는 장애를 가진 친구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원준이를 알게 될수록, 원준이가 가진 장애로 인하여 원준이가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장애를 가진 삼촌을 보고 자라오며, 장애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곤 하였다. 왜냐하면 현대인의 머릿속에는 ‘장애인은 이상하다’, ‘장애인은 불쌍하다’라는 선입견이 많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많은 장애인들이 차별과 무시를 당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각종 매체를 통해서 접하곤 하였다.

나의 친구 원준이 또한 학교에서 장애인이기 때문에 차별을 당하거나 무시를 당한 경우가 있었다. 중간고사를 앞둔 과학 시간이었다. 과학 실험을 할 때 같은 반 친구들이 원준이와 같은 조를 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단지 장애인, 장애인이ㅣ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같은 조를 할 경우 낮은 점수를 받을 것이라고 많은 친구들이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심한 경우에는 반 친구들이 원준이에게 “야! 장애인 너는 그냥 빠져”라고 상처를 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원준이를 차별하는 것은 과학시간 뿐만이 아니다.

체육 시간에도 모두 모여 축구를 할 때, 미술시간에 조별활동을 할 때 등 모두가 함께 해야 하는 시간에 몇몇 친구들은 원준이를 그냥 무시하거나 아니면 “넌 그냥 빠져, 하지 마”라는 말을 하곤 하였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내 마음이 쿵하고 내려앉기도 한다. 나조차도 마음이 좋지 않은데 당사자는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렇게 원준이가 활동에서 소외되는 일들이 있을 때 마다 원준이에게 “원준아 이거 우리 같이 하자. 서로 도우면 잘 할 수 있어”라는 말로 응원을 해주곤 하였다.

나 역시 원준이와 함께하는 것이 걱정되기는 하였지만 나의 용기를 낸 말 한마디에 그러한 걱정은 이내 사라졌다. 원준이는 다들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일들을 오히려 다른 친구보다 더 잘해 내곤 하였다. 그래서 나는 장애를 가진 친구라 할지라도 다 같이 함께할 때에는 그런 장애를 극복할 수도 있겠다는 깨달음을 가지게 되었다. 다른 친구들 또한 원준이를 일부러 무시하는 경향이 많이 줄어드는 것을 보았다.

또한, 일부러 차별이나 무시를 하지 않아도 의도하지 않은 행동이 오히려 장애인을 차별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는 것 같다. 원준이는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늦어도 혼나지 않고 단체로 벌을 받을 때 제외되는 경우가 있다. 나는 이런 것 또한 원준이를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준이를 차별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원준이도 분명한 우리학교의 학생이고 우리학교의 교칙을 따라야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장애를 가졌다고 혼나지 않고 제외하는 것을 보고 다른 친구들은 부러워한다. 나는 그런 친구들을 보면 참 한심할 때가 있다. 내가 원준이라면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벌을 받지 않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질 것이다. 나는 같은 학급의 구성원으로 무엇이든 함께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요즘 들어서는 장애인들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 깊숙이 박혀있는 선입견과 편견을 바꾸기에는 아직은 많은 시간이 많이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장애인도 나와 같은 동등한 인권과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여야 한다. 그러한 생각을 기본으로 장애인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이 많이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는 것을 자존심 상해한다고 한다. 때로 내가 먼저 판단하여 원준 이가 스스로 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나는 원준이를 무조건 도와주려고만 하였다. 그럴 때마다 원준이는 거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 자기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장애인을 무조건 도와주려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도와준다면 장애인들도 우리에게 마음을 열고, 비로소 우리는 모두가 행복한 세상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요즘 많이 사람들이 장애인을 도와주고 배려하는 것을 실천하고 있다. 그러나 장애인을 배려하고 도와주는 마음은 현대에 와서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조선 시대 장애인에게는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주었다. 또한 홀로 사는 나이 든 장애인에게는 국가가 일종의 도우미를 보내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는 정말 현명하고 선진적인 제도라고 생각한다. 이것뿐만 아니라 ‘명통시’라는 장애인 전용 기관이 있었다. 명통시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시를 읊어주고 가야금을 연주하게 하였다고 한다. 장애인을 배려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생각은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 같다. 나는 명통시라는 장애인들을 위한 기관이 조선시대부터 있었다는 것을 듣고서 놀랐다. 그 옛날, 우리나라에서도 장애인을 도와주는 선진적인 생각을 한 것이 왠지 모르게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래전부터 장애인들을 도와주려는 제도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옛날에도 장애인들을 많이 도와주었는데 오늘날에는 좀 더 발전된 제도가 많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그런 제도를 뒷받침해줄 성숙한 시민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하였다. 일단 나부터라도 내 주위에 있는 친구 원준이에게 더 잘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원준이 뿐 만 아니라 우리 삼촌에게도, 다른 장애인들에게도 존중과 배려의 자세를 가져야겠다고 다짐하였다.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을 계기로 원준이와 진정한 우정을 쌓고 나아가 다른 장애인 친구들과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주어야겠다. 나의 작은 실천이 커져 세상이 변화되는 멋진 그날을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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