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다 사건은 시설비리로 알려졌지 미군범죄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김형수의 세상속으로

2002년 12월 31일, 나는 광화문 촛불시위 현장에 있었다.

수만의 인파와 뿌연 폭죽 연기 속에서 목발로 서 있었다.

효순이와 미선이를 추모하면서, 두 여중생의 억울한 죽음에 분노하면서 촛불을 들고 서 있었다. 모두들 효순이와 미선이를 잊지 말자고, 그리고 또다시 이러한 미군범죄가 없는 당당하고 동등한 세상을 만들자고 소리 높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속에서 나는 또 다른 미선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또한 이제는 거의 잊혀진 평택 에바다의 미군범죄를 더듬고 있었다.

광화문에서 촛불시위가 시작되고 나서 4번째였다.

참여할 때마다 미군에 의해 죽어간 두 여중생 뿐만 아니라, 에바다 의문사로, 97년 7월 농성 중에 익사체로 발견된 최미선(당시 나이 9세)학생과 강제 결혼을 당하여 최씨 일가의 가정부로 있다가 탈출했으나 다음날 다시 잡혀 구타로 죽은 것으로 알려진 1992년의 오미숙과 1994년에 있었던 곽은미 학생을 혼자서라도 추모하고 기억해 주고 싶었다.

또한 에바다에서 벌어진 미군은 범죄를 이제라도 알려주고 싶었다.

목발을 짚고 광화문에 나서면 무엇이 그리 신기한지 기자들이 몰려 나에게 묻곤 한다.

왜 촛불시위에 오셨냐고, 기분이 어떠냐고 한결같이 같은 질문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외치고 싶었다.

96년에 에바다에서 벌어진 미군범죄를 아시냐고, 에바다 그곳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장애인들의 억울함을 아시냐고 반문하고 싶었다.

96년 11월 27일 새벽, 강제노동과 학대에 견디다 못한 에바다 농아원 학생들은 당시 최성창 이사장의 퇴진과 시설비리 척결을 요구하며 농성을 했고, 12월 학생들이 집회를 주도하던 어느 날 농아원 직원이 학생들의 집회참여를 가로막으며 한 학생에게 "넌 에이즈검사부터 해봐야 한다. 미군때문에 병원 다녀온 주제에 어딜 나서냐"라고 말하면서 미군의 농아원생 성폭행사건은 세상에 알려졌다.

96년 6월 미성년자인 이수철(가명, 당시 15세)군은 평소 알고 지내던 윌리엄스 약 에스 일병(33세, 미 제7공군 소속)을 따라 송탄에 있는 미군부대로 들어갔다. 이 군은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농아인이었다. 그는 평소 햄버거를 사주며 부대 구경시켜 주었던 윌리엄스를 따라나섰다. 윌리엄스는 수화를 할 줄 알아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미군이었다.

그 날, 이 군은 부대 내 윌리엄스의 숙소에서 자게 되었다. 이 군이 침대에 눕자 잠시 후 윌리엄스는 이 군의 속옷을 벗기고 그의 아랫도리를 만지기 시작했다. 이 군은 싫다고 저항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이어 윌리엄스는 이 군을 강제 추행하였다.

성추행은 다른 아이에게도 이어졌다. 햄버거를 사주며 자선을 가장한 윌리엄스의 추악함은 지난해 9월 28일 또다시 나타났다. 김민호 군(가명, 당시12세)과 고철시 군(가명, 당시 12세)을 같은 방법으로 꾀어내어 자기 숙소로 데려갔다.

윌리엄스는 어린 농아학생들에게 목욕을 하라고 시켰다. 윌리엄스는 목욕을 하고 있던 아이들에게 다가가 김 군에게 바닥에 엎드리라고 시키고 나서 성폭행하였다. 이어 윌리엄스는 오 군을 똑같은 방법으로 짓밟았다. 10월 27일, 김 군을 다시 불러내어 또다시 파렴치한 범죄를 저질렀다.

이후, 97년 3월 12일 2시, 수원지방법원 208호에서 준강제추행 및 미성년자 의제강제추행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윌리엄스 일병의 1차 재판이 열렸다. 이 재판은 미군 범죄사상 이례적으로 미군 측으로부터 재판권을 넘겨받아 한국 사법부가 재판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최성창 에바다복지회 전 이사장은 복지회에 미군들을 불러들여 보여주기 행사하길 즐겼고 이런 미군범죄를 방조하기에 이르렀다.
윌리엄스는 변호인 신문에서, "김 군이 나에게 함께 샤워할 것을 제의했으나 거절했다. 그러자 김 군이 오 군과 함께 샤워를 시작했다. 나는 내가 손님을 소홀히 대접하는 것 같아 그들과 함께 샤워를 했다.

그러자 김 군이 계간을 하자고 하였다. 나는 어린아이들의 말(수화)에 충격을 받았으나 김 군의 제의를 허락했다. 그러나 김 군이 나의 항문에 성기를 삽입한 것이지 내가 그들의 항문에 성기를 삽입한 것은 아니다." 라고 천연스레 증언하였다.

96년, 11월 원생들을 검진했던 송탄의 한 병원 의사는 "당시 경찰이 원생 2명을 데려와 그들의 항문을 치료해 달라고 하였다. 경찰이 말하기를 이들 학생들이 미군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했다"고 전했다.

윌리엄스는 97년 7월 23일 1심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윌리엄스는 이에 항소했으며 97년 12월 16일 수원지법에서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징역 1년형, 2년간 집행유예를 선고받아 실형은 받지 않았다.

무죄선고를 받지 않아서 일까? 아니면 미군의 농아원생 성폭행 사건이 가져올 사회적 파장과 농아원의 관리소홀 문책에 대한 부담이 되어서 일까? 이 사건은 조용히 검찰과 재단은 한통속이 되어 사건은 은폐되었다. 경찰은 초기부터 사건이 기사화되는 것에 심한 우려를 표명했다.

사실 에바다 사건은 사회복지시설비리로 세상에 많이 알려졌지, 미군 범죄로 알려지지는 못했다. 그래서 사건이 알려진 이후에도 지금의 범국민적인 촛불시위와는 달리, 이것에 대한 직접적인 문제제기는 거의 없었다.

95년 일본 오키나와 주일미군에 의한 성폭행사건이 발생했을 때, 당시 미국은 '주일미군 반성의 날'을 선포하고 클린턴 대통령까지 나서 유감을 표명하며 일본국민들에게 사과를 표시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두 명의 아리따운 여중생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도 사과는 거녕, 촛불시위는 오히려 폭도로 매도당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에도 미군에 대해 뿌리 깊은 불신과 저항의식을 지닌 평택 주민들은 에바다에 대한 미국의 현실은 지역 주민에게 에바다 문제가 단순한 장애인 시설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 전체의 중요한 문제임을 일깨워 주었다.

그래서 에바다는 지역의 조그마한 민원이 아니라 지역운동의 중요한 잣대가 되었다. 물론 이것은 주한미군범죄 근절을 위한 운동본부의 주도적인 역할이 있었다.

뒤늦게 에바다 사건을 접하고 많은 대학생들이 에바다 투쟁에 결합을 했지만 이 사건을 전사회로 널리 알려 내지 못했다. 물론 그 때는 Ablenews와 같은 대안 언론이 없었지만.

물론, 96년, 97년 그 때와 비교해 보면 지금의 촛불시위는 가히 혁명적이다. 그러나 그 때 에바다 학생들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쓴 편지, "대통령 할아버지 꼭 우리의 눈물 흐르는 호소를 들어주셔서 혹시 우리를 무시하는 사람이 있어도 우리 장애인을 도와주는 대통령이 있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세요." 라는 메시지는 바로 지금의 촛불 시위가 말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또한 우리가 기대했던 노무현 차기 대통령도 그런 희망을 여지 없이 짓밟고 있다.

문민정부의 김영삼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미국은 지금이나 과거나 한국의 자주권이나 주민들의 생존권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사회복지 체계 역시 왜곡시킨 책임을 피할 수 없다.

6.25 전쟁으로 장애인을 대량으로 생겨나게 했고 미국의 구호물자와 구호단체가 들어와 시혜적이고 서비스 위주의 정책을 시행했다.

그리고 70년대에 들어와 박정희 정권이 경제 발전을 가속화하자 외국의 특히 미국의 구호단체들이 더 이상 우리나라에서 활동할 명분을 잃게 되었다.

정권의 정당성 획득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책임 회피라는 일거 양득의 목적을 달하길 원했던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군사 정권은 '책임은 민간에게 지원은 국가가'라는 시설 중심의 사회 복지체계를 만들어 냈다.

▲미군범죄와 미국의 오만함이 두 여중생의 죽음을 통해 우리 사회 모두의 문제가 되었듯이, 장애인 문제도 우리 모든 이의 문제 이어야 한다
에바다 문제가 풀리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런 역사적 시설 설립 과정에 기인하며 그 과정 역시 그 곳에서의 미군범죄 발생의 원인을 제공했다면 너무나 큰 논리적 비약일까?

에바다 복지회는 미국인 더그라스 크레이머가 1964년 고아들을 수용하는 '사회복지법인 어린이보육원'을 평택군 팽성면에 설립 것이 전신이다. 1974년에 이사장이 맥신스트로 브릿치로 바뀌고 문제가 되었던 최성창 목사는 이때 이사로 참여했다.

1982년, 최성창 목사는 맥신스트로 브릿치가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기증한 약 6,000평의 땅과 전국 에바다교회에서 출연한 2천만원, 기타 기부금 4천만원으로 법인을 재설립, 이사장이 되었다.

그래서 이 때부터 최성창 이사장은 복지회에 미군들을 불러들여 보여주기 행사하길 즐겼고 이런 미군범죄를 방조하기에 이르렀다.

에바다 사건은 이제 해결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지만 장애인 시설내의 비리와 인권유린, 장애인들의 자살과 의문사는 여전히 일어난다.

(의문사위원회에서 조사한 이덕인씨 사건 결과를 알린 장애인 언론이 얼마나 되는가?)

미군이 매설한 지뢰 때문에 수백명의 절단 장애인이 양산되어도 미군은 Sofa 협정에 의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오히려 미국은 한반도를 전쟁의 위기로 몰아 수백 수천만의 사람들을 장애인으로 몰아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이제 그런 사건이 일상화 되어가고 있다.

장애인의 삶은 이동권 투쟁이나 에바다를 통해 알려지고 개선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여전히 장애인 문제는 우리 사회에 사회 문제(Problem)로 사회 의제(agenda)로도 등장하지 못하고 있다.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수많은 사회문제가 토론되고 광화문을 통해, 촛불 시위로 실천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인 문제는 여전히 장애인들만의 문제로만, 일부 진보적인 대학생들의 문제로만 회자되고 있다. 장애인들의 평등함을 위해 통합교육을 공부하는 특수교육과 학생들과 특수교사, 만인의 평등과 인간됨을 실천하는 사회복지학과 학생들과 사회복지사들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고만 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이 우리 사회의 침묵을 조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미군범죄와 미국의 오만함이 두 여중생의 죽음을 통해 우리 사회 모두의 문제가 되었듯이, 장애인 문제도 우리 모든 이의 문제 이어야 한다. 장애인도 우리 사회 구성원이라는 상투적인 문구가 정말 상투적인 것이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이라면!!

이제 우리도 장애인 문제가 모든 문제로 알리고 여전히 시대의 어둠속에 있는 장애인들을 밝힐 촛불을 켜야 한다. 우리도 반딧불이 되어 장애인과 함께 우리 사회에 전세계에 힘있게 밝혀야 한다.

광화문이든, 어디든 AbleNews가 이런 촛불 시위에 수백만 페이지 뷰를 기록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에바다나 이동권 문제 뿐만 아니라 장애인 교육과 편의시설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의 일반시민들이 붉은 악마들이 아버지가 아이를 목마 태우고 우리의 광장에 나올 수 있게 하는 AbleNews가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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