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권오진씨의 영정사진.ⓒ에이블뉴스

19일 낮 12시. 인천 부평구에 위치한 인천가족공원 승화원 16번 분향소에 故 권오진(지체1급, 향년 47세) 씨의 영정사진이 올려졌다. 그 뒤로 권 씨와 함께 인연을 맺어온 중증장애인과 활동가들이 오열하며 그를 떠나보냈다.

혈기왕성한 20대 중반, 뺑소니 사고 이후 중증장애인이 된 권 씨는 가족들의 짐이 되기 싫어 스스로 가평 꽃동네에 입소했다. 이후 2011년 탈시설하며 인천 계양구에서 자립생활을 시작했다.

‘장애인들이 자립생활의 길을 걷도록 인도하고 싶다’던 권 씨의 꿈은 7년만에 스러졌다. “암만 아파도 내 곁에 있었으면 좋았을 껄” 여동생 회진 씨는 간 발의 차로 그의 임종도 지켜보지 못 한 것이 평생 한으로 남았다.

권오진 씨의 생전모습, 활동지원 24시간 보장을 위해 투쟁해왔다.ⓒ인천장애인차별철폐연대

■사고→시설→자립, 목말랐던 ‘활동지원 24시간’

권오진 씨는 지난 1996년 7월, 뺑소니 사고로 경추 4~7번이 손상되며 척수장애인이 됐다. 상계백병원 6개월 입원, 국립재활원 3개월 재활훈련을 거친 이후부터는 쭉 집에서만 생활해왔다.

그러다 가족에게 짐이 되기 싫다며 2002년 스스로 가평 꽃동네에 입소했던 권 씨. 하지만 그 곳에서의 생활은 지옥이었다.

그와 7년간 인연을 맺었던 활동지원사 김훈(49세,남)씨는 “오진 씨가 시설에 있었던 이야기를 많이 해줬다. 시설 직원들에게 한 번 찍히면 심할 경우 일주일 동안 휠체어를 안 태워주기도 했고, 나이 많으신 장애인에게 직원들이 험하게 말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했다”면서 “그 때마다 분노했고 문제를 제기해서 시설에서 요주인물로 찍히곤 했다”고 회상했다.

권 씨는 시설 생활 중 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와 인연을 맺어 2011년, 시설에서 나왔다. 민들레센터 체험홈을 시작으로 2014년에는 독거로 생활한 것.

자립 후 활동지원 24시간이 절실했던 권씨는 인천시청을 상대로 투쟁한 끝에, 결국 그 해 11월 24시간 활동지원을 쟁취하며 수혜자가 됐지만 2016년 1월 박근혜 정부시절 지자체 사회보장사업 정비지침에 따라 활동지원 24시간이 중단되고 말았다.

그 대안으로 내놓은 야간 순회 서비스는 권 씨 생활의 리듬을 깨뜨렸다. 욕창이 심해 1시간에 한번씩 체위변경을 해줘야 하지만, 야간 순회 서비스는 2시간씩의 텀이 존재했다.

2시간 동안 홀로 남은 권 씨의 체위를 변경해줄 사람은 없었고, 새벽시간 벨을 누르는 야간순회로 생활에 리듬 또한 깨져버렸다.

활동지원사 유민상(49세, 남)씨는 “욕창이 심했다. 1시간 반 마다 해줘야 하고, 야간에는 1시간마다 해줘야 한다. 하지만 야간순회가 쭉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2시간씩 공백이 있어 욕창이 더 심해졌다”고 토로했다.

김훈 활동지원사도 “오진씨는 침대에 누우면 움직이질 못하기 때문에 체위 변경을 해줘야 하고, 소변통도 항상 비워줘야 한다”면서 “한번 나갔다오면 욕창 부위가 심해져 여름에는 119를 부를 정도로 상황이 악화된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권오진 씨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는 활동가들.ⓒ에이블뉴스

■탈시설 7년, 휠체어 벗어나 훨훨 날길

결국 오진 씨는 지난 5월 5일 오전 6시, 호흡곤란으로 근처 한림병원에 실려갔다가 길병원, 의정부 요양병원을 거쳐 지난 17일, 한달여만에 폐혈증 악화로 숨지고 말았다.

그의 여동생 권회진 씨는 “길병원에 입원했을 때 소변이나 욕창쪽으로 균이 침투한 폐혈증이라고 진단내렸고, 최종 사인도 그렇게 내려졌다”고 설명했다.

선글라스 낀 모습이 멋있었습니다. 제게도 선글라스 하나를 선물해주셨지요, 사회는 색안경을 낀 시설들로 여전하지만 보다 밝은 세상이 될 수 있도록 민들레와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경진-

오빠 살아있을때 잘해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고 좋은 곳에 가서 편히 쉬기를. -명자가-

시설도 없고 장애인도 평등하게 살 수 있는 곳에서 편안하게 쉬세요. -재근이가-

권 씨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를 보낸 활동가들.ⓒ에이블뉴스

권 씨는 생전 활동지원 24시간이 필요하다고 항상 말해왔다. 욕창이 나으면 전국을 돌아다니며 장애인들에게 ‘시설보다 자립생활이 좋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했고, 시설의 문제에 대해 항상 분노하고 싸웠다.

24시간 활동지원이 끊겼을 때는 세상 무너지듯 절망했지만, 한겨울 시청 앞에서 1인시위까지 나서기도 했다.

민들레야학 박길연 교장은 “오진이의 꿈이 자립생활 하고 싶어하는 모든 장애인에게 그 길을 인도하는 것이었다. 오진이가 못다 한 꿈, 우리가 함께 해야할 것 같다”면서 “오진이를 보내는 것이 힘들다”고 오열했다.

활동지원사 유민상 씨는 “9개월동안 활동보조를 했는데, 정말 정이 많고 사람을 배려해주는 분이셨다. 좀더 잘해줄걸 하는 생각이 든다”고 눈물을 흘렸다. “오진아, 그곳에선 마음껏 날아다녀.” 함께한 활동가들도 ‘맏형’ 오진씨를 떠올리며 그의 명복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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