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해방을 외치던 피 끓던 386세대 장애해방운동을 기억하십니까? 국내적으로는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과 장애인올림픽 개최를 전후로 분배 없는 성장우선정책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민주화와 함께 본격화되기 시작하면서 장애운동도 시작됐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로 빚어지는 각종 편견과 차별의 문제는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80년대를 기점으로 사회구조적 문제임을 부르짖은 청년장애운동가들. 지난해 말 발간된 ‘386세대의 장애운동사’는 이런 운동가의 인터뷰를 통해 초창기 장애운동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에이블뉴스에서는 ‘386세대의 장애운동사’ 속 장애운동 역사를 연도에 맞춰 3편에 나눠 연재한다. 마지막은 1999년부터 현재까지의 ‘장애운동의 분화와 확산’이다.

일본에서 개최된 자립생활 국제세미나.ⓒ386세대의 장애운동사

■“먹고 싶을 때 먹자” IL의 강력함=교육, 취업 등의 영역에 국한되있던 기존의 장애운동. 중증장애인은 그 안에서조차 소외됐다. 당장 자신이 입고 싶은 옷을 입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싶을 때 의존하기 싫었다. 그런 그들에게 IL(Independent Living, 자립생활)은 강력함 그 자체일 수밖에.

IL이 활성화되기 시작한 계기는 1997년 10월, RI세계대회가 열린 롯데호텔에서다. 당시 참석한 일본 휴먼케어협회의 나카니시 대표가 한국소아마비협회 송영욱 이사장과 회담하면서 본격화된 것.

이날 회담에서 나카니시 대표는 송 이사장에게 “IL을 한국에 알리기 위한 사업을 함께하자”제안했고, 송 이시장이 정립회관의 사업의 파트너로 추천, IL이 활성화된 계기를 만들게 됐다.

이후 정립회관 직원들이 일본 연수를, 나카니시 대표가 한국 세미나, 동료상담집중강좌를 펼쳤다. 1998년부터 2000년까지 3년 동안 IL이 전파된 것.

파급력도 컸다. 중증장애인에게 IL은 ‘강력’ 그 자체였다. IL운동을 통해 자신들이 이제 시설에 들어가지 않고 활동보조를 받으면서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보게 된 것이다. 특히 2000년 이후 이동권 운동에 핵심으로 활동하며 더욱 급속히 확산됐다.

IL운동의 가치는 ‘자기결정권에 의한 자기 삶을 스스로 통제한다.’ 그를 통해 인권을 실현한다고 보고 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싶다는 중증장애인의 기본적인 인간의 욕망을 자극한 것이다.

IL이 활성화 된지 15년, 전국의 자립생활센터는 200여 곳에 이르며 지역사회로의 발걸음을 함께 하고 있다.

하지만 한계점은 아직도 있다는데. 어느 운동이든지 운동을 개인적인 치부의 수단으로 활용했을 때 운동력은 약해지고 망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센터 소장이 운동을 하지 않고 출세나 돈만 버는 메커니즘으로 IL운동이나 IL센터를 활용한다거나, IL운동이나 장애운동의 경력을 정치적이나 개인적인 영달을 위해 누린다는 것. 이는 경계해야 할 점이다.

또 현재 IL운동가들이 지적장애인, 정신장애인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 장애운동이 인정받고 건강성을 유지하기 위해선 더 중증이라 할 수 있는 지적장애인에 대한 새로운 씨뿌림이 필요하다.

장차법 제정에 장애여성 조항 입법화를 촉구하는 활동가들.ⓒ386세대의 장애운동사

■동아리가 세계화까지, 장애여성의 ‘열정’=여성폭력과 가족폭력 주제의 강의, 한 여성장애인이 손을 번쩍 들었다.

“여성폭력은 이야기하지만 장애를 가진 여성의 이야기가 왜 없느냐”고 물은 것. 그 강사는 씨익 웃으면서 “그런 의문을 가졌으니 장애여성 모임을 한 번 해봐라”고 말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 장애여성모임. 1994년 12월4일 현 장애여성공감 배복주 대표, 당시 장애인복지신문사 권효혜 장애여성 기자, 당시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박옥순 간사, 그리고 장애여성문화공동체 김미연 대표이사까지. 총 4명이었다.

이후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동아리 형태로 ‘빗장을 여는 사람들’이란 모임으로 발전했다. 같은 삶의 경험을 가진 장애여성들이 만나서 서로의 이야기를 푸는 단순한 모임으로 시작된 것. 나의 이야기가 너의 입에서도 나오고, 너의 이야기를 내기 하고 그 자체로 서로 힘이 됐다는데.

하지만 장애인단체 하부구조의 동아리 정도로 운영을 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이후 한국여성장애인연합을 사단법인으로 만들었다. 또 한편으로는 ‘빗장을 여는 사람들’ 출신 젊은 운동가들, 여성학 전공의 활동가들이 결합, 독립적인 장애여성 운동을 시작하게 됐다.

사회적으로 힘을 얻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다. 장애여성에 대한 성폭력과 가정폭력이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며 경악할 두 개의 폭력사건이 발생한 것.

하나는 강원도에 지적장애여성이 지적장애남편에게 시집왔는데 임신을 해왔다. 알고 보니 이 여성이 살았던 동네에 모든 남성들이 이 여성을 성폭력 대상으로 ㄴ삼은 것이다. 때문에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른 채 시집을 왔던 사건이다.

다음은 군포에서 살던 40대 뇌병변 장애여성의 일상은 남편의 학대였다. 결혼생활 내내 폭력 속에 살던 그녀는 우발적으로 남편을 살해하고 만다. 여성계가 힘을 합쳐 이 여성을 정당방위로 인정해달라고 외치며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다줬다.

이후 장애여성 모성권이 자연스럽게 지지받게 되며 인식확산까지 그 성과는 컸다. 복지부는 임신출산지원 프로그램 성격의 예산을, 여성가족부는 장애인성폭력상담소를 지역에까지 설립하게 된 것.

그 힘을 보태 한국여성장애인연합이 복지부 등록 단체가 되며 전국 조직화, 운동성이 강한 장애여성공감과 장애여성문화공동체 등 다양한 성격의 당사자 단체들도 만들어졌다. 이 모든 것이 2000년부터 2007년 사이 7년간 이뤄진 일이라면 믿을 수 있을까.

물론 가장 큰 성과는 장애인차별금지법 속 장애여성 조문을 만들어 낸 점이다. 장차법 제 3장에는 장애여성과 장애아동의 내용이 담긴 것. 이를 계기로 같은 시기에 진행됐던 UN장애인권리협약에 장애여성 조항으로 이뤄졌다.

장애여성운동이 시작될 당시 장애계는 ‘콩은 하나인데 그 것마저도 반쪽씩 나눠먹어야 한다’는 상황이었다. 장애계와 여성계 양쪽으로부터 지평을 넓히는데 어려움이 있던 장애여성장애인들, 그들은 열정과 추동력으로 답했다. 현재도 그들은 장애여성 인권을, 세계 장애여성과의 교류를 이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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