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해방을 외치던 피끓던 386세대 장애해방운동을 기억하십니까? 국내적으로는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과 장애인올림픽 개최를 전후로 분배 없는 성장우선정책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민주화와 함께 본격화되기 시작하면서 장애운동도 시작됐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로 빚어지는 각종 편견과 차별의 문제는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80년대를 기점으로 사회구조적 문제임을 부르짖은 청년장애운동가들. 지난해 말 발간된 ‘386세대의 장애운동사’는 이런 운동가의 인터뷰를 통해 초창기 장애운동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에이블뉴스에서는 ‘386세대의 장애운동사’ 속 장애운동 역사를 연도에 맞춰 3편에 나눠 연재한다. 두 번째는 1990년부터 1998년까지의 ‘장애해방을 향한 청년운동’이다.

정립회관 시설비리 척결을 위해 점거농성집회를 하는 서장청연 활동가들.ⓒ386세대의 장애운동사

■첫 ‘직업 운동가’의 탄생=대학생과 비대학생들 혼합조직으로 친목이 중심이던 울림터. 1990년 전후로 졸업이 다가올수록 장애운동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스스로를 ‘직업적 운동가’로 얘기하는 이들이 늘며 새로운 조직 결성의 욕구가 인 것.

바로 서울장애인운동청년연합회(이하 서장청연)의 탄생이다. 서장청연은 장애계 처음으로 직업적 운동가들이 만들어진 점이 특별하다.

서장청연의 결성은 전국조직에 대한 상을 명확하게 가졌지만 1년 정도의 짧은 막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전국연합 조직 결성에 앞서 준비위 모임정도라고 보면 된다. 그럼에도 전국조직화라는 목표와 청년운동의 방향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 계기를 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투쟁은 확실했다. 90년 여름 진행됐던 시설운영의 민주화와 비리척결을 위한 정립회관 점거농성투쟁이 그 중 하나다.

이때 서정청연은 황연대 관장과 정은배 상임이사의 퇴진, 감사실시, 정립회관 발전특위 구성 등을 요구했다. 뜻을 관철시키기 위한 45일간의 긴 투쟁을 벌이기도.

농성투쟁의 결과물로는 이사장과 정은배 상임사가 퇴진했고, 정립회관 발전특위가 구성된 점이다. 특히 이 투쟁은 다른 복지시설들까지 시설운영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를 안겨주기도 했다.

민주노총과 공동주최한 장애인의 노동권 쟁취를 위한 걷기대회의 출정식을 마치고 종로3가 차도로 행진하는 모습.ⓒ386세대의 장애운동사

■‘노동권’ 부르짖다…노들야학 탄생=친목조직에서 진정한 장애운동으로 발돋움한 서장청연.

1991년 4월13일 전국적 조직인 장애인운동청년연합회(이하 장청)으로 발족했다.

이후 전국적 친목모임 성격이었던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이하 장한협)와 공감대를 형성해 1993년 통합하며 2년간의 활동의 막을 내린 장청.

장청의 슬로건은 장애인기본법 쟁취, 중증장애인연금법 제정, 장애인고용촉진법 개정, 특수교육진흥법 제정, 장애인주거권 획득 등 총 4가지였다. 당시 구호는 “대중 속으로”.

장청은 시설민주화를 위한 투쟁 외에는 뚜렷한 활동을 보여주진 못했지만 장애운동의 명맥을 유지했다는 평가다. 소수의 의식 있고 선도적인 장애청년들 중심의 장애운동이었던 것.

특히 장청은 장애인 노동권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민주노총과 연대해 장애인의 날인 4월20일 범국민장애인결의대회를 펼쳤고, 단협안에 장애인고용을 담았다.

장애인고용 2% 달성을 결국 이루진 못했지만 노동권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기억할 만 하다. 또 1992년 노들야학을 만들었다는 것도 하나의 성과로 남는다.

■장애운동 ‘판’ 만든 전장협=현장 중심의 대정부 투쟁을 전개한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이하 전장협). 당시 장애운동의 이념과 실천력으로 무장한 장청과 친목모임의 장한협이 새롭게 뭉친 전장협의 시너지는 어마어마했다.

1993년부터 1998년까지 이념무장, 실천력 담보, 다양한 프로그램 등을 통해 현장 중심의 투쟁을 전개했던 전장협은 활동가들을 양성하고 실천력을 확대 재생산하는 결과를 낳았다. 시민운동단체와 연계한 투쟁을 이끌었던 유일한 장애대중조직이기도 하다.

이들의 최대 이슈로는 노동권과 교육권 확보. 장애인고용촉진대회를 하며 처음으로 종로 차도를 막고 대규모 시위를 펼쳤다. “장애인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아보자”라는 생존권리에 대한 부분을 갖고 사회적 이슈를 만들어냈다. 장애인노점분과 조직을 통해 안정적 경제활동을 요구하기도.

교육권 확보를 위해서는 투쟁과 더불어 노들장애인야학과 방과 후 장애아동 공부방을 운영했고, 특수교육과 대학생들과 함께 ‘어깨동무’라는 월간지를 발행하기도 했다. 또 무료도서대여 사업을 했던 ‘새날도서관;,’일요운동회‘ 등을 진행했다.

이처럼 전장협은 장애운동을 할 수 있는 ‘판’을 만들었단 점에서 의미가 크다. 운동의 필요성과 운동방법을 공유하고 투쟁하며 새로운 활동가들을 끊임없이 발굴한 것. 또 시민단체와의 연대와 공동투쟁을 통해 장애운동의 당위성과 활동성 두 마리 토끼를 잡아냈다.

하지만 문제는 ‘재정’이었다. 장애운동만 직업적으로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활동가들을 양성했어야 했지만 수입이 없었다. 몇몇 사람의 사재에 의존하다 존폐위기에 빠지기도 했다는데. 결국 열악한 재정이 전장협의 발목을 잡았다.

그럼에도 투쟁성 전파와 확산에 앞장섰다는 점에서 전장협은 장애계에서 오랫동안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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