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각장애인에게 손은 일반인들과는 달리 매우 중요한 의사소통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산업재해로 손을 다쳐도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사진 속의 손의 주인공은 서울농아인협회 이영아 수화통역사. <에

■청각장애인 인권침해 얼마나 심각한가

최근 국가인권위원회가 인권의 날 기념식을 열며 수화통역사를 제대로 배치하지 않아 청각장애인들의 인권을 침해한 사태가 발생한 바 있다. 이 사건은 우리 사회가 청각장애인들의 인권에 대해 얼마나 무감각한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계기가 됐다. 이러한 현실에서 청각장애인들의 차별 해소와 인권 보장을 위해 청각장애인인권센터가 문을 열었다. 15일 센터 개소를 기념해 열린 세미나에서는 청각장애인들의 인권 침해 실태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토론됐다. 청각장애인 인권 현실을 짚어봤다.

터무니 없는 산재보상 기준

지난 1992년 6월 A업체에 취업해 일하고 있던 청각장애인 김수미(가명)씨는 작업 공정대로 일을 최종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기계 밑을 청소하다가 그만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빠르게 회전하는 기계에 옷소매 밑자락이 말리면서 손목 전체가 끌려 들어가고 만 것이다.

김씨는 안간힘을 다해 버티면서 소리를 질러 주위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기계 소음에 묻히고 말았다. 약 20분 후 마침 그곳을 지나던 작업반장의 눈에 띄어 기계 작동을 멈췄지만 이미 그녀의 손가락은 2개나 절단된 상태였다.

회사 측에서는 그녀의 절단된 손가락을 미처 챙기지 못해 병원에서는 절단된 상태 그대로 수술을 시행했다. 당시 회사측에서는 “너무 급박해 잘린 손가락을 찾을 생각도 못하고 병원에 급히 데리고 오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할 뿐이었다.

심각한 문제는 2달 후 치료가 완료된 후 보상문제와 관련해 발생했다. 회사측은 피해자측에 일반인 기준 그대로 적용해 산재보상금을 지급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피해자측은 청각·언어장애인의 언어는 손으로 표현되는 수화이기 때문에 눈은 청각·언어장애인의 귀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과 같고, 손은 입을 대신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지만 먹혀들지 않았다.

당시 사건에 대한 수화통역을 맡았던 북광주수화통역센터 이경례 실장은 15일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열린 청각장애인인권센터 기념 세미나에서 “비장애인인 그들에게 있어서 손가락 두 개정도 잘린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청각·언어 장애인에게 있어서 손은 손으로서의 역할 외에 자신의 의사표현을 손으로 해야 하기에 얼마나 더 소중할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이 실장은 “이와 유사한 사건이 고용 현장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으나 청각장애인의 언어수단인 손에 대한 사회의 인식은 매우 낮아 청각장애인들이 당연히 누려야할 권리들이 침해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와 같은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청각장애인들에게 ‘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바로 청각장애인에 대한 인권침해는 ‘손’과 관련해, 즉 의사소통과 관련해 발생하고 있었다.

▲ 15일 오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열린 청각장애인인권센터 개소기념 세미나에서는 청각장애인 인권침해 실태가 매우 심각한 수준에 있다고 지적됐다. <에이블뉴스>

“TV도 못보고 영화도 못보고”

현재 우리나라 유선전화 보유가구는 91.6%(통계청, 2002년)으로 일반인들에게는 유선전화 사용에 대한 아무런 불편이 없다. 그러나 청각장애인의 경우는 누구나 다 이용하는 유선전화를 사용할 수 없는 현실이다. 바로 이미 선진국에서는 실시되고 있는 전화중계서비스가 실시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청각장애인들은 TV, 영화, 비디오 등 영상물에 대한 접근권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한국영화나 비디오의 경우 자막서비스가 없어 1년에 한번씩 열리는 장애인영화제에서 몇 편 관람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지난 90년대 중반부터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화통역 방송이 실시됐지만 TV시청률이 낮은 오후 5시 시간대나 낮 시간에 실시되고 있으며, 실시되는 방송물로 방송사마다 주 30분 내외로 제한돼 있다. 지난 99년 2월부터 실시되고 있는 폐쇄회로 한글자막방송은 자막비율이 20%에 불과하다.

영상물에서의 접근권 부재에 앞서 수화통역사도 태부족이다. 한국농아인협회에 따르면 수화통역센터는 2003년 10월 현재 전국 70여개소인데, 이는 정부 추정 청각장애인 16만명(복지부, 2000년)으로 수화통역센터에서 종사하고 있는 수화통역사 1인이 감당해야하는 청각장애인은 1천200여명이라는 계산이다.

이와 함께 고등교육에서의 청각장애인 인권침해도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고 지적되고 있다. 한국농아인협회 이종민 연구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수화통역사 배치가 지원되는 4년제 대학은 전국에서 2곳뿐이며, 노트북 대필서비스를 지원하는 학교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그나마 지난 2002년 개교한 국립 한국재활복지대에서 수화통역사와 전문속기사가 안정적으로 배치되고 있다.

가해자 저지 어려워 성폭력도 위험 수위

잘 드러나고 있지는 않지만 청각장애여성에 대한 성폭력도 위험 수위에 있다. 지난해 한국여성장애인연합 부설 서울여성장애인성폭력상담소에 접수된 여성장애인 성폭력 사건은 총 87건이었으며 이중 6건이 청각·언어장애인이 피해자인 경우였다. 청각장애여성이 성폭력에 취약한 것은 성폭력을 당해도 소리를 지를 수 없고, 싫다고 말할 수 없음으로 가해자를 더욱 저지시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장명숙 소장은 “공개하기를 꺼리는 사건의 특성상 상담소에 접수되는 사례는 빙산의 일각이며, 실질적으로 성폭력이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으며, “성폭력 사건이 법적해결 절차를 밟게 되는 경우를 포함해 청각장애인들은 경찰·검찰·법정에서 의사소통 지원시스템의 부재로 광범위하게 차별을 당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무엇보다 법률상에서 청각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매우 심각한 실정이다. 이와 관련 한국농아인협회 김철환 기획팀장은 “지난 1999년 개정된 장애인복지법에서는 제8조 차별금지 조항과 제20조 정보에의 접근 조항이 신설됐지만, 신설된 8조의 경우 조항이 신설됐다는 의미를 부여하는 그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김 팀장은 “정보격차해소에 관한 법률은 정보통신 접근에 한정돼 있어 청각장애인의 보편적인 정보접근이나 의사소통에 한계를 보이고 있으며, 정보통신접근성권장지침이 정보통신 또는 기기(장비)에 접근을 보장하기 위한 내용들이 ‘권장’으로 돼 있어 지침을 집행해나가는데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할 지 의문이 간다”고 꼬집었다.

방송법의 경우에도, 장애인시청지원 의무규정 대상이 ‘지상파 방송사’에 한정됐던 것이 지난 16대 정기국회때 개정 청원 등으로 ‘방송사업자’로 범위가 확대되기는 했지만 법률에서 방송사업자에 대한 규제사항이 임의조항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다.

이밖에도 영화진흥법, 공연법, 저작권법, 음반법 등 문화관련 법률에서 청각장애인에 대한 차별요소가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 이날 세미나에서는 청각장애인들의 인권침해 실태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청각장애인 당사자들의 노력이 매우 절실하다는 제안이 제기됐다. <에이블뉴스>

"청각장애인 목소리 더욱 높여야"

이러한 청각장애인의 인권침해를 해소하기 위해 청각장애인인권센터 김기범 소장은 ▲청각장애인의 인권침해 문제에 대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한 구체적인 인권실태 조사 ▲정책개선, 복지서비스 확대를 위한 노력 ▲직접적인 정책개선 촉구 외에 인권침해 실태조사를 바탕으로 청각장애인의 인권지침서 제정 ▲일반인들의 장애이해교육 등을 제시했다.

특히 청각장애인 당사자들의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이날 세미나에서 토론자로 참석한 서울장애인연맹 김대성 회장과 한국재활복지대 허일(수화통역과) 교수는 이구동성으로 “청각장애인들의 어려움은 청각장애인들이 가장 잘 안다”며 “청각장애인들의 권리향상을 위해서 더욱더 대외적으로 목소리를 높여야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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