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이명박 대선예비후보의 장애아 낙태 허용발언에 대한 공개사과를 촉구하는 장애인단체들. ⓒ에이블뉴스

먼저 어떻게 불러야 될지 모르겠지만 박기자님이라 부르겠습니다.

쓰신 글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까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이렇게 답변을 드리는 것은, 이것이 박기자님께서 표현하신 ‘투쟁 아닌 투쟁을 하는 일부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책임이라 느꼈기 때문입니다.

박기자님께서 지금까지 장애인으로 살면서 받아온 시선과 상처를 토대로 쓴 글에 대하여, 저도 같은 장애인으로 그 마음을 일부나마 이해하고 공감합니다. 장애인으로 태어난, 혹은 중도에 장애인이 된 어느 누가, 당당하게 ‘나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장애인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 역시 중도에 장애를 입었습니다. 인생 조졌다, 생각했습니다. 죽고 싶어 자살도 시도했었고, 나로 인해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부모님을 지켜보는 것 또한 큰 고통이었습니다. ‘내 2세가 나 같은 장애인이라면 솔직히 자신이 없다’는 박기자님의 고백은 저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없다는 것은 바로 세상에 태어나 장애인으로 살아야 하는 그 삶이 비장애인에 비하여 너무나 고통스럽고 처참하기 때문이겠지요. 그 예가 바로 박기자님이 표현한 ‘타인의 시선’이며 그로인한 ‘상처’일 것입니다. 저도 장애를 처음 입었을 때 비로소 그 시선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 줄 알았습니다. 질기게도 떨어지지 않는 구더기가 늘상 내 몸에 붙어 기어다니는 느낌이었습니다. 정말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세상의 멸시에 대해 원천적으로 그러한 고통을 막는 것은, 스스로 죽음을 택하거나,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이겠지요. 그것이 바로 자살과 낙태로 표현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누군가 옆에서 아무리 생명은 귀하고 삶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목 놓아 주장한들, 당사자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것은 오롯이 그가 짊어지고 가야할 ‘천형’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박기자님,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너무 고통스러워 사느냐 죽느냐를 스스로 선택하는 문제와 이 사회가 유독 ‘장애인’에 대한 낙태를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문제는, 다른 차원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가령 아이가 세상에 불구로서 태어난다든지, 이런 불가피한 낙태는 용납이 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라고 인터뷰한 이명박씨의 발언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박기자님,

나는 이명박씨의 발언은 ‘이 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무지와 편견과 차별의 상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가 일반 평범한 한 시민이 아니라,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기에 가볍게 여기지 않고 엄중하게 그 책임을 묻고자 투쟁하였습니다.

(1) 먼저 박기자님도 지적했듯이 이명박씨의 ‘불구’에 대한 발언입니다.

그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으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언론 중 하나인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불구’라는 발언을 하였습니다. ‘불구’라는 단어는 ‘병신’, ‘애자’, ‘절름발이’ 등과 같이 장애인을 비하하는 수많은 단어 중 하나입니다. 그가 의식했든 하지 않았든, 그는 공개적으로 장애인을 비하하는 발언을 한 것입니다. 그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 개인이 의식했든 하지 않았든, 장애인에 대한 그러한 무지와 편견은 이 사회에서 세월을 두고 차곡차곡 쌓여 박기자님과 내가 느꼈던 ‘천형’과도 같았던 모멸의 시선으로 돌아왔습니다.

확대해석이라 생각할 수 있겠죠.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제정된 장애인차별금지법의 내용에도 이 사회에서 장애인에 대한 비하발언이 무의식적으로 너무나 난무하기에 법으로 분명히 금지하고 있습니다. 만약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올해 실행이 되었다면, 아마 이명박씨는 그 법의 제32조 3항에 의하여 시정권고를 받았을 제1호 대상자가 되었을 겁니다.

제32조 (괴롭힘 등의 금지)

③누구든지 장애를 이유로 학교, 시설, 직장, 지역사회 등에서 장애인 또는 장애인 관련자에게 집단따돌림을 가하거나 모욕감을 주거나 비하를 유발하는 언어적 표현이나 행동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가 ‘불구’라는 말로 장애인을 비하한 것에 대하여 언론은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다루지 않았습니다. 이명박씨 또한 사과문에서 장애인에 대한 비하발언이었다는 것을 정확히 말하지 않고 애매모호하게 넘어가 버렸습니다. 전혀 그 심각함을 느끼지 않았거나 인식조차 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저는 그것이 장애인에 대한 이 사회의 슬픈 자화상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이 무지와 무관심의 견고한 벽을 깨뜨려야 합니다. 끝까지 따지고 그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 사회는 조금이나마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장애인으로 태어나 지금까지 받아왔던 모멸의 시선이 장애를 가진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차별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더 이상 타인의 따가운 시선으로 상처받으며 살기 싫습니다. 그리고 나의 2세가 혹여 장애를 갖고 태어나더라도 그러한 세상에 살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내 스스로 자살을 선택하는 방식이나, 나의 2세를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죽여버리는 방식이 아니라, 장애인을 그토록 비참하게 살도록 만드는 이 개같은 세상을 바꾸는 것으로 시작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제가 투쟁하는 이유입니다. 박기자님이 표현했듯, ‘투쟁 아닌 투쟁’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2) 박기자님, 너무 글이 길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낙태에 대한 문제는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일반적인 낙태에 대한 찬반논쟁은 아닙니다)

이명박씨는 낙태에 대하여 반대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외조항으로 불구에 대한 낙태를 인정하였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니까 현행 모자보건법에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압축하여 설명하는 과정에 ‘오해’가 있었다고 변명하였습니다. 참으로 비겁한 변명이라 생각합니다. (이명박씨는 자신의 생각에 대하여 아주 명확하게 이야기합니다. 그 예로 동성애를 반대한다고 했고 교수노동조합에 대하여 분명히 반대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명박씨의 낙태에 대한 의견은 ‘낙태를 원천적으로 반대하지만, 예외적으로 장애인에 대한 낙태는 허용하는 것에 대하여 동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에 무슨 오해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명박씨는 ‘불구, 낙태’ 발언에 대하여 비난이 일자, 모자보건법의 뒤로 살짝 숨어버렸습니다. 만약 오해가 있다면 이명박씨는 현재 모자보건법에 의해 장애인에 대한 낙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인지, 그것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바꾸겠다는 것인지 밝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단지 오해라고만 했습니다.

장애인에 대하여 낙태를 허용하는 것이 이명박씨의 생각이든, 모자보건법에 의한 어쩔 수 없는 변명이든, 그것은 이명박씨의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이 사회 주류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낙태는 반대하지만 예외적으로 장애아에 대한 낙태를 허용한다는 것은 바로 장애인에 대한 사회구조적인 배제와 분리, 그로인한 차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며, 강한자만이 살아남은 약육강식의 대표적인 사례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장애인에 대한 살육을 합법적으로 진행했던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역사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철저하게 우생학적으로 태아의 생존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모에게 혹시 장애를 가지고 세상에 태어날 아이가 고통스럽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에 대하여 그 책임을 모두 전가해버린 것이며, 이에 대한 선택에서 조금의 배려를 해준 것이 낙태에 대한 허용인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 그 장애아이가 감당하면서 살아야 할 세상의 고통은 자신의 장애 때문이 아니라 대부분 이 사회가 만들어 놓은 장애인에 대한 차별 때문에 발생하는 고통입니다. 그래서 낙태되어야 될 대상은 뱃속에 들어 있는 아이가 아니라 이 세상의 장애인에 대한 차별인 것입니다.

박기자님,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장애아를 낳아서 키워보겠다고 장담할 수 있는지 묻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어느 누가 자신 있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명박씨처럼 권력과 재산 두둑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몸뚱아리 하나 상품으로 팔아먹고 살아야 하는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게 그것은 더욱 어렵고 힘든 질문이겠지요. 그 고통의 무게가 만만치 않을 것은 분명하니까요.

그러나 한 가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고통 없는 삶은 누구에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고통의 무게가 이기지 못할 만큼 버거울지라도, 그 고통으로 인해 삶은 또한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장애인으로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기에 고통스럽지만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사회적 차별에 대해서는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바꾸고 싶습니다. 그것이 제가 투쟁하는 이유입니다. 또한 제가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박기자님!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입니다.

이명박씨의 발언에 대하여 정치적으로 확산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통령이 된다는 것이 무엇이며 정치는 무엇입니까. 대통령은 바로 내가 살고 있는 나라의 방향과 정책을 결정하는 최고책임자가 된다는 것이며, 정치는 그것을 결정해나가는 과정입니다. 장애인에 대한 문제는 정치와 상관없는 순진무구한 개인적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박기자님과 제가 느꼈던 그 따가운 시선들과 상처로 장애인이 고통스럽게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정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그 나라의 대통령이 어떠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되는가에 따라 크게 변화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명박씨의 발언은 더욱 정치적으로 확산되어야 합니다. 그로 인해 이 사회에서 장애인문제에 대하여 진지하게 한번 토론을 해보는 기회로 확장하는 것 또한 우리가 투쟁하는 이유입니다.

박기자님은 다행히 이 전 시장이 공개사과까지 한 시점에서 괜한 에너지소비를 더 할 필요 없다고 본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명박씨는 자신이 서울시장이던 시절 장애인 정책을 최우선으로 두었다는 ‘사실과 다른’ 정치적 선전과 더불어, 자신의 발언에 대해 오해가 있었다며 애매모호한 사과를 했습니다.

이명박씨의 언론을 통한 사과는 객관적인 사실과 진실을 기반하지 않는, 거짓된 사과였습니다. 저는 그가 지금이라도 명확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진실을 기초하여 자신이 잘못했다면 무엇을 잘못했는지 밝히고 공개사과 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대통령이 되고자하는 사람의 책임입니다. 만약 이명박씨가 그것을 피해가려 한다면 저는 그가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투쟁을 할 것입니다. 그것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박기자님과 제가, 그리고 장애를 가지고 태어날지 모르는 저의 2세가 이 사회에서 차가운 시선과 그로 인한 상처를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박기자님.

너무 글이 길었습니다. 글을 짧게 정리한 재주가 없었기 때문이라 생각하시고 긴 글 읽어 줄 것이라 믿습니다. 서로의 방식을 달라도 열심히 투쟁할 것입니다.

*이 글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준) 박경석 집행위원장이 기고한 글입니다.

[리플합시다]복지부 활동보조서비스, 무엇이 가장 불만입니까?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