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성년후견제도?’, ‘헌법 위에 국가공무원법’ 피켓을 들고 있는 기자회견 참가자들.ⓒ에이블뉴스

25년간 성실히 공무원으로 일해온 김 모 씨(50대, 남)의 가정은 지난 2015년 11월, 그가 근무 도중 과로로 인한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병상에 누우면서 풍비박산됐다.

다음 해인 2016년 4월, 질병 휴직을 낸 김 씨를 대신해 전업주부였던 그의 부인이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많은 치료비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산재를 인정할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산재 보상도 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본인 이외에는 예금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은행에서는 김 씨 본인이 직접 오지 않으면, 돈을 내어줄 수 없다고 했다. 남편 명의로 된 재산으로 병원비를 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성년후견’ 신청뿐이었다.

2013년 7월 시행된 성년후견제도는 질병, 장애, 노령, 그 밖의 사유로 인한 정신적 제약 때문에 일정한 법률행위 시 후견인의 조력을 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법원의 적법한 절차를 통해 피후견인으로 인정받게 되면, 당사자의 결정이 스스로 이뤄지기 어려운 경우 의료, 재활, 교육, 신상에 관련한 부분에서도 법원으로부터 부여받은 권한으로 결정할 수 있으며, 재산 관리 또한 대신 할 수 있다.

종류에는 법정후견과 임의후견이 있으며, 법정후견은 성년후견, 한정후견, 특정후견으로 나뉜다. 성년후견은 사무처리 능력이 지속적으로 결여되는 경우로 대부분의 조력을, 한정후견은 사무처리 능력이 부족한 경우로 일부분에 대해 조력을 받을 수 있다

의식 회복이 어려운 김 씨는 대부분 조력을 받는 ‘성년후견’을 신청, 2016년 12월 31일 확정됐다. 이후 남편의 후견인이 된 부인은 김 씨의 재산으로 치료비를 겨우 마련했다.

하지만 ‘성년후견’이 김 씨의 가정에 더 큰 불행을 가져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최대 2년이 주어지는 병가 기간이 끝나가도 김 씨의 병세가 나을 기미가 없자, 그의 부인은 남편의 뜻에 따라 2018년 3월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주변에서도 당연히 될 것이라 여겼던 명예퇴직이었건만, 심사 과정에서 2016년 말부터 김 씨의 ‘성년후견’이 개시된 사실이 발견되며 명예퇴직이 아닌, 당연퇴직을 통보받았다.

국가공무원법에는 공무원이 피성년후견인에 해당할 경우 당연퇴직해야 한다고 나와 있다.ⓒ국가법령정보센터 캡쳐

국가공무원법 제69조에 따르면, 제33조(결격사유)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 당연히 퇴직하도록 돼 있다. 제33조 1호에는 피성년후견인 또는 피한정후견인이 포함돼 있다.

이 법을 근거로 김 씨는 그가 신청한 ‘명예퇴직’이 아닌 ‘당연퇴직’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된 것. 더 나아가 휴직 기간 받았던 급여와 보험료까지 추징당하고 말았다.

“성년후견제도를 활용한다는 이유로 25년간 성실히 일해온 공무원으로서의 노고를 모두 부정당한 겁니다.”

김 씨는 공무원 지위 확인 소송을 통해 공무원으로서의 지위를 다시 찾고자 했지만, 소송을 준비하던 지난 5월 30일, 투병 4년여만에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다.

이에 사단법인 두루와 법무법인 지평은 유족들을 원고로 고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당연퇴직 처리되며 억울하게 반환했던 임금과 국민건강보험 지역가입자로 미납 처리돼 납부했던 보험금 등에 대한 청구 소송과 국가공무원법 제69조 당연퇴직에 대한 위헌 법률 심판 제청을 1일 신청했다.

이날 서울 행정법원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법무법인 지평 이지혜 변호사는 국가공무원법 당연퇴직 규정은 ▲헌법상 권리 침해 ▲피후견인이 된 공무원을 부당하게 차별 ▲피후견인에게 어떠한 절차도 보장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명백한 위헌”이라고 강조했다.

“공무원이 질병이나 장애로 인해 피후견인이 되었다는 것만으로 그의 지위를 박탈하고, 쓸모없는 존재로 낙인찍고 있는 겁니다. 당연퇴직 규정은 형사처벌을 받은 공무원을 포함시키고 있어, 질병이나 장애가 있는 자를 범죄자와 똑같이 취급하고 있습니다.”

법무법인 지평 이지혜 변호사,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박김영희 상임대표가 발언하고 있다.ⓒ에이블뉴스

이지혜 변호사는 “후견제도는 질병이나 장애가 있는 사람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조화롭게 살 수 있도록 도입된 제도인데 피후견인이라는 이유로 그를 세상에서 배척하고 있다”면서 “당연퇴직 규정은 세계 주요 국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후진적 입법”이라고 소송 취지를 밝혔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박김영희 상임대표는 “성년후견제도가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선택권과 결정권이 침해당하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그럼에도 제도가 필요했던 것은 일상생활에서의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면서 “결국 권리를 지키기 위한 제도가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 망인께서도 자신과 상관없는 법이라고 살다가, 자기 권리가 보장받지 못한 채 떠나야 한다는 것을 돌아가시기 직전에 아셨을 것이다. 법원에서 어떤 판단을 내놓을지 끝까지 지켜볼 것”이라고 피력했다.

한편, 법제처와 법무부는 7월 초 피후견인 차별적 결격조항 정비 추진 계획을 통해 사무처리능력이 ‘부족’한 피한정후견인 결격조항(정비대상 법령 총 395건)을 올 하반기 정비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 씨와 같은 피성년후견인 결격조항은 제도의 급격한 전환 시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 등을 고려해 시행 경과를 살펴본 후 정비를 확대할지 검토할 계획이다.

1일 서울행정법원에서 열린 성년후견제개선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기자회견.ⓒ에이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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