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3월 22일, 원생 1명이 15척(4m50cm) 담장을 넘었다. 그러나 그의 목숨을 건 탈출은 얼마 가지 못했다. 겁에 질려 파르르 떨던 그는 끊임없는 몽둥이질에 끝내 죽음을 맞았다. 이어 참다못한 35명의 원생들이 집단 탈출했고, 비로소 꽁꽁 숨겨졌던 ‘지옥’이 세상에 드러났다. 그 중심에는 ‘박인근’이라는 악마가 있었다.

1987년 당시 12년 간 사망 원인도 모른 채 비참하게 죽어간 513명, 이유 없이 몽둥이를 맞아야만 했던 3500여명이 있던 부산 형제복지원, 그 곳에서는 어떤 일들이 있던 걸까.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해 이야기 하는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여준민 활동가.ⓒ에이블뉴스

■악마의 터 ‘형제복지원’=1976년 형제복지원의 지옥이 시작됐다. 한국전쟁 이후, 당시 육군 상사였던 박인근 원장은 “일본의 조총련에서 부랑인으로 가장한 사람들을 남한에 파견해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는 박정희 군사정권의 공문을 접하고 나서, 이에 대한 부응으로 거리의 부랑인을 수용 하는 일을 본격적으로 하게 됐다.

이후 ‘내무부훈령 410호’라는 ‘부랑인등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조치 및 사후관리’라는 업무지침이 치안본부와 내무부의 합작품으로 진행되자, ‘수용시설’의 확장을 통해 사회사업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지옥의 모습은 참혹했다. 검찰 수사와 신민당 조사보고서 등에 의하면 형제복지원은 소대, 중대 등 군대식으로 운영하면서 임금을 받는 직원이 거의 없어 수용자들의 위계와 폭력으로 유지되었던 곳이었다.

갓난 아기부터 노인까지, 지체장애인, 정신장애인까지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부랑인’으로 낙인찍혀 강제 수용됐지만, 실상은 길을 가다, 공원에서, 부산역에서 아무 죄 없이 끌려온 무고한 시민들인 것.

당시 연 20억 원이 넘는 정부예산을 받았지만, 형편없는 의식주 생활로 단순한 수용에 지나지 않았으며, 시설 내 모든 건축물을 마땅한 기계도 없이 터를 닦는 것부터 시공, 완공에 이르기까지 수용인들은 힘겨운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아동은 적절한 학교 교육도 받지 못했고 각종 작업장에 배치되어 임금도 받지 못한 채 폭력의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가 되는 삶을 살아야 했고, 여성들 또한 권력을 가진 남성들에게 성폭력을 당하는 등 치외 법권의 상황에서 숨죽여 살아야 했던 것.

더욱이, 마땅한 병의원 시설도 마련되어 있지 않아 의료방치로 죽음에 까지 이르는 상황이 비일비재했고, 형기 없는 감옥 생활에 지나지 않는 암울함 속에 자해를 해도 방치해 죽게 놔두었으며, 도망가다 잡혀 와 매를 맞다 사망한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10일 열린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 증언대회' 모습.ⓒ에이블뉴스

■2013년, ‘악마’는 여전히 건재하다=1986년 당시, 형제복지원에는 3975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경찰을 통해 입소한 사람이 3117명, 구청을 통해 입소한 사람이 253명일 정도였는데, 형제복지원 수용자들은 대부분 국가기관에 의해 강제로 감금된 채 인권유린을 당했다.

경찰 내부 근무평점이 일반 구류자는 2-3점인데 반해 형제복지원 입소 시에는 5점일 정도로, ‘형제복지원’은 국가가 계획적으로 독려한 국가사업 중 하나였던 시대상이 반영된 결과였다.

1976년부터 1987년까지 약 12년간 513명이 사망했다고 알려질 정도로 충격이지만, 사망자들 대부분은 심장질환, 신부전증 등의 허위 사망진단서를 발급받았다. 심지어 복지원 인근에 암매장 되거나 각 의과대학에 해부학 실습용으로 팔려나가는 등 두 번의 죽임을 당했으며, 시신 한 구당 300~500만원을 주고 팔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검찰내부, 청와대, 부산시는 갖은 회유와 협박으로 사건을 축소 은폐시켰다.

고등법원에서 2차례나 특수감금죄를 인정했지만, 결국 대법원(당시 대법원장 김용준)은 2번 모두 특수감금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게 지옥의 불구덩이 속에서 뒹굴었지만 기소조차 이뤄지지 않은 것.

결국 불구속 입건된 박 원장은 1987년 6월 징역10년과 벌금 6억8178만원을 선고받았으나 1987년 11월 1차 항소심에서 벌금형이 사라진 징역 4년, 1988년 2차 항소심에서 징역 3년, 1989년 3차 항소심에서 2년6개월로 형이 확정됐다. 7번의 길고 길었던 재판이었다.

박 원장은 형기를 마치고 다시 이름만 바꾼 채 형제복지원, 재육원, 욥의 마을, 형제복지지원재단 등 26년째 사회복지법인을 계속 운영해오고 있다. 2013년 현재는 법인 산하 ‘실로암의 집’이란 중증장애인요양시설만 운영하고 있다.

반면, 피해자들은 여전히 정신적 경제적 어려움으로 평범한 일상은 꿈 꾸지도 못한채 울부짖고 있다.

왼쪽부터 실로암의 집에서 탈시설한 박경수씨, 형제복지원 피해자 오민철씨(가명), 양세환씨.ⓒ에이블뉴스

■숨죽였던 아이들, 세상으로 나오다=“내가 왜 이렇게 살아왔나 뒤를 돌아보니 형제복지원이 있었다.”

그들이 용기냈다. 10일 서울 마포구 가톨릭청년회관에서 열린 ‘87년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 증언대회’에서 직접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이 참석, 그 간의 가슴 아프고, 외로웠던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

먼저 당시 14살의 나이로 형제복지원에 입소한 오민철(가명, 44세)씨는 밤에 제복 입은 아저씨의 ‘와보라’라는 말에 따라 갔다가 버스를 타고 1986년까지 2년간 입소했다. 오씨는 떨리는 음성으로 “그곳은 살 곳이 아닙니다. 죄를 지은 게 아닌데, 내가 왜 들어갔을까 생각했어요”라더니 “두서 없어서 죄송하다”며 이야기를 끝내 잇지 못했다.

이어 12살에 입소해 6년간 생활했다던 양세환(44세)씨는 당시의 형제복지원 기억을 “빼앗으려고, 빼앗기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는 아이들, 맞기 싫어, 죽기 싫어 안간힘으로 살아가는 아이들”이라고 표현했다.

부산역 앞 팔각정에서 연 날리는 것을 구경하다가 잡혔다던 양씨는 “수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3500명이 있었는데 탈출한 사람은 200명도 안된다”며 “담장이 15척이었다. 4m 50cm정도였는데 그 높이를 감히 도망가는 사람들이 없다. 잡혀서 들어오면 나무몽둥이, 야구방망이, 꼬깽이 자루, 칼처럼 만든 빠따로 맞는다”고 털어놨다.

양씨는 “그 어린나이에 기합을 많이 받았다. 깍지끼고 엎드려뻗쳐를 최하 30분했다. 바늘로 30번 찌르는게 나을 정도였다”며 “버티지 못해 넘어지면 조장이라는 인간들이 야구방망이로 내리친다. 잘 못 맞으면 불구가 되는거다”고 덧붙였다.

양씨는 “음식은 소금에 팍팍 절인 배추김치, 사람이 먹다 남긴 생선뼈다귀를 가마솥에 3일동안 끓인다. 그 냄새는 이루 말하지 못할 정도다. 아마도 여러분들은 오바이트를 할 것”이라며 “박인근 원장은 군사정권으로 인해 도움을 많이 받은 사람이다. 나는 지금도 눈에 살기가 느껴진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박인근 원장이 현재 운영중인 실로암의 집에서 20년간 생활하다 최근 탈시설한 중증장애인 박경수씨도 플로어 자리에서 “실제로 경험한 박인근은 장애인들이 몸 많이 불편하고, 죽어가도 그냥 냅둬라하는 사람이다. 자기가 성질이 욱하면 사무 직원도 폭행하고, 그런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며 “이런 사람이 계속 시설 운영하는 것에 대해서 그런 일이 있어선 안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수면으로 드러난 26년 전의 진실=형제복지원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뜻이 모아졌다.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등 8개 단체로 이뤄진 형제복지원 사건진실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는 지난 2월말부터 2주에 한번 회의를 하면서 전국 곳곳에 흩어져있는 피해자들을 만나고 자료를 수집해 분석하는 작업을 진행중이다.

현재 총 11차의 회의가 진행됐으며, 오는 24일 본격적인 대책위가 발족될 예정이기도 하다.

대책위에 접수된 피해자 현황은 25명의 피해자와 2명의 실종자 가족이 있으며, 당사자들은 사건 발생 후 대부분 집에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망상에 사로잡혀 희망을 저당잡힌 채 살아왔다는 것이 이들의 설명.

대책위는 현재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안을 마련해 내부 간담회를 거쳐 곧 입법 발의할 예정이다. 이후 11월에는 학술단체협의회와 형제복지원 사건이 한국 사회에 던지는 의미를 각 영역에서 해석해 학술대회도 준비 중이다.

대책위 준비위원인 상지대학교 법학부 김명연 교수는 “형제복지원 사건의 피해당사자의 진실 규명을 요구하고, 이에 대해 국가로부터 사과를 받고, 당연한 보상을 받는 것이 기본적 입장”이라며 “앞으로의 문제에 대해서도 반복적으로 벌어지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으며, 계획 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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