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 1일 경부고속철도 1단계 개통일날, 장애인들이 집단으로 표를 끊고 탑승하려하자 경찰들이 막아서고 있는 모습. 이날 퍼포먼스는 휠체어 좌석이 2개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었다. ⓒ에이블뉴스

2004년 4월 1일 경부고속철도 1단계 개통일날, 장애인들이 집단으로 표를 끊고 탑승하려하자 경찰들이 막아서고 있는 모습. ⓒ에이블뉴스

누구나 그렇겠지만, 살다 보면 오랜 세월이 지나도 머릿속에서 잊혀지지 않는 기억들을 몇 개씩 가지고 있게 된다. 기뻤던 순간이던 그렇지 않았건 간에 이 기억들은 때로는 추억을 남겨주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내게도 그런 장면이 하나 있다. 장애인이면서도 오랜 세월동안 나의 장애를 인정하지 못하고, 장애인차별 철폐 운동에도 회의적인 시각을 보였었지만, 6년 전의 기억 하나로, 장애인 차별과 인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떼쓰러 온 사람이 아니라, 손님이잖아. 빨리 도와드려"

2004년 4월 1일, 그날은 고속철도의 개통식이 열린 날이자, 말로만 듣던 열차를 실제로 탑승해 보는 날이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철도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열차 개통 전 철도청(당시에는 코레일로 변경되기 전이었다)에서 승객들을 대상으로 추첨했던 무료 시승 행사에 응모했었으나 뽑히지 않아 아쉬워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던 차에 마침 ‘고속철도 개통 이튿날까지 열차를 이용한 고객에게는 특별 철도 포인트 5천점을 부여한다’는 광고를 보았으니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서울역에서 2시 15분에 출발해 동대구까지 가는 열차를 미리 예매한 터라 표를 구입할 필요도 없었기에 바로 열차에 오르기만 하면 되었다. 여기에 고속열차에 대한 궁금증, 그렇게 많이 들었던 시속 300km의 속도감을 직접 느껴본다는 설렘까지. 서울역으로 향하는 기분은 토요일 아침 데이트를 위해 내려가는 기분만큼이나 들떠 있었다.

그렇게 서울역에 도착하고 게이트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내 눈에 낯선 광경이 보였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개찰구를 통과하려 하자, 역무원과 경찰이 나서 가로막고 있었고, 한쪽에서는 “나가야 한다. 왜 못 나가게 하느냐”는 말을, 다른 한쪽에서는 “두 사람밖에 탈 수 없으니 돌아가라”는 말이 반복되었다. 휠체어가 있는 곳은 어디에나 역무원과 경찰들이 둘러싸고 있었고, 그 속에서 휠체어를 탄 이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은 “개찰구 밖으로 나가게 해 달라”는 말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열차 개표를 알리는 방송이 나오기 전에 역에 도착했으나 처음 보는 광경에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오랫동안 서 있었다. 마침 옆에 있던 경찰에게 무슨 일인지를 물으니, “장애인들이 열차를 태워 달라고 시위를 벌여서 나와 있다”는 말을 할 뿐이었다. 더 물어보고 싶었으나 열차 출발이 얼마 안 남아있어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이번에는 역 직원이 나를 막아섰다. 차를 타지 못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항의하려는 순간 옆에 있던 다른 직원이 나를 막아섰던 직원에게 한마디 했다.

“야! 떼쓰러 온 사람이 아니라 열차 타시는 손님이잖아. 빨리 도와드려.”

2004년 4월 1일. 그날의 요구가 없었다면?

그렇게 해서 어렵사리 열차를 타고 서울을 출발해 종착역인 동대구까지의 기차 여행을 마칠 수 있었다. 서울을 떠나 광명에 정차한 열차가 천안아산역을 통과할 때, “우리 열차는 지금 시속 300km의 속도로 천안 아산역을 통과하고 있습니다”라는 방송이 나왔다. 집을 나오면서 갖고 있었던 궁금증 중 하나를 해결한 셈이었지만 출발 전 서울역에서 본 광경들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기에 별다른 느낌도 없었다.

6년 전 서울역에서 보았던 그 모습들은, ‘열차에 오르는 단순한 일’ 하나도 ‘왜 안 되느냐’고 끊임없이 역무원과 경찰들에게 물어야 했던 시간이었다. 정당한 승차권을 사서 열차에 오르기 위해,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휠체어 장애인들이 열차에 타는 것도 935석 중 2좌석뿐인 휠체어 좌석이라는, 또 다른 장애 앞에서 떼쓰는 것으로밖에 비춰지지 않았던 일이다.

‘장애는 장애가 아닙니다. 단지 불편할 뿐입니다’라는 말은 우리가 흔히 듣는 말이다. 그날 시위 현장에 있었던 이들은, 두 자리에 불과한 휠체어 좌석에 여러 명이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모를 만큼 지능이 낮지 않았으며, 더군다나 특실보다 더 좁은 일반실에 들어가기는 더욱 불가능했으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세상에 전달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6년 전 그날, 서너 명의 장애인이 휠체어를 몰고 서울역을 찾아 그 같은 요구를 했다면, ‘다음 열차를 타라’는 말로 간단하게 해결되었을 것이고, 장애인 좌석이 2개뿐이라는 사실은 묻히고 말았을 것이다.

지금 무궁화호를 포함한 대부분 열차의 장애인 좌석은 6년 전보다 늘어나 있다. 이렇게 장애인 좌석이 조금이나마 많아질 수 있었던 데는 그날 ‘떼를 쓴’ 부분도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일 것이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하나의 교통망을 하나의 회사가 운영하는 기차에서조차 편의시설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버스 이용은 어려울 것이며, 장애인의 취업과 자립생활 역시 먼 나라 이야기일 수밖에. 장애인의 권리를 위해서는 때로는 강한 움직임도 필요하다는 것을 6년 전 그날의 사건이 말해주고 있다.

*이 글은 현재 경기도 광명시에서 살고 있는 독자인 정현석씨가 보내왔습니다. 에이블뉴스는 언제나 독자 여러분들의 기고를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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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석 칼럼니스트 집에서만 살다가 43년 만에 독립된 공간을 얻었다. 새콤달콤한 이야기보다 자취방을 얻기 위한 과정에서 겪었던 갈등들과 그것들이 해결되는 과정이 주로 담으려 한다. 따지고 보면 자취를 결심하기 전까지 나는 두려웠고, 가족들은 걱정이었으며, 독립 후에도 그러한 걱정들은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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