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여인의 향기>(1992, 마틴 브레스트)에서 시각장애인 프랭크 슬레드(알 파치노)가 스포츠카 페라리를 운전하고 있는 모습. ⓒUniversal Pictures

시각장애인들에게 '운전'은 일종의 동경의 대상처럼 궁금하고 신기하고 아마 한번쯤은 해보고 싶은 그 무언가라고 생각한다. 청소년이나 남성 시각장애인, 운전을 손수 경험했던 중도 실명인들이라면 이런 운전에 대한 갈증이나 호기심은 더욱 클 것이다.

여성으로 그리고 운전을 실명 전에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필자에게도 운전에 대한 호기심은 존재한다. 몇 년 전엔가는 아무도 없는 지하 주차장에서 친구의 차를 가지고 운전을 살짝 경험해본 일도 있었다. 기어를 D에 놓은 채 한발을 브레이크에 놓고 살살 차를 몰아보았다. 물론 옆좌석의 친구가 핸들을 한손으로 잡고 '좌회전', '우회전', '브레이크'등등의 훈수를 두며 말이다. 긴장되면서도 정말 재미있는 추억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몇 년이 지나 제작년인 2007년 여름 다시 한 번 운전을 경험해 볼 절호의 기회를 만나게 되었다.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지하 주차장이 아닌 시원하게 바깥공기를 느낄 수 있는 실외에서 말이다. 필자가 인턴으로 일하던 미국의 캐롤센터에서 시각장애인 청소년들을 위한 운전 및 자동차 체험 교실이 있었던 것이다.

캐롤센터는 메사추세츠주 뉴튼이란 도시에 있는 시각장애인 재활기관으로 100년에 가까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곳이다. 여기서 이루어지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기초재활훈련 프로그램 및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오늘날 우리나라를 비롯해 수많은 국가들에서 벤치마킹 할 만큼 그 명성이 대단한 곳이다.

필자도 이곳서 약 1년 가까이 재활상담사로 일을 하며 보고 배운바가 참으로 많았는데 특히 청소년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다양한 특별프로그램이 인상적이었다. 즉, 통합교육을 받는 미국의 시각장애인 학생들을 위해 매년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캐롤센터는 시각장애인 학생들의 자립생활과 역량강화를 목적으로 다양한 클럽 활동 및 자기주장훈련과 상담서비스 등 일반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시각장애인 학생들을 위한 맞춤화 교실을 진행하고 있다.

오늘은 특별히 그 가운데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행해진 ‘트랜스포테이션 익스피리언스’(Transportation Experience)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까한다. ‘트랜스포테이션’(Transportation)이란 단어를 교통이동수단이라고 직역하여 마치 이 프로그램의 제목만 들으면 학생들이 도로로 나가서 이것저것 다양한 교통수단을 타보는 체험을 했나 하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은 단순히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차원을 넘어 8종이나 되는 주요 교통수단에 대해 배우고 직접 전문가와 함께 짧은 시간이나마 운전도 경험해보는 획기적인 프로그램이었다.

8종의 교통수단은 바로 승용차, 오토바이, 앰뷸런스, 소방차, 경찰차, 트럭, 버스, 그리고 심지어는 경주용 레이스 카(race car)였다. 평소 이 차들을 한자리에서 구경하기도 쉬운 일이 아닌데 지역사회의 협조로 이 차량들은 모두 캐롤센터 앞마당에 동원이 되어 청소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간단히 나마 차량이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대한 원리를 배우고 각각의 교통수단의 구조가 어떠한지를 설명하고 일일이 손으로 만져보는 체험을 한 후 나중엔 직접 전문가와 동승하여 짧은 시간이나마 운전까지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15명의 시각장애인 청소년들이 2명씩 8개조로 나누어서 8개의 차량을 일사분란하게 옮겨 다니며 설명을 듣고 운전을 해보는데 가장 운전에 민감하고 관심이 많은 시각장애인 청소년들이라서 그런지 모두들 흥분한 기색이었다.

그리고 그날의 하이라이트로 경주용 레이스카를 경험하는 일을 놓칠 수 없는데 사실 그 차는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빠르기 때문에 경주장이 아닌 캐롤센터 앞마당에서 운전을 시험해 보는 일은 가능하지 않았다. 대신 일일이 다 손으로 만져보며 경주용차량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체험하고 차량에 대한 설명도 듣고 나중에는 엔진 튜닝을 전문 카레이서가 시연하는 것으로 경험을 대신했다.

사실 필자도 그날 처음 경주용 차량을 실제로 보고 만져 본 것이었는데 차도 아주 날렵하게 멋지게 생긴데다가 바퀴나 차량구조도 아예 일반 차량과 많이 다른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그 엔진소리가 마치 하늘을 나는 제트기 소리처럼 어마어마하게 커서 귀가 약한 사람들은 그 소리를 견디지 못하고 다시 건물 안으로 귀를 막고 들어갈 정도였다.

승용차를 운전해 보는 일만으로도 우리 시각장애인들에겐 긴장되고 즐거운 추억이 될 만한데 대형버스나 소방차, 경찰차, 앰블런스 등을 만져보고 운전해 본 경험은 정말 특별한 체험이 아닐 수 없다. 필자 역시 레이스카를 만져보며 들뜨는데 자라나는 청소년들은 얼마나 신나고 재미있는 경험이었을지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이러한 획기적이고 대규모의 프로그램을 기획한 캐롤센터도 대단하지만 그 프로그램이 실천되기 위해 협조한 메사추세츠주 경찰과 여러 관계자들이 더 훌륭하고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경찰들과 병원 관계자, 그리고 운전 학교 선생님들이 차량을 빌려준 일도 그렇고 학생 수 만큼 오셔서 일일이 그 학생들을 지도한 점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소수의 그것도 장애인 학생들을 위해서 그들의 알 권리와 즐길 권리를 위해서 다들 모여서 가르치고 체험해보는 그 시간은 참 소중한 시간이었다.

장애인의 날이나 흰지팡이날과 같은 특별한 날이 돼야만 장애인에 대한 일회적인 관심을 나타내고 장애체험이다 뭐다 유난스런 행사를 가지는 우리나라의 경우에 비춰 생각할 때 더더욱 미국의 이런 장애청소년들에 대한 지역사회의 관심과 사랑이 부러운 하루였다.

*이 글은 수필집 '마음의 눈으로 행복을 만지다'의 저자 시각장애인 1급 김기현씨가 보내온 기고문입니다. 에이블뉴스는 언제나 애독자 여러분들의 기고를 환영합니다. 에이블뉴스 회원 가입을 하고, 편집국(02-792-7785)으로 전화연락을 주시면 직접 글을 등록할 수 있도록 기고 회원 등록을 해드립니다.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