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신질환자이자, 법외 장애인이다. 심지어 광화문에서 장애등급제 폐지 서명을 하기도 했었다. ‘비장애인’의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병원을 내원하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와 그래도 곧잘 자기 인생을 살고있는 것 같은 느낌도 있었으므로 당연히 병원을 찾아가는 것을 꺼렸다. 하지만, 학교라는 공간은 온실과 다름없었고, 나의 문제는 곧바로 지적되기 시작한다. 몇가지 일이 계기가 되어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은지 벌써 5년 차이다. 5년동안 겪은 일들과 혹여 다른 청춘들도 이렇게 괴로워하는지 몰라 모처럼 키보드를 잡았다.

유명한 오락프로그램 대사이다. 출연자들을 방콕에 여행을 간다고 속여 끌고 온 뒤, 세계 곳곳으로 흩어져서 갖가지 일을 하게되자 출연자가 분노에 차서 뱉은 말이다. 갑자기 왜 오락프로그램 대사를 언급하는가 하면, 저런 말을 공개적인 자리에서 내뱉고 싶을 정도로 사회는 장애인의 요구들에 대하여 ‘나중에’로 일관하였다.

무언가 시의적절한 의제가 하나 생기면, 여성정책과 함께 가장 먼저 뒷전으로 밀리는 것이 장애인 관련 정책이다. 지금의 팬데믹을 헤쳐 나오기 위해 기초연금과 장애인연금의 중복지급을 막는 등 장애인에 대한 우선적인 긴축이 일어났고,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니 나도 세상을 향해 이렇게 소리치고 싶다.

포퓰리즘 정치를 하는 이상, 이렇게 조명 받지 못하는 약자는 조명 받지 못한다. ‘포퓰리즘이 나쁘다’라는 거칠고 지겹고 쓸모도 없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포퓰리즘은 많은 사람들에게 지지받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이다. 민주화 이래 모든 정권들은 성공적인 포퓰리즘 전략이 집권으로 이어진 것이다.

심지어, 군사정권의 지배 하에서도, 포퓰리즘은 자신들에 대한 불만을 억누르기 위한 처방 중 하나로 사랑받았다. 그만큼 약효도 으뜸이었다. 왜 북한이 세계청년축전을 열기 위해 체제를 망친 마지막 발악을 했는지 생각하면 납득이 된다. 1988년 서울의 하계올림픽 개최도 마찬가지 맥락이었고, 우리나라는 당시 북한과 다르게 경제적 기반도 단단했으며, 일본의 호황의 수혜자이기도 했으므로 동서진영의 대부분의 국가들을 다시 규합하는 체육대회를 열어 세계의 이목을 끌었고, 그러한 주목에 대중들은 군사정권의 압제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포퓰리즘이 문제가 되는 지점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다수와 대중의 환심을 사지 않고서는 포퓰리즘 정치는 실패할 수 밖에 없으므로, 정책 역시 다수의 만족을 우선시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국민건강보험은 아주 흔하고 대부분 전문의약품의 처방 없이도 치료가 가능한 감기에도 보험 급여를 해 준다.

그러나 ‘보장성 강화’라는 측면에서는 항상 험난한 길을 걸어왔다. 암환자의 치료비 경감이 언제부터였고, 건강보험이 장애인을 위한 보조기기(보장구)를 급여화 한 것은 언제부터였는가?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호주제 폐지와, 1인당 국내총생산 2만 달러 돌파보다 늦었었다.

사람들이 자주 앓게 되고, 금방 낫는 질병에 꾸준하게 급여를 하지만, 중증질환에서는 ‘산정특레’, ‘중증질환(법에서 다루는 중증질환)’, 각종 치료에 대한 보험급여문제가 끊이질 않는다. 건강보험공단의 핑계를 다 들어줄 수는 없지만, 굳이 태도를 요약하자면 우리나라의 국민건강보험은 경증질환 치료비를 지원하느라 중증질환 치료비를 지원을 못해주겠다는 것이 된다.

이것만으로 끝나면 차라리 낫겠다. 장애인을 겨냥한 정책이 사막 속 신기루처럼 홀연히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대통령의 편에 서서 열심히 ‘어용 유튜버’일을 하고 있는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장관의 ‘저상버스 50% 도입’ 계획은, 유 전 장관이 이행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현임 박능후 장관에 이르기까지 11명의 장관이 취임하는 동안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쟁의 요인이 될 것도 없었던 이 계획의 진척은 서울 약 50%, 대구와 강원 약 30%, 시도별 평균 24.4%, 울산 14.4%이라는 저조한 성적표로 남아있다. 저상버스의 도입이 끝나도, 실제로 휠체어 사용자가 탑승하기 어려운 상황 등으로 제대로 활용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휠체어석이 비어있을 때를 대비한 이동식 좌석은 조금 불편한 고정석이 되고 말았다. 장애인의 이동을 위한 수단은 지자체가 지원하는 콜택시 서비스 뿐이다. 이러니 사람들은 장애인의 존재도 알아채지 못하고, ‘없는’ 장애인들을 위하여 예비된 공간을 ‘낭비’로 여긴다.

한국에서 가장 치열한 경쟁인 주차공간 경쟁에서도 그렇고, 그 이외의 모든 상황에서 ‘장애인 전용 공간’은 사치와 낭비라는 인식을 지우기 쉽지 않다. 장애인 전용 시설의 무장애시설 구비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실질적으로 장애인이 이용할 수 없는 공간을 만들어 버리는 이유도 그런 것이리라.

법적 인정을 받으며 사회적 지원을 약속받은 법내 장애인들의 처지도 이럴진대, 법외 장애인의 경우는 어떠한가? 필요한 어떤 지원도 장애인등록증이 없으니 어려움을 알지만 도와줄 수 없다는 궁색한 사과를 듣기 십상이다.

어떻게 ‘어려운 줄은 알지만 도와줄 수 없다’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을까? 서운해 하는 것도 부질없는 짓이요, 악성 민원인으로 낙인 찍힐 일이다. 그저 내가 선택하게 되는 것은 제풀에 지쳐 잠들거나, 마시면 안되는 걸 알면서도 술기운으로 자서 순간을 잊는 것이다. 혹시 모르니까, 내일은 화도 안 날지도, 아니면 더 나아질지도.

*이 글은 정신질환 당사자가 보내온 기고문으로 '잘린 무지개'란 필명으로 게재 합니다. '잘린 무지개'의 의미는 무지개처럼 다양한 정신질환의 스펙트럼을 편의에 따라 재단하는 사회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에이블뉴스 회원 가입을 하고, 편집국(02-792-7166)으로 전화연락을 주시면 직접 글을 등록할 수 있도록 기고 회원 등록을 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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