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동병상련’이나 ‘과부 사정은 홑아비가 안다’ 같은 말은 장애인에게 잘 어울리는 말이 되었나 모르겠다. 장영희 교수의 에세이집 ‘문학의 숲을 거닐다’를 읽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가르치던 학생들과 연극을 보러 가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편의시설이 걱정이 되어 극장에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엘리베이터가 있다고 해서 갔는데, 막상 가보니 높은 턱 때문에 갈 수가 없어 지하로 통하는 긴 층계를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내려갔다. 돈을 주고 산 좌석은 높은 계단을 서너 개나 올라가야 했기 때문에 지정석 표 없는 관객들과 함께 가장자리에 놓인 간이용 의자에 앉아서 연극을 보았다.

연극이 끝나고 다시 학생들의 도움을 받으며 에베레스트를 등정하듯이 층계를 오르는데, 마침 옷을 갈아입고 나가던 그날 연극의 주인공 유인촌 씨가 그녀를 보았다. 그는 주저 없이 펄쩍 뛰며 사양하는 그녀를 들쳐 업고 층계를 올랐다.

40여 년 전, 연극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러 예술의 전당에 갔던 일이 생각난다. 나는 그날 교우의 등에 업혀 갔다. 17년 후, 한국을 찾았을 때는 지인이 사주는 밥을 먹기 위해 식당 종업원의 등에 업혀 들어갔다.

그녀의 책에는 옷가게 주인에게 걸인 취급을 당한 경험도 들어 있다. 동생과 윈도쇼핑을 하다가 동생이 쇼윈도에 걸린 옷을 입어보겠다고 했다. 함께 들어가려 했지만 입구의 턱이 너무 높아 동생만 들어가고 그녀는 문밖에 있었다. 그날 그녀는 낡은 청바지에 헐렁한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고 한다.

문간에 서 있는 그녀를 발견한 주인 여자가 대번에 얼굴색이 변하더니, “동전 없어요. 나중에 오세요.” 하더란다. 그 말을 못 알아듣고 눈만 껌벅이고 있는 그녀에게 이번에는 표독스럽게 “영업 방해하지 말고 나중에 오라는데 안 들려요?” 하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 그녀의 동생이 옷을 반만 걸친 채 뛰어나왔다고 한다. 그다음은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미국이라고 상황은 다르지 않다. 나에게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주말 아침 수염도 안 깎고 허름한 차림으로 마켓에 갔다. 마침 누이에게서 전화가 걸려와 이어폰을 꽂고 입구에서 통화를 하고 있는데, 어떤 백인 아줌마가 “마침 잔돈이 없는데요.” 하며 지나갔다. 아마도 내가 누이에게 하는 말을 “한 푼 줍시오.” 로 들었던 모양이다.

언젠가는 문구점에 갔는데, 차에서 내려 들어가려고 하는데 어떤 큰 차가 세워둔 내 차의 운전자 쪽에 바짝 붙어 차를 세우고 있었다. 휠체어가 들어갈 공간이 사라진 것이다. 차에서 내리는 남자에게 차를 좀 떼어서 세워 달라고 하려고 다가가며 말을 거니, 못 들은 척 서둘러 문구점으로 들어가 버렸다. 따라 들어가며 좀 더 큰소리로 그를 불렀더니, 돈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설명을 하니, 그제사 그는 얼굴을 붉히며 차를 다른 곳으로 옮겨 놓았다.

그녀의 글을 읽으며 잠시 옛일을 되새겨 보았다.

*이 글은 에이블뉴스 전 칼럼니스트이자 미국에 사는 고동운님이 보내온 글입니다. 에이블뉴스 회원 가입을 하고, 편집국(02-792-7785)으로 전화연락을 주시면 직접 글을 등록할 수 있도록 도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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