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 나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독서를 하려고 노력한다. 작년에 ‘시간상실’이란 첫 시집을 출간하면서 내 창작능력이 많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독서하는 하는 것이 많이 하는 것이 부족한 내 창작능력을 키울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범이기 때문이다.

나는 얼마부터 물리치료를 받은 후에 다니는 교회 북카페에 가서 ‘세계의 명시’란 책을 읽고 있다. 강산이 적에는 두세 번에서 많게는 열 번이나 스물 번이 변해서도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불후의 명시들을 읽으면서 나도 이런 글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미국의 에밀리 디즌킨의 희망은 날개를 가지고 있는 것이란 시를 읽을 때 평범한 사실에서 새로운 진리를 깨달았을 때 감동과 함께 많은 사람들의 얼굴들이 떠올랐다. 나의 장애를 불치병으로 보지 않고 독특한 특성으로 봐주었던 고마운 사람들이 생각난 것이다.

그들이 있어 중증장애인인 내가 무기력에 갇혀 있지 않고 장애관련 단체에서 활동하고, 시인으로 등단해서 글 쓰면서 부족한 내 능력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사회인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중증의 뇌병변장애로 열다섯 살이 돼서야 특수학교인 제주영지학교에 입학했다. 정체정의 혼란기인 그때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에 깊은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 깊은 절망에서 나를 빠져 나오게 된 것은 할 수 있다면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나의 말을 귀 담아 들으신 초등학교 1,2학년 당임 선생님 덕분이었다. 담임선생님께서는 때 없이 경직이 일어나고 떨림을 조절할 수 없는 손대신 마우스스틱을 입에 물고 글을 쓸 수 있게 했던 것이다.

나는 제일하고 싶었던 글을 쓰면서 노밸 문학상까지 받을 있는 유명한 작가가 되는 꿈을 꾸게 되었다. 나도 오프라인 대학을 다닐 때 특수교육을 전공해서 알고 있지만 특수교육에서 강조하는 중에 개별화교수범이 있다. 학생의 장애 정도와 특성을 따라 특별한 학습지도 방범과 장애보조기구를 이용해서 맞춤 교육이다. 대학에서 배운 지식을 충실히 실천한 선생님 때문에 나는 마음대로 글 쓰면서 큰 꿈도 꿀 수 있는 행복한 문학 소년이 될 수 있었다.

사람들은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면 다른 문제가 나타나 좌절시킨다. 나는 글을 쓸 수 있어 좋았지만 중등부, 고등부에 올라갈수록 특수학교를 졸업하면 마땅하게 갈 데가 없어 집이나 시설에 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곳에서 누구도 봐주지 않은 글쓰기를 포기할까봐 많이 절망하곤 하였다. 선생님들은 그런 나를 위로도 많이 해주었지만 모두가 하는 걱정스러운 미래 때문에 절망했던 나를 질책했다.

미래가 걱정스러우면 내가 할 수 있는 공부나 글쓰기에 더욱 열중해서 미래를 바꾸어 보려고 시도도 하지 안했던 나를 몹시 나무랐다.

나와 같은 장애를 가지고도 특수교사가 되신 사회선생님께서는 내게 고생해보지 않아서 좌절만 하는 것이라고 호되게 야단치곤 하셨다. 처음에는 야단치는 선생님들이 서운했지만 나를 장애인으로 보지 않는, 선생님들의 마음이 느껴져서 감사했다.

그래서 나는 대학진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때때로 생각대로 나오지 않는 모의교사 성적과 장애가 있는 몸으로 대학에 적응 못하는 내 모습이 보여 좌절하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고등학생이면 누구나 하는 고민이라고 말씀하시는 선생님들 때문에 힘을 얻어 나는 우석대학교 특수교육과에 진학하게 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때 나의 좌절들은 입시생들에게 한번쯤은 일어나는 일시적인 좌절들이었다. 평범한 좌절들을 나만의 특별한 좌절들로 보이는 것은 나의 자기연민이 만들어 내는 착시형상이었다.

선생님들은 내가 평범한 좌절들로 미래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는 못된 버릇을 고쳐주신 것 같다. 사회복지제도에서는 장애인들을 배려해주는 조항이라도 있지만 인생과정에서 생겨나는 절망들은 장애인들을 배려해주는 범이 없기 때문에 어느 때나 굳은 의지를 가진 제자가 되어주기 바라서다.

우석대학교에서 만난 동기, 선후배들은 그야말로 나를 장애인으로 보지 않았다. 자기들과 또 같은 자기선택권과 자기결정권, 자기책임감이 있는 대학생으로 봤다. 그들은 내가 학교생활을 하는데 불편함이 없이 도와주었고 MT나 학과 학술제에 참여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지만 내가 장애 때문에 무책임한 생동하면 무서운 비판들이 되었다.

생각할수록 내 생에 가장 어리석은 생동이 하나가 있다. 대학에 입학하러 고향에서 올라왔다가 기숙사만 보고 도저히 적응 할 수 없을 것 같아 고향으로 내려간 일이다.

특수학교에 비하여 장애인 편의시설도 부족하고 기숙사와 강의실들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선생님들이 책임지고 생겨주던 특수학교와 달리 내가 얼마나 동기, 선후배들과 친해지든지에 따라 나를 챙겨주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시스템에 적응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향에 내려간 나는 같은 학교출신 선배의 설득과 한번 생활해보고 포기하라는 사회선생님과 수학선생님의 충고를 듣고 대학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내 생각과 달리 대학생활은 처음에는 많이 힘들었지만 동기들과 선배들과 친해지면서 무사히 적응해서 즐겁게 대학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한 선배들과 술을 마시게 되었다. 한 선배가 내게 “민호형 우리 처음에 형에게 많이 실망했어요”고 말했다.

“대학까지 왔으면 학교생활을 하면서 생기는 문제들을 주체적으로 해결하는 모습을 기대했는데 무책임하게 내려 가버렸어요”, “형이 다시 올라올 때는 안 도와주려고 했던 사람도 있었어요.”

이에 나는 “그때는 내가 아무것도 몰라서 그렇게 했어”라고 말했다. 또 지금은 주체 없이 여기 저기 끼여서 사람들에 불편을 준다고 욕할까봐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그때 선배들은 또 같은 사람이 어울러서 노는 것인데 욕하는 사람이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어쩌면 그들과 다른 사람이라고 구분한 것을 내가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중증의 장애를 가지고 있어 동기, 선후배들과 어울리지 못한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자신들과 또 같은 대학생으로 생각하고 같이 어울려서 놀면서 도움과 비판해주는 동기, 선후배들 사이에 있다 보니 나도 그들과 또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생각은 오프라인 대학에서 특수교육을 전공하고 사이버 대학에서 사회복지까지, 전공하고도 사회복지사이나 특수교사가 되지 못한 것에 절망하지 않게 했다.

내가 장애인이라서 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전공을 못 살리는 요즘시대에 청년들 가운데 한명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제일 좋아하는 글쓰기를 계속 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즐거운 마음만 생긴다.

작년에 시집을 출간한 이후에 주변 사람들이 장애가 있는 몸으로 큰 일 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나는 그때마다 장애를 불치병이 아니라 아주 독특한 특성이란 것을 일깨워주는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처럼 절망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희망이란 날개를 가지게 된 것이니까.

*이 글은 전주에 사는 장애인 활동가 강민호 님이 보내온 글입니다. 에이블뉴스는 언제나 애독자 여러분들의 기고를 환영합니다. 에이블뉴스 회원 가입을 하고, 편집국(02-792-7166)으로 전화연락을 주시면 직접 글을 등록할 수 있도록 기고 회원 등록을 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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