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한 밤 중에 은혜네 부모님은 “언니, 언니, 죽지 마”하며 다혜가 울어대는 소리에 그만 잠이 깨었습니다. 은혜 엄마와 아버지가 급하게 아이들 방으로 달려가 보니 몸을 잔뜩 구부린 은혜가 침대 위에서 신음을 하고 있었습니다. 은혜가 차사고 나는 현장에 함께 있었던 다혜는 그때 일이 생각나는지 파랗게 질려서 와들와들 떨었습니다. 아버지는 은혜를 들춰 업고 급히 병원 응급실로 달려갔습니다.

“복근 경직이 원인입니다. 은혜는 걸을 때도 그렇지만 뛸 때 특히 배 근육을 많이 사용하게 되지요."

의사 선생님은, 은혜가 갑자기 무리하게 운동을 해서 그런 거라며 당분간 푹 쉬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래도 달리기는 그만 둬야겠죠, 선생님?”

그렇잖아도 은혜가 운동회에 참가하는 게 못마땅한 은혜 엄마는 잘됐다싶어 얼른 의사 선생님께 동의를 구했습니다.

“안돼요. 운동회엔 꼭 나가야 해요. 운동회만 끝나면 절대로 무리하게 운동하지 않을게요. 제발 나가게 해 주세요, 선생님.”

올려다보는 은혜의 눈빛이 너무나 간절했는지, 젊은 의사 선생님은 차마 말리지 못하겠다는 듯이 자꾸만 웃으십니다. 그러다가 “선수로 뽑혔다면 당연히 나가야지. 대신 오늘부터 3일 동안은 연습하지 않고 쉬기! 약속할 수 있니?” 하십니다.

“넷! 고맙습니다, 선생님!"

은혜는 너무 기뻐 선생님과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손가락 도장까지 찍습니다. 은혜 엄마는 더 걱정스런 얼굴이 되고 은혜 아버지는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는 딸이 대견한지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입니다.

운동회 날은 점점 가까워 옵니다. 그렇지만 운동회 준비에 정신없이 바빠야 할 이기자 선생님은 오늘도 교장실에 불려가서 한바탕 야단을 맞느라 자기반 선수들 연습도 제대로 지켜보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학생들의 축제라지만, 운동회는 우리끼리 하는 잔치가 아닙니다. 그 날은 귀한 손님들도 초대했고 학부형들도 오실 텐데, 장애 학생이 다른 학생들하고 같이 달리기 경기를 한다고 생각해 봐요! 보기만 해도 안쓰러울 텐데, 어떻게 흥이 나고 즐거운 잔치가 되겠습니까?”

묵묵히 듣다가 고개만 꾸벅하고 돌아서 나오는데, 이번엔 교감 선생님이 쫓아오며 은혜를 계주경기에 내보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십니다.

“제발 교장 선생님 말씀 좀 들으세요, 이 선생. 예?”

이기자 선생님은 아무 말도 안하고 밖으로 나와 한참 동안 운동장 계단에 앉아 있었습니다. 당장이라도 교장실로 다시 올라가 학교라는 곳이 도대체 누구를 위해, 어떤 교육을 시키자는 곳인지 따져 묻고 싶은 걸 꾹꾹 참자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금방이라도 가슴이 터질 것만 같습니다.

계단 저 아래에선 까만 고깔모자를 쓰고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흰 셔츠에 나비넥타이를 맨 1학년 학생들이 쪼르르 몰려가며 떠들어댑니다.

“3학년 누나들 응원 연습하는 거 보러가자.”

“맨 앞에서 춤추는 누나가 제일 잘 춰!”

이기자 선생님 눈길이 아이들을 따라갑니다. 그리 멀지 않은 계단에 3학년들이 줄줄이 앉아서 쿵짝 쿵짝 리듬에 맞춰 응원 연습을 합니다. 김홍석과 우정현이 맨 앞에 서서 응원을 이끌고 있습니다. 구경하던 1학년들이 점점 가까이 가자 응원석이 갑자기 떠들썩해 집니다.

“훠~어이! 저리가, 저리!”

“1학년 펭귄들은 관람불가다!”

우정현과 김홍석이 들고 있던 꽃술을 흔들며 꼬마들을 쫓자 1학년들은 볼멘소리로 “남극신사 라고요.”하면서 도망갔다가는 금방 다시 보러옵니다. 정인영은 회장답게 수첩을 들고 다니며 4반이 참가하는 종목마다 꼼꼼히 검토를 합니다.

“응원은 정현이가 맡았으니 걱정이 없고, 이어달리기 순서는 젤 처음 주자가 오정원, 다음이 나, 세 번째 주자가……”

땡볕에 응원 연습하느라 지친 우정현이 반 아이들을 모아놓고 쉰 목소리로 신신당부를 합니다.

“이번에 우리 반은 꼭 1등을 해야 해! 응원이 받쳐주지 않아서 졌다면 선생님께나 선수로 나간 친구들한테 얼마나 미안하겠니.”

홍석이도 아이들을 격려합니다.

“은혜까지 참가하는데 우리 반이 질 리가 없어. 우리 반 선생님이 누구시냐? 이기자! 바로 승리 그 자체잖아?”

반 아이들도 은혜를 운동회에 참가시키는 문제로 담임선생님이 곤란을 겪는다는 걸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더 운동장이 떠나갈 만큼 큰 소리로 “이기자! 이기자! 반드시 이기자!”하고 소리칩니다. 이기자 선생님은 끓던 속이 어느새 가라앉았는지, 자기도 모르게 혼자 킥킥 웃으십니다.

마침내 운동회 날이 밝았습니다. 눈부시게 파란 가을 하늘 아래 까만 고깔모자를 쓴 1학년 펭귄들이 펼치는 매스게임의 신나는 음악 소리가 서연초등학교 담장을 넘어 온 동네 구석구석 울려 퍼집니다.

“풍짜작 풍짝! 풍짝 풍짜작!”

신이 난 다혜가 펭귄들을 따라서 다니며 펄쩍펄쩍 춤을 춥니다. 그러나 운동장 계단 옆에 마련된 학부모 석에 앉은 은혜 엄마는 근심 가득한 얼굴로 백군 선수석만 쳐다봅니다.

“은혜 엄마!”

정원이 엄마가 커다란 소리로 부르며 등을 탁, 칩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해요? 귓가에서 부르는 소리도 못 듣고?”

“걱정이 돼서요. 은혜가 달리다가 또 복근 경직이 일지나 않을지….”

“그래도 즐거운 운동회 날이잖아요. 저기 봐요, 다혜가 아까부터 엄마만 쳐다보던데.”

그제야 은혜엄마 눈에, 저만치서 빤히 보고 있는 다혜가 들어옵니다. 다혜는 엄마가 저를 보자 얼른 다가 와서 손을 벌립니다.

“엄마, 나 뭐 사먹어도 돼? 저~기, 맛있는 거 많이 있어.”

커다란 차일 아래, 어머니회에서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어 팔고 있습니다. 다혜는 동전을 받아들자마자 쪼르르 달려가 버립니다. 아까부터 먹고 싶은 걸 참고 있었나 봅니다.

“1학년들의 춤, ‘남극의 신사’가 끝났습니다. 다음 순서는 3학년의 ‘이어달리기’ 입니다.”

안내 방송이 끝날 때 쯤, 단정하게 투피스 정장을 차려 입은 아주머니 한 분이 학부모 석 앞으로 걸어오며 다른 학부모와 큰 소리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성훈이 엄마?”

“아유~, 인영이 엄마 오셨네! 회사는요?”

인영이 엄마를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정원이 엄마는, 이참에 인사나 나눌까 해서 쳐다보았지만 두 아주머니는 할 말이 많은 듯 했습니다.

“오늘은 출근 안했어요. 인영이 달리는 거 사진 찍어 주려고요. 인영이가 어찌나 열심히 연습을 하는지, 글쎄 몸무게가 1kg나 줄었지 뭐예요!”

“저런, 부러워라! 우리 성훈이도 이어달리기 시킬 걸.”

그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출전 준비하는 3학년 선수들을 둘러보던 인영이 엄마가 갑자기 요란스레 놀라며 은혜를 가리킵니다.

“어머머, 쟤 좀 봐! 다리가 왜 저래?”

그 바람에 다른 학부모들도 은혜를 쳐다봅니다. 그리고 “어머, 안쓰러워라! 저런 애를 어떻게 주자로 뽑았을까?”, “대체 어느 선생님이…”하며 다들 한마디씩 합니다. 인영이 엄마는 흥분해서, “설마 저 애를 선수로 내보내진 않겠죠.” 합니다.

“은혜요? 3학년 계주 경기에 주자로 뛴다던데. 얘기 못 들으셨어요? 인영이랑 같은 반인데.”

성훈이 엄마 설명에 인영이 엄마는 “아, 아니 저 애가 우리 반이란 말이에요?”하면서 목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어느새 3학년 선수석으로 성큼성큼 걸어갑니다.

“선생님, 잠깐 말씀 좀 해요!”

<작은 세상>의 작가 최현숙은 첫돌 지나 앓은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고.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 새내기 시절에 처음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지만 대학원을 졸업하며 시를 접었다가 2002년부터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해 2005년 구상솟대문학상 본상(시인상)을 받았다. 지금은 동화작가·콘티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