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1, 2학년 내내 공부하곤 담쌓고 지냈다. 특별히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다. 오로지 대학 진학만을 목표로 공부해야 한다고 다그치는 학교와 선생님들에 대한 반발이 컸다. 내가 다니던 여고에서는 월요고사라는 지독한 제도가 있었다. 월요일 아침마다 영어와 수학을 번갈아 시험 보는 것이었다. 그 월요고사라는 것으로 인해 우리들의 주말은 완전히 시험에 저당 잡혀야 했다. 그렇다고 공부를 파고든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마음은 엄청 불편했다. 그 당시 일요일에 'V‘라는 외화가 인기였는데, 시험에 대한 부담 때문에 늘 조마한 심정으로 봐야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우리 학교에서는 시간표도 대학입시에 맞게 바꾸었다. 입시에서 비중이 덜한 한문, 역사... 등등의 시간을 떼어내 영어와 수학 시간으로 채웠다. 물론 교육부(당시 문교부)에는 전 과목을 제대로 가르친 것처럼 가짜 시간표를 제출했다. 우열반 제도도 있었다. 영어와 수학 점수만을 가지고 A, B, C 세 등급으로 나누어 영수 시간에만 이동수업을 한 것이었다. 자연히 학생들 사이에는 등급이 나뉘어졌고, 위화감이 생겼다. 그런 학교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았던 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고3이 되자 미래가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대학에 가지 못하면 내게 다른 어떤 길이 있을까 생각해보니 앞이 깜깜했다. 남들은 고졸 학력으로도 얼마든지 취직할 수 있겠지만 커피도 나를 수 없는 내 조건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러면 공장에 다닐 수밖에 없을 텐데, 내 몸의 조건이 버텨낼 수 있을까가 의문이었다. 지금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공장 노동자의 작업환경이 열악하던 때였다. 어쩔 수 없이 공장 노동자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면, 나는 인생의 밑바닥까지 가겠구나 막연히 생각했다. 공장 노동자가 되면 뼈 빠지게 일하고도 공순이, 공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멸시당하고 착취당하게 될 테니까. 게다가 나는 장애까지 있으니 그야말로 볼짱 다본 인생 취급받겠구나 싶었다.

무조건 대학에 가야겠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그 다음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대학부터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1년 동안 코피 터져가며 공부했다. 공부를 해보니 처음엔 좀 막막하더니 그런 대로 재미가 있었다. 너무 늦지 않았나. 남들은 과외다 학원이다 열을 올리는데 나만 뒤처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하면 할수록 역시 공부는 우직하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구나 깨달았다. 그런 이유로 나는 요즘 입시도 산업화되어 거대한 시장을 형성하는 바람에 교육을 뿌리부터 흔드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지만, 시험이란 여전히 인간이 성장하고 커나가는 데 필요한 통과의례 중 하나라 여긴다.

예비고사에서는 꽤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본고사에서 보기 좋게 낙방을 했다. 본고사를 보지 않아도 되는 특차에도 지원을 했었다. 당시 지원했던 학교의 학과장이었던 모 시인은 면접 때 내게 물었다. 특차에서 떨어지면 본고사를 보겠느냐고? 나보고 성적이 높은 학생이 정원보다 한두 명 많다고. 면접에서 그런 어리석은 질문을 받을 줄 몰랐었다. 존경하던 시인 역시 점수로만 사람을 평가하다니 실망이었다. 나는 ‘아니오’라고 답했다. 결국 그 학교가 아닌 다른 학교 본고사에 응시했다가 떨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2차에서 지원을 한 학교에 합격을 했다.

어찌 됐든 나는 대학생이 되어 내 어린시절과 작별하였다. 그러나 내 이십대를 온통 지배했던 대학시절에 대해 이야기하기는 아직도 힘들다. 불안하고 암담했던 청춘... 그땐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 힘든 시대를 살았었지만, 스무 살 어린 내게도 시대의 억압은 지독했다.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 휴교령이 내려져 두문불출해야 했고 과외금지령 때문에 아르바이트도 하지 못하게 되면서 나는 감옥 아닌 감옥에 갇혔다. 대학생활에 대단한 기대를 갖고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막막할 줄은 몰랐다. 나는 그 폭압적이었던 시대와 여전히 화해할 수 없으며, 그 시대를 살아온 나 자신에 대해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했기에 아직도 이십대의 나와 정면으로 대면할 용기가 없다.

* 이 글을 마지막으로 백발마녀전의 연재를 마치려고 합니다.

그동안 꾸준히 관심을 보여준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좀더 많은 분들과 소통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지만, 제게는 백발마녀전이 여러가지로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제 어린 시절 경험을 드러냄으로써 장애여성 문제의 근원이 여성과 사회구성원으로서의 가능성을 일찍부터 차단하는 사회적 가치와 환경임을 조금이나마 밝히고자 했는데, 막상 마무리를 하려고 보니 부끄럽습니다. 부족했던 점은 앞으로 좀더 새로운 모색을 통해 보완하겠습니다.

공간을 제공해준 에이블뉴스에도 감사를 드립니다. 꾸벅!

김효진씨는 현재 한국장애인연맹 기획실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지체 3급의 장애여성이다. 그녀는 자신을 '자기결정권'이라는 한마디 때문에 깨달음을 얻은 바 있어 DPI에 입문한 대책없는 센티멘탈리스트라고 소개했다. 또 그녀는 섹시하지 않다느니 의존적이라느니 무능력하다느니 하는 허위의식을 유포해 장애여성을 화형(?)시켜버리는 폭력적인 세상에 도전하는 백발마녀(일명 흰머리소녀)라고 덧붙였다. 그녀의 특기는 독설이며, 특히 편두통이 심할 때는 굉장한 마녀로도 변신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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