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초부터 사고 얘기를 시작하는 것은 읽는 분들에게 미안하게 여겨지지만 운전에 얽힌 고마움을 이야기 하자면 결코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또 있다.

4년 전, 12월 마지막 날 송년회에 다녀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었다. 시내에서 길음동을 지나 미아리 내리막길을 막 내려가는 중이었다. 만취해서 중앙선을 넘어온 상대방 차와 우리 차가 길 한복판에 엉켜서 헤드라이트와 비상등이 저승불처럼 번쩍번쩍거리고 있는데 운전석에 앉아 있던 남편은 꼼짝도 못하고, 뒷좌석에 나와 같이 앉아 있던 아들은 그 순간 살풋 잠이 들었던 다음인지, 아니면 순간적인 기절을 한 것인지 정신을 읽고 있었다. 나는 앞 뒤 사람을 소리쳐 부르며 이 황당함을 어찌할 것인지, 거의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그때 제일 먼저 달려온 사람은 경찰이나 의료진이 아니라 호리호리하게 생긴 젊은 남자였다. 그는 찌그러진 차문을 잡아당겨서 문을 열고 먼저 우리 아들을 밖으로 잡아주더니 다음에는 나를 내리려고 붙들었다.

“앞 사람부터 먼저 확인을 좀 해주세요! 저 사람은 장애인이거든요.”

나는 마치 장애인이 아닌 것처럼, 그리고 장애인이라는 것이 큰 벼슬이나 되는 것처럼 외쳤다.

“그래요?”

그 남자는 깜짝 놀라 앞자리를 먼저 살펴주었고 다음에 나한테로 와서 내 몸을 당기려고 했는데 다리가 너무 아파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아악, 다리가 부러졌나 봐요.”

그 와중에도 나는 다리무게를 줄이기 위해 바지 아래로 보조기를 벗겨 내리고(마침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있어서 다행이었음) 나도 장애인임을 고백해야 했다. 그리고 경찰과 의료진이 마침내 도착 했는데 그 남자가 나대신 소리쳐주었다.

“조심, 조심! 조심해서 다루어주세요. 두 분이 장애인이예요.”

유난히 장애인이라고 지칭할 때에는 구별하거나 폄하하기 위한 것이 더 많았지만 위급한 그 자리에서는 잘 보호해주기 위해 장애인이라는 말을 사용했고 그것이 충분한 안도감과 배려로 주변에 전달되어졌다.

그리고 들것에 실려 가까운 병원으로 옮겨졌다. 차에서 빠져나오기 전에 나는 우리를 들여다보고 도움과 위로와 함께 동참하고 있음을 알려주던 그 분에게 물었다.

“누구세요? 누구신데 이렇게 고맙게 해주시는 거예요?”

그러나 그 대답을 듣지는 못했다. 뒤에 정신을 차려서 생각해보니, 명함이나 연락처라도 받아둘 것을…. 너무 너무 고맙고 아쉬워서 경찰에 연락이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오랫동안 병원에 있던 나는 끝내 확인을 해보질 못했다.

뒤에 보니깐, 그 길이 내리막인데다가 길 한복판이고 늦은 야간이어서 다시 이중, 삼중 사고가 날 수도 있는 아주 위험한 자리였다. 그런 길에서도 그 분이 자기 차를 세우고 왔는지, 아니면 길에서 달려온 것인지, 바로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 그야말로 천사가 하늘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몸에 실려서 나타났다가 돌아간 것만 같았다.

젊었을 때는 내가 무슨 이유로 이런 몸을 가지고 인생의 온갖 고해를 다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지 그 괴로움을 풀 수가 없었다. 나 스스로 납득할 이유도 찾지 못한 채 세상의 이런저런 불리함을 감당해야 하는 그 억울함이 내 몸이 느끼는 고통보다 훨씬 더 컸다.

그 시절에 구상하던 소설이 있었는데, 세상의 온갖 악독한 죄를 다 저지르는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것이었다.

왜? 이유도 없이 당하는 피해의식보다는 스스로 선택한 죄를 지어버리고 그 죄 닦음을 통해서 차라리 자기 불행에 대한 당위성을 찾고자 하는 몸부림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밀도감이 최대한으로 드러나야 할 그 현장성과 끈질긴 자질이 부족해서 그 소설은 중간에 포기되고 말았다.

그러나 소설보다 더 적나라하고 깊은 깨달음을 주는 것은 다름아닌 인생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나도 젊었을 한 때는 순수했을지 몰라도 세월 따라 나이 들어가면서 알게 모르게 이익에 편승하여 교활해지는 세태의 때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단지 사회적인 약자이므로 누구를 크게 해칠 자리에 있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그런 자리에서도 끊임없이 누구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어떤 때는 잘 한다고 해온 일들 중에도 뒤돌아보면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혔던 경우도 없잖아 있었다.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자 동시에 천사이고 행복이자 또한 불행일 수 있는 양면성을 동시에 왔다갔다 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중에도 고마운 일을 돌아다보면 운전 중에 얽힌 일들이 유독 더 많이 떠오르는 것은 내가 부실한 다리를 가졌다는 사실과, 열 몇 살이 되기까지 차 한번 제대로 타보지 못하고 한정된 공간에서만 살았던 촌놈이라는 것과도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혼자 유추해본다.

지금은 차로 다닌다고 해도 확실히 움직여다니는 일이란 나에게 쉽지 않은 것이고, 또 속력이 따르느니만큼 한번 실수하면 돌이킬 수 없는 그 부담감도 한몫을 할 것이다.

길을 잘 몰라서 잘못된 길을 들다보면 아무래도 실수가 생기기 쉽고, 그 실수 중에는 사고로 연결될 수 있는 일도 여러 번 있었지만 그때마다 용케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내 운전솜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요즘도 길을 모를 때는 택시 옆으로 바짝 다가가서 최대한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그리고 최대한의 미소작전으로 소리친다.

“아저씨, *****로 가야되는데요.”

우리나라 택시기사들이 언제부터 이렇듯 친절하더란 말인가. 열이면 열사람 모두다 자세히 가르쳐준다. 어떤 모호한 길에서는 따라오라고 우정 길을 바꾸어서까지 가르쳐주고 떠나는 기사도 한 둘이 아니다. 우리나라 아저씨들 만만세!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일찌감치 바느질을 배워 혼자서 살 궁리를 하라는 부모님의 말을 거역하고 울며 불면서 억지로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가장 되고 싶었던 것은 국어 선생님이었고 다음에 되고 싶은 것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교사임용 순위고사에서는 신체상의 결격으로 불합격되어 그나마 일년 남짓 거제도의 한 고등학교에서 임시교사를 한 적이 있고, 다음에 정립회관에서 상담교사로 근무를 하다가 2급 지체장애인인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리고 87년에는 친구처럼 듬직한 아들을 낳았고 94년에 동서문학 소설부문 신인상으로 등단을 했다. 김미선씨의 글은 한국DPI 홈페이지(www.dpikorea.org)에서도 연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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