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변에는 늘 아이들이 있었다. 크게 세 부류였는데, 같은 동네에 살아 같은 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한다는 점 때문에 동선을 같이했던 아이들과 나처럼 앞 번호에 해당하는 키가 고만고만한 아이들, 그리고 나보다 훨씬 성숙해보여 내 선망의 대상이거나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던 속칭 노는 아이들이었다.

첫째 그룹에 속하는 아이들은 기꺼이 내 가방을 들어주었고, 내 느린 걸음을 참아주었기에 함께 어울려 다닐 수 있었다. 친구들에게 맡겨진 내 가방은 가끔 수난을 겪곤 했다. 고2땐가는 나도 친구도 가방을 깜빡 잊고 버스에 두고 내려 교과서를 잃어버리고 헌책을 구입해 쓴 적도 있었으며, 두고 내린 내 가방을 또 다른 친구가 집에 가져갔다가 다음날 돌려받은 적도 있었다. 아무리 친구들이 대신 들어줘도 가방 주인인 내가 잘 챙겨야 하는데, 내 손 안에 있지 않으니 관념이 무뎌져서 생기는 일들이었다.

그때의 경험 때문인지 대학에 다닐 때나 사회생활을 할 때는 지나치게 가방을 챙기는 통에 사람들에게 괜한 오해를 받기도 했다. 나로서는 지갑이 든 가방을 잃어버리면 교통비 등에 당장 곤란이 생길 수 있어 웬만하면 남에게 맡기지 않고 스스로 들겠다고 하는 건데, 가방을 들어주겠다는 사람 입장에서는 호의를 거절당해 언짢았다는 것이었다. 괜찮다고 하는 내 태도가 지나치게 단호해서 남의 호의를 무시하는 태도로까지 여겨졌다는 사람도 있었다. 월급날 후배에게 가방을 맡기고 지하철을 탔다가 가방을 두고 내려 천신만고 끝에 되찾은 아찔한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가벼운 핸드백 정도는 내가 직접 들어야 마음이 놓이는 것이 당연한 일이건만 그런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고집스런 모습으로 비쳐질 수도 있었으리라.

예나 지금이나 키가 작아 늘 체구도 몸집도 작은 아이들과 짝이 되었지만, 나처럼 앞 번호에 해당하는 고만고만했던 친구들과는 별로 친하게 지내질 못했다. 위로 언니가 둘이나 있어 언니들과 부대끼는 가운데 스스로 언니들만큼 성장해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던 나로서는 맨날 어린아이처럼 싸우고는 전혀 모르는 사이인 것처럼 말을 안 하다가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화해를 하고 어울려 다니는 아이들이 유치해보였다. 하지만 가끔씩 억울함을 토로하는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다가 본의 아니게 그들 문제(?)에 끼어들게 되었기 때문에 그 유치한 아이들과 완전히 거리를 두기는 불가능했다. 나는 스스로를 상담자 역할로 규정하고 그 애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매일매일 고만고만한 아이들과의 관계를 유지했다.

책을 많이 읽어 정신세계가 꽤 깊어 보이거나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한 탓에 또래보다 훨씬 성숙해 보이는 친구들은 그저 바라만 볼 뿐 다가가기 힘들었다. 학교와 집만을 왔다 갔다 하기에도 벅찬 나로서는 그 친구들과 교류를 할 수 있는 계기를 좀체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속칭 노는 아이들과도 친해지기는 힘든 조건이었지만 그 애들과의 대화는 재미있었다. 남학생들과 떡볶이를 먹거나 영화를 보다가 선생님에게 들켜 도망친 이야기, 엄마한테 혼난 이야기, 형제들과 치열하게(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싸웠다는 이야기, 부모들의 불화 때문에 괴롭다는 얘기 등등... 나로서는 감히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이지만 나는 다 이해한다는 태도로(사실 다 이해할 것 같았다) 그 애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가끔씩은 네 맘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래도 너무 막나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충고 한마디씩을 던지면서... 아이들은 내 건방진 충고를 고깝게 여기기는커녕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준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위로를 받으며 고마워했다. 딴 데 가서 그런 이야기하면, 한심한 인간 취급하며 ‘공부나 해!’라는 핀잔을 들었을 테니까. 그러나 정작 고마운 쪽은 나였다. 그 애들의 이야기를 통해 나와는 다른 세계를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으니까. 나는 그 애들의 비밀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는 것으로 고마움에 보답했던 것 같다. ‘노는 애’로 낙인찍혀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버린 자식’ 취급당했지만 하나같이 여리디 여린 고운 영혼을 가졌던 그 애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내게도 친구가 생겼다. 고3 2학기가 되어 담임선생님이 1번과 2번, 이런 식이 아니고 1번과 31번을 짝으로 묶어주었던 것이다(그때는 한반이 60-70명 정도 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자리배치를 할 경우 키가 둘쭉날쭉해 교단에 선 선생님들 눈에는 산만해보이기 때문에 수업에 들어오는 선생님들마다 눈살을 찌푸렸지만 우리는 새로운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특히 내 경우 은근히 호감을 갖고 있던 지원이란 친구와 짝이 되었으니 웬 횡재란 말인가!

지원이는 다정다감한 성격이 아니었기에 오히려 내 장애를 특별히 의식하지도 않았고, 아무런 편견도 갖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내게 특별히 잘해주려고 오버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내게 무관심한 것도 아니었다. 백지상태 그대로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에서 서서히 친해졌으며, 교과서적인 세계에 대한 비판의식이 서로 닮아 있다는 점을 발견하면서부터 급속도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가르쳐준 세계, 부모님이 제시해주는 미래가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들을 서로에게 펼쳐 보이면서 조금씩 시야가 넓어지는 경이로운 느낌과 깨달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우리를 들뜨게 했다. 그렇다고 학교 밖에서 지원이와 특별한 교류를 했던 건 아니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같이 떡볶이를 먹으러 다닌다든가 영화를 보러 간다든가 서로의 집에 들락날락 한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다. 쉬는 시간 틈틈이 나누던 대화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일체감을 느끼곤 했다.

결정적으로 우리 두 사람의 결속감을 높여주었던 계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10·26사건이었다. 어느 날 아침 조회를 하러 들어온 담임선생님이 울먹이며 말씀하셨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셨다고. 그러면서 위대한 지도자를 잃었으니 다같이 묵념을 하자고 하셨다. “다같이 묵념!” 하시던 선생님의 제창대로 모두들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둘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지독한 독재자가 죽었으니 죽은 사람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이제 민주화가 될 터인데 그리 슬퍼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눈물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다들 울고 있는 것 같은데 나만 슬프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참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어 가만히 눈을 떠보았다. 그랬더니 내 짝 지원이도 눈을 뜨고 나를 보고 웃는 게 아닌가! 그때 우리가 느낀 동질감이라니... 아, 나는 정말 혼자가 아니구나! 나와 이토록 닮은꼴인 존재가 이 세상에 또 있다니... 게다가 썩 미인은 아니지만 서구적인 외모에 지적인 이미지를 풍기는 그녀가 나와 닮은꼴일 수 있다니...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내 여고시절은 그녀로 인해 충만하고 풍요로울 수 있었다.

김효진씨는 현재 한국장애인연맹 기획실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지체 3급의 장애여성이다. 그녀는 자신을 '자기결정권'이라는 한마디 때문에 깨달음을 얻은 바 있어 DPI에 입문한 대책없는 센티멘탈리스트라고 소개했다. 또 그녀는 섹시하지 않다느니 의존적이라느니 무능력하다느니 하는 허위의식을 유포해 장애여성을 화형(?)시켜버리는 폭력적인 세상에 도전하는 백발마녀(일명 흰머리소녀)라고 덧붙였다. 그녀의 특기는 독설이며, 특히 편두통이 심할 때는 굉장한 마녀로도 변신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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