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을 잘 만드는 나라가 진정한 영화 선진국이란 속설이 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왕의 남자"는 보고난 후에 이 속설을 대입해보고 싶을 만큼 한국영화의 진정한 도약을 실감나게 하는 영화이다. 무엇보다 작년 연말 보았던 장동건 주연의 태풍에서 받은 영화에 대한 실망감을 감동으로 원상복귀 시키는 기쁨을 안겨준다.

이 영화는 광대 장생과 연산군을 두 축으로 하여 전개된다. 장생은 놀이판을 쫓아 전국을 떠도는 줄타기 남사당패다. 동료광대 공길을 양반들의 남창으로 팔아먹는 꼭두쇠에 반항하여 대들던 장생이 꼭두쇠에게 죽도록 얻어맞는 것을 막으려다가 공길은 낫으로 꼭두쇠를 죽이고, 두 사람은 함께 한양으로 도주한다. 영화 속에서는 노골적으로 묘사되지 않지만, 장생과 공길의 관계에는 분명 동성애를 내포하고 있다.

거친 입심과 두둑한 배포를 갖고 있는 장생은 결국에는 한판 크게 벌어보겠다는 생각으로 저잣거리에서 의도적으로 연산군과 장록수의 치정행각을 조롱하는 판을 벌인다. 결국 의금부로 잡혀가게 되고, 내시 처선 영감으로부터 임금을 웃기면 풀어주겠다는 약조를 받고 연산군 앞에서 광대판을 벌인다.

연산군은 이미 역사 속의 기록처럼 포악하고 방탕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지만, 장생과 공길의 광대패를 만나면서부터 어머니를 잃은 깊은 상처를 주체하지 못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특히 그는 광대패들이 지껄여대는 '위 입, 아래 입' 따위의 말을 받아들여 장녹수와 놀 정도로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파격을 즐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여자 같이 예쁘장한 외모의 공길에게서 죽은 어머니의 모습과 연인에 대한 감정을 발견하지만 또다시 장록수의 치마 속을 파고 들어가며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회귀하고 싶어 하는 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공길은 장생과 연산을 동시에 사랑하며 연민하는 존재로 그는 어머니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다 잠이 드는 연산에 대해 애틋한 감정을 갖는다, 공길은 광대판을 거둬치우고 당장 궁궐을 떠나자는 장생의 소맷부리를 붙잡으며,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가 사약 받는 장면을 중국의 경극으로 한번만 재연하고 궁을 나가자고 호소한다. 이 일로 인해 궁에는 피바람이 몰아친다.

우리가 아는 요부 장록수는 이 영화에서만은 악녀가 아니다. 오로지 연산군을 사랑하기 위해, 모든 악담과 수모를 입술을 깨물며 참아내는 한 여자일 뿐이다. 그녀는 연산의 눈길이 닿는 공길을 한없이 질투하며 포악을 부리지만, 자신의 치마 속을 파고드는 연산에게 ″미친놈″ 한마디를 내뱉으며 받아들인다.

이 영화에는 어떤 절절한 사랑타령보다 더 가슴을 울리는 사랑이 있고, 어떤 정치드라마보다 대담하며, 어떤 코미디보다도 해학이 담겨 있다. 한판 논다는 것은 논다는 권력이란 것에 대한 진지한 돌아봄이요, 바람처럼 살다가는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연민 넘치는 초상이다.

원작 연극 ‘爾(이)의 워낙 탄탄하게 짜여진 설정과 이야기를 영상으로 그대로 옮겨 놓아서인지 이조시대 저잣거리 판부터 구중궁궐의 깊숙한 내실까지 종횡무진으로 오가는 이야기와 호쾌한 입담, 서슬 퍼런 긴장과 가슴을 울컥하게 만드는 감성, 물 흐르듯 거침없이 휘몰아치는 서정 등 복잡하고 미묘한 정서적 뉘앙스를 불러일으킨다. 이 이야기 속에 악인이 없다는 점이 그 이유가 아닐까!

가장 천한 놈이건, 가장 존귀한 왕이건 하늘아래 모두 불쌍한 존재일 뿐이란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는 영화의 대미에 나오는 장생과 공길의 대사는 오랜 여운을 남긴다.

“어릴 때는 광대들 노는 것에 눈이 멀고, 광대가 되어서는 어떤 놈과 짝 맞춰 노는 것에 눈이 멀고, 한양에 올라와서는 구경꾼들 던져주는 엽전에 눈이 멀고 그러다 얼떨결에 궁에 들어 와서는…….이렇게 눈이 멀어…….볼 걸 못 보고…….어느 잡놈이 그놈 마음 훔쳐 가는 것을 못 보고……."

"야 이 잡놈아 !! 눈깔도 없는 놈이 죽으려고 줄에 올라갔냐!, 눈이 먼 놈이 게가 어딘 줄 알고 올라가!, 광대짓 하다가 맹인이 되도 광대냐, 야 이 잡놈아! 장님이 된 게 그리도 좋더냐……."

"그래 좋다!"

"네 놈은 다시 나면 뭐로 나고 싶으냐?, 다시 태어나면 뭘로 태어날래? 양반으로 태어나련? 아님 왕으로 태어나련?"

"이 세상 한바탕 놀다 가면 그만인 것을, 다음 생에 태어나도 당연히 광대로 태어날 꺼다. 네년은 뭘로 태어날꺼냐?"

"나야 두말 할 거 없이 광대, 광대지"

가슴을 울리는 공길과 장생의 마지막 대사처럼 그들은 다음 생애에서도 광대로 태어났을까…….

최명숙씨는 한국방송통신대를 졸업하고 1991년부터 한국뇌성마비복지회 홍보담당으로 근무하고 있다. 또한 시인으로 한국장애인문인협회회원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1995년에 곰두리문학상 소설 부문 입상, 2000년 솟대문학 본상을 수상했으며 2002년 장애인의 날에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집 '버리지 않아도 소유한 것은 절로 떠난다' 등 4권이 있다. 일상 가운데 만나는 뇌성마비친구들, 언론사 기자들, 우연히 스치는 사람 등 무수한 사람들, 이들과 엮어 가는 삶은 지나가면 기쁜 것이든 슬픈 것이든 모두가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남으니 만나는 사람마다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고, 스스로도 아름답게 기억되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속에 기쁜 희망의 햇살을 담고 사는 게 그녀의 꿈이다. ■한국뇌성마비복지회 홈페이지 http://www.kscp.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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