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북역에서 출발하는 탈레스를 타고 독일 쾰른으로 떠났다. 쾰른은 19년 전에 유학을 왔다가 독일인과 결혼을 하고 정착한 친구가 사는 곳이다. 내가 등단한 동서문학에 번역문학으로 함께 등단하기도 하여서 더욱 절친한 친구였다. 유명한 쾰른 성당이 있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준비 없이 친구만 믿고 온 곳이기도 했다.

먼저 기차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달라진다. 푸르른 공원과 거의 흰 건물이나 붉은 벽돌로 잘 조형된 런던과는 달리 파리는 오래된 검은 돌의 육중한 건물들로 빽빽하게 들어찬 곳이라면 독일은 일견 소박한 모습이었다. 어디에나 인공적이지 않은 자연과 견고하지만 그다지 멋을 부리지 않은 건물들이 잘 섞여 있다.

첫날은 친구집에서 자고 다음 날 나왔는데 여기서도 일반 대중교통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건 이미 나한테 커다란 테마로 다가왔고 즐거운 낙이기까지 했다. 오늘도 얼마나 쉽게 타고 쉽게 내릴 수 있을 것인가?

먼저 친구의 산책길로 애용된다는 동네 공동묘지를 찾아갔다. 우리 같은 봉분이 없고 기독교식의 묘석이 아름답게 꾸며진 평지의 묘지는 우람한 나무들과 함께 쾌적한 공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여기 나와서 책도 보고 산보도 한다는 것이다.

그 길을 가로질러 버스를 타고 쾰른 성당으로 갔다. 도중에 지하철을 갈아타기 위해 버스에서 내렸는데, 휠체어를 타고 온 할머니와 밀고 온 할아버지가 버스를 타려고 앞에 서니깐 버스기사가 얼른 차에서 내려 할머니의 휠체어를 올려서 자리에 고정시켜놓고 자기 자리로 갔다.

누구라도 도와주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지만 기사의 눈밖에 벗어나지 않는 한 기사가 내려서 도와주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라고 한다. 이건 전차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아무리 전차 차량이 4~5개밖에 되지 않지만 운전하던 기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승객에게 다가온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너무 감동적인 일로 여겨졌다.

묘지공원으로 가기 위해 중산층의 주택가를 지나갔는데 잘 가꾸어져 있는 것과는 달리 사람들이 살지 않나 싶을 정도로 조용한 곳이었다. 그런데 밖에서 만나는 독일 사람들은 활기차고 생각보다도 훨씬 더 명랑한 얼굴이다.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해줄 때도 그냥 슬그머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주 활기찬 태도로 확실하게 자리를 권하는 모습이 기본적인 교육이 잘 되어 있다는 느낌이 저절로 들게 했다.

그리고 쾰른 성당 앞에는 임시로 만든 크리스마스 시장이 열려서 사람들이 어찌나 북적대는지 발디딜 곳이 없을 정도였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많이 열리는 야시장처럼 맥주와 간단한 먹을거리 그리고 크리스마스 양초나 선물같은 것이었는데 사람들은 활기차게 모여서 열심히 떠들고 있었다.

휠체어를 타고 나온 두 아가씨가 크리스마스시장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올라가지 못하고 그 밑에 앉아서 핸드폰으로 음식을 주문해서 먹고 있었다. 하긴 이 사람들은 모두 다 빵 속에 뭘 끼워서 먹는 것이 주식이다 보니 길거리에서 먹는 일도 다반사라 추운데서 이렇게 먹고 있어도 궁상스럽기는커녕 발랄해보일 정도였다.

다음 날 독일에서는 드물게 높은 산이 있다는 아히바이에르 지방과 베를린 이전의 수도였던 본으로 갔다. 12월은 어디에서나 크리스마스 시장으로 북적거렸다. 그러나 시장만 벗어나면 주택가는 얼마나 적막하도록 조용한지 이런 곳에 한 평생을 어떻게 사나 싶어질 정도였다.

베를린이나 프랑크푸르트 같은 대도시는 좀 다를지 몰라도 대부분 자신이 해야 할 공부나 일을 외부에 속도에 밀리지 않고 내면적인 속도에 맞추어서 꾸준히 할 수 있는, 차분하고도 집중된 곳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마침 우리나라에서는 황우석 교수의 일로 난리 중이어서 이 모든 일이 가시적인 성과를 급하게 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 하는 우리의 뒤늦은 조급증이 만들어낸 일인 것 같아서 더욱 씁쓸해졌다.

그리고 이번 여행에서 더욱 확실하게 체감되었던 것은 이미 나라라는 지형적, 민족적인 개념이 붕괴되고 있는 것은 막을 수 없는 대세라는 사실이었다. 런던에서도 새삼 놀랐던 것은 듣던 것보다도 훨씬 더 아프리카나 중동, 아시아 사람들의 숫자가 압도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도착하기 얼마 전, 파리 근교에서도 이민자 2세들의 폭동이 심각하게 발생한 후였다. 미테랑 대통령 시절의 뚤레랑스 정신으로 많은 이민자들이 유입되었고 거기에서 대량으로 출생한 2세들의 교육적, 사회적 문제가 심각하여 정부에서는 강한 규제를 하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사회적인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독일에서도 늘어가는 이민자들의 문제는 날로 더해져가고 있어서 복지정책을 줄일 수밖에 없는 현상 때문에 자국민의 늘어가는 불만의 소리는 이미 오래되었다.

이런 현상은 사회 안전망이 잘 되어 있는 유럽의 선진국들로서는 피할 수 없는 당면한 문제로, 단기적으로는 기존 정책을 지키기 위해 여러 가지 규제책을 내놓으려고 하지만 이런 정책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시대적인 심각성을 안고 있다고 보여진다.

차이와 다양성을 서로 존중하며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에 대한 묘안이 나오지 않는 이상, 이미 내 것이 우월하다는 선진국의 자부심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런 시점에 필요한 지혜와 철학을 우리 장애인 운동 속에서 찾아낼 수 있을런지, 그렇다면 작금의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는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일찌감치 바느질을 배워 혼자서 살 궁리를 하라는 부모님의 말을 거역하고 울며 불면서 억지로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가장 되고 싶었던 것은 국어 선생님이었고 다음에 되고 싶은 것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교사임용 순위고사에서는 신체상의 결격으로 불합격되어 그나마 일년 남짓 거제도의 한 고등학교에서 임시교사를 한 적이 있고, 다음에 정립회관에서 상담교사로 근무를 하다가 2급 지체장애인인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리고 87년에는 친구처럼 듬직한 아들을 낳았고 94년에 동서문학 소설부문 신인상으로 등단을 했다. 김미선씨의 글은 한국DPI 홈페이지(www.dpikorea.org)에서도 연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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