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밖으로 나다니는 것보다는 방에 콕 박혀 있는 것이 더 편하게 여겨지는 게으른 내성형이지만 그래도 가끔씩 어디로 홱, 떠나고 싶을 때가 많다. 가까운 이웃에서 늘 보던 사람과 또다시 만나 아기자기하게 지내는 것보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이 더 이끌린다. 그래서 마음은 언제나 저 멀리 낯선 곳으로 떠나고 싶다. 그러나 가볍게 움직여가기에는 내 몸뚱아리가 너무 무거운 것 또한 현실이다.

올해 2005년을 맞이하면서 세운 계획 중에는 ‘해외나들이를 적어도 2번 이상 할 것’이라는 항목도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오라는 친구도 여럿 있고, 또 갈 곳도 있을 것 같아 적어놓은 희망사항이었는데 정작 엄두를 못내다가 이번에 런던 장애인영화제를 가게 것이다. 런던까지 간 김에 독일 친구한테 들릴 작정이었는데, 갑자기 다른 친구까지 합류하게 되어 내친 김에 파리까지 들리기로 했다.

그래서 용기를 낸 것까지는 좋았는데 걱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적은 경비로 가능할까, 유럽에는 걸어다니는 구간이 많다는데 그걸 어떻게 걸어다니나, 그리고 편도 13시간에 가까운 항공시간을 잘 견뎌낼 수 있을까~

그러나 우려와는 달리 항공편을 예약할 때 휠체어를 주문했더니 빈 좌석을 끼어서 배정해주는 바람에 열 몇시간 내내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빈 좌석에 다리를 올려서 보조기를 풀어놓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는 빈 좌석이 옆에 2개나 남아있어서 누워 자가며 돌아올 정도였다. (물론 성수기 때는 이러기가 힘들겠지만)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제일 좋았던 것은 런던의 저상버스였다. 영화에서 자주 보던 빨강 2층 버스여서 팔팔한 사람들은 2층으로 올라가고, 1층에는 휠체어나 유모차, 노약자들이 널널하게 탈 수 있었다. 또 2층버스라 조심해서 그런지 버스가 요동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천천히 출발하고 천천히 내리면 되니까 갑자기 엑설레이터라도 밟을세라 허둥지둥하지 않아도 되었다.

버스를 타지 못해서 친구들이 다 가는 여학교를 가지 못한 경험이 있는데다가 어쩌다 탄 버스에서 나동그라져 앞에서 저 뒤까지 날아간 공포의 기억이 있는 나로서는 이 정도만 해도 바로 신천지가 아닐까 싶어졌다.

구석구석 찾아다니면 골목마다 다 유적이고 명소라는데 구태여 걸어다니지 않고 버스 속에 앉아 시내풍경만 바라보아도, 어디나 아름다운 고딕건물이고, 그 사이 사이로 우람한 나무들과 새파란 공원이어서 자족하기 이를데 없었다. 더구나 내셔널 갤러리나 대영박물관, 케임브릿지의 피츠윌리엄 박물관 등에서 깨끗하고 잘 작동하는 휠체어를 까다롭지 않게 그냥 빌려 쓸 수 있어서 그것도 좋았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파리 오르세 박물관에선 여권을 요구하기까지 했는데 휠체어가 어찌나 크고 무겁던지, 어깨가 아파서 도저히 혼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런던에서 영화제 일정을 마치고 두 친구와 함께 워터루 역에서 유로스타를 타고 파리로 출발했다. 새삼 인터넷이 얼마나 편리한지, 난 우리집 책상 앞에 앉아서 파리의 민박집과 유로스타 티켓까지 예약을 끝낸 다음이었다.

3시간 50분을 달려 파리 북역에 도착하여 픽업나온 민박집의 차를 타고 그 집으로 갔다. 30분이면 걸어서 에펠탑이나 상젤리제에 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버스 노선이 시내로 향한다는 안내를 믿고 그 집을 예약했는데 도착하고보니깐 뭔가 조금씩 어긋나고 있었다. 버스는 에펠탑이나 그 앞에 있는 트로카데라 광장을 지나가지도 않고 저 멀리 에펠탑이 보였다 사라졌다 할 뿐이었다.

아무리 버스 노선을 노려보아도 파리 지명은 왜 그리 길고 두 단어 이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도통 그 구조를 읽어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버스는 서울의 버스가 무색할 만큼 급정거와 급출발을 반복하는데다가 저상버스이긴 하지만 올라타고 나면 버스바닥이 또 한번 올라가야 하는 구조로 되어 있어서 힘들기는 서울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물론 휠체어나 유모차를 세울 수 있는 공간과 바로 앉을 수 있는 낮은 의자가 있긴 한데 그게 3개 정도밖에 안되는데다가 낮의 승객은 대부분 노인들이라서 양보받을 분위기도 아니었다.

낯선 관광객들은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것이 가장 편하다는데 지하철은 런던이나 파리나 (그중 독일 지하철이 가장 편리한 편이었다) 오래전에 만들어진 것이라 우리보다 더 가파른 계단이 대부분이었다. 4박 5일 동안 수없이 버스 정류장과 노선표를 노려보았지만 끝내 독파를 못하고 적당한 데서 내려 걷거나 택시를 타기도 했다. 그러나 배낭여행족도 아니고 여행사 단체도 아닌 사람들은 버스투어를 (3만원 정도 티켓 1장으로 2일 동안 이용가능) 이용하여 웬만한 시내명소는 다 다닐 수 있도록 되어 있어서 우리는 그 버스를 타고 내렸다를 반복하면서 시내를 뱅뱅 돌아다녔다.

런던에서 지하철과 기차를 갈아타면서 케임브릿지를 다녀오는 날부터 목발을 짚는 손바닥과 손목에 고장이 난 다음이었다. 목발 손잡이에 두터운 천을 감아서 그나마 쿠션을 만들고 밤이면 파스를 손에다 둘둘 감아 통증을 완화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돌아다니는 것을 멈출 수는 없어서 여행에서 돌아온 지 열흘이 지난 지금도 오른쪽 엄지손가락에 고장이 나서 힘이 주어지지 않는다. 엄지손가락이 작동이 제대로 안되면 단추도 못 잠그고, 병뚜껑도 못 열고, 가위질도 못하고 등등 못하는 일이 부지기수로 늘어난다는 것을 새삼 체득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쉬어가면서 여행하는 것이 관건이 되었는데, 런던에서는 버스를 타거나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이용하면 그게 쉬는 시간이 되었다. 휠체어를 타고 슬슬 관람을 하면서 말이다. 더구나 남의 나라에서 다 가져온 유물임을 의식해서인지 런던에서는 관람료를 전혀 받지 않는다. 옛날에 뺏긴 사람은 억울하겠지만 공짜를 누리는 현재의 나로서는 즐거운 일이었다.

그러나 파리에서는 관람료도 보통 만원 정도는 내야하고, 앞에서 쓴 것처럼 휠체어를 빌리는 과정도 엄격할 뿐 아니라 불편하기까지 하고 사람들의 태도도 런던처럼 친절하지 않았다. 더구나 버스편이 편리하지 않았으니 이래저래 불만이었다. 그런데 파리에서도 휴식처는 따로 있는 것을 알아냈으니 바로 어디에나 있는 성당이었다.

유명한 노트르담 성당과 몽마르뜨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는 사크레 쾨르 성당, 그리고 어떤 골목에도 찾아낼 수 있는 작은 성당들이 있었는데 그 성당들이 한결같이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끝을 알 수 없는 첨탑과 저 높은데까지 조각이나 스테인드글라스를 새겨놓은 그들의 첨예한 미의 구현은 절대신을 향한 경건함과 인간의 권세를 표현하기 위한 권력욕이 어우러진 것이겠지만 거기에 깃들어진 정신과 지향점은 존경하고 경탄할 만했다. 그 곳에서는 미사가 실지로 열리고 있어서 난 끝자리에 앉아 엄숙하면서도 연극적인 그 분위기에 젖어 영육의 충분한 휴식을 누렸다. 유럽의 기독교는 이젠 종교가 아닌 포괄적인 문화 기반으로 변모한 것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말이다.

- 다음에는 독일편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일찌감치 바느질을 배워 혼자서 살 궁리를 하라는 부모님의 말을 거역하고 울며 불면서 억지로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가장 되고 싶었던 것은 국어 선생님이었고 다음에 되고 싶은 것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교사임용 순위고사에서는 신체상의 결격으로 불합격되어 그나마 일년 남짓 거제도의 한 고등학교에서 임시교사를 한 적이 있고, 다음에 정립회관에서 상담교사로 근무를 하다가 2급 지체장애인인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리고 87년에는 친구처럼 듬직한 아들을 낳았고 94년에 동서문학 소설부문 신인상으로 등단을 했다. 김미선씨의 글은 한국DPI 홈페이지(www.dpikorea.org)에서도 연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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