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원버스를 타고 등하교하는 일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질 무렵 갑자기 세상 일이 모두 시들해졌다. 대학이 인생의 전부인양 여기며 학생들에게 성적의 노예가 되라고 부추기는 학교도 싫고, 말도 안 되는 학교 방침에 목숨을 거는 듯한 선생님들의 태도도 마음에 안들었다. 무엇보다 속을 터놓을 만한 친구가 없어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독서에만 매달렸기에 현실이 점점 더 삐딱하게만 보이고 관념에서 헤어나오기 힘들었던 듯하다.

물론 내게도 삼삼오오 어울려다니는 친구들이 늘 있었다. 그 나이 또래 우리들은 등하교 길이 같다는 공통점 외에도 서로에게 비슷한 점을 찾아가며 짝을 지어 다니곤 했다. 내 주변에는 주로 앞번호에 해당하는 키 작은 아이들이 있었다. 완전히 처녀 태가 나는 뒷번호 아이들은 학교의 감시에도 불구하고(그땐 영화관람도 금지되어 있었고 남학생과는 음식점에도 같이 들어가면 안되었다) 벌써부터 이성교제에 열을 올렸건만 키 작은 우리들은 동성 친구끼리 서로 싸우고 화해하고 모였다 흩어졌다를 반복하며 철없는 아이들처럼 지냈다. 그렇게 키 작은 아이들의 일원이라는 것도 어느 순간부터 유치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졌다.

정말 마음에 드는 동성친구가 있었다. 이제까지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을 만큼 강렬한 감정이었다. 수업 시간 내내, 쉬는 시간조차도 내 시선은 온통 그애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애를 쳐다보기만 해도 세상이 온통 밝아지는 느낌... 그애를 기쁘게 해줄 수 있다면 나는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였다. 그애도 나와 같은 마음이기를... 그러나 그애는 나를 다른 많은 친구들 중 하나로 여길 뿐 특별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별하게 받아들인다 해도 별로 달라질 것도 없건만 나는 크게 상심했다.

못말리는 애늙은이였던 나는 모든 대상과 깊은 관계맺기를 거부하고 늘 비껴서 있는 상태로 자신을 지켜왔었다. 그래야 상처를 덜 받으니까. 그런데 그애를 통해서 처음으로 누군가와 적극적으로 관계맺기를 시도했고 거부당했다. 이제까지 어떤 대상에게도 그토록 마음을 빼앗겨본 적이 없었는데... 그때 그 순간 그렇게 처절하게 지키려고 했던 나 자신이 ‘정말 별것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사는 게 정말 시들하게 여겨졌다. 세상이 나 같은 계집애에게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지독한 예감 때문에 지레 겁을 집어먹고 도망쳐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온통 모순투성이이며, 어른들은 모두 거짓에 싸여있는 사람들이고, 주변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유치하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밥이 먹기 싫어졌다. 억지로 먹으려 해도 도저히 넘어가지가 않아 매번 밥숟갈을 놓아야 했다. 부모형제들은 내가 학교 다니기 힘들어서 그런 줄 알고 안타까워하면서도 곧 나아지려니 여길 뿐이었다. 거의 한달 넘게 하루 한끼도 챙겨먹지 못하고 지냈다. 몸은 날아갈 듯이 가벼워졌고 정신은 더욱더 투명해졌다. 온몸의 세포들이 그렇게도 혐오스러워하는 세상과 사물에 대해 오히려 민감해지는 건 참으로 신선한 경험이었다. 냄새와 소리, 촉각과 빛에 나는 더욱더 예민해졌다. 그러면서 점점 주변의 사물들과 사람들이 내 눈과 귀와 코에 포착되기 시작하면서 그것들과 함께 있는 나 자신이 매우 사랑스럽게 여겨졌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계기가 되었는지는 어렴풋하지만, 그렇게 나는 자신을 다시 긍정하게 되고 주변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뒤 얼마 안 있어 유치해서 견딜 수 없어했던 그 친구들과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그애들과 어울려 옷을 사 입고 기차 안에서 삶은 계란을 까먹고 사진을 찍으며 낄낄거려 보니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어쩌면 내가 진정 원했던 건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아이들과 똑같이 삼삼오오 몰려다니며 웃고 재잘대고 성장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앓은 거식증 이후로 나는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게 되었던 듯하다. 결국 나는 남들과는 다른 조건 때문에 완전히 다른 세계에 머물며 비껴있기보다는 제한적으로라도 그들 속에서 함께 부대끼는 쪽을 선택했다. 그 순간의 선택으로 인해 그 뒤 수많은 어려움을 헤쳐나가야 했지만 나는 내 선택이 옳았다고 믿는다. 설령 옳지 못한 선택이었다 해도 스스로 한 선택에 대해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마음이 삶의 추동력이 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때 내가 앓았던 거식증은 삶의 중요한 순간, 선택과 결정을 앞두고 내가 혹독하게 치러낸 통과의례가 아니었던가 싶다.

김효진씨는 현재 한국장애인연맹 기획실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지체 3급의 장애여성이다. 그녀는 자신을 '자기결정권'이라는 한마디 때문에 깨달음을 얻은 바 있어 DPI에 입문한 대책없는 센티멘탈리스트라고 소개했다. 또 그녀는 섹시하지 않다느니 의존적이라느니 무능력하다느니 하는 허위의식을 유포해 장애여성을 화형(?)시켜버리는 폭력적인 세상에 도전하는 백발마녀(일명 흰머리소녀)라고 덧붙였다. 그녀의 특기는 독설이며, 특히 편두통이 심할 때는 굉장한 마녀로도 변신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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