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교사라는 직업을 동경하긴 했지만 물론 그 말을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너 같은 사람을 누가 뽑아주기나 한대?' 그러면서 비아냥거리거나 동정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대학에서 경북 지체부자유대학생회라는 ‘푸른샘’을 만나면서 이 꿈이 점점 야무져가기 시작했다.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어느 봄날, 교문 앞에서 그야말로 온몸을 흔들며 걷는 장애 남학생이 나타나더니 불쑥 이야기를 좀 하자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한 반에 나 같은 소아마비 아이들이 몇 명이나 되어서 함께 어울리기도 했지만 그 이후로는 길에서 낯선 장애인을 만나면 서로 피해주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예의처럼 여겨질 때였다.

그런데 그 남학생이 다짜고짜 따라 오란다. 그 태도가 무례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그래도 당당했고, 그러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어떤 공통점을 무시해버릴 수는 없었다. 부실한 다리를 한 발짝씩 뗄 때마다 온몸이 땅으로 꺼졌다가 다시 솟아오르는 듯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묵묵히 따라갔다. 그랬더니 그늘 밑 벤치에는 더 많은 장애인들이 모여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해서 ‘푸른샘’을 만났다.

'우리는 인간의 의미를 고난을 딛고 일어서는 강한 의지에서 찾으려 한다……우리 지체부자유대학인의 모임은 이 사회에서 하루바삐 정신적 판단기준을 육체적 판단기준보다 우위에 두는 풍토를 조성하는데 노력을 경주하고….’

이렇게 시작되는 푸른샘 설립취지문에 나는 그만 깊숙이 빠져버렸다. 더구나 ‘정신적인 판단기준을 육체적인 판단기준보다 우위에 두는’ 이 구절을 보는 순간, 난 게티스버그의 명연설을 볼 때보다 더 살 떨리는 감동을 느꼈다.

그리고 ‘부실한 인간’들과 한 패가 되어서 ‘부실하다는 것’이 얼마나 재미날 수도 있고 웃기는 유머가 될 수도 있는지를 보여주는 그야말로 이상한 집단의 열성분자가 되어서 생전 처음으로 탁구라는 것을 쳐보았고 장애인도 축구나 족구를 할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쏟아지는 장대비를 맞으면서도 산행 엠티를 강행하고, 눈 쌓인 문경세재를 난생 처음 걸어서 넘어보기도 했다. 여름에는 해마다 특수학교에 다니는 후배들이나 시설에서 생활하고 있는 장애 아이들과 함께 여름학교 캠프를 열어서 선배로서의 모범과 희망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누가 뭐라고 해도 어엿한 교사가 되어야겠다는 꿈을 키워갔다. 누구한테 물어볼 것도 없이 나는 교직과목을 신청했고, 교생실습도 무난하게 마쳤다. 그때까지 나한테 브레이크를 걸어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푸른샘 지도교수이던 안병즙 교수님은 교사를 하려면 아무래도 보조기를 해야 된다고 적극적으로 여수 애양재활병원을 주선해주시는 바람에 예약기간을 지루하게 기다리던 다른 장애인들과 달리 나는 바로 수술대 위에 올라가는 영광을(?) 누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순위고사 시험도 무난히 치루었고 합격자 명단에는 내 이름이 2등으로 올라와 있었다.

서류를 구비해서 제출해야 하는 과정에 공무원 지정병원이던 시립병원에 진단서를 떼러갔다. 그랬더니 원장이 불구자는(그때는 장애인이라는 말이 없었다) 건강진단서에 불가(不可)라고 쓸 수밖에 없는 것을 이해해달라면서 몇 번이나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공무원에 채용될 수 없는 조건 중의 하나가 ‘불구폐질자’ 라는 것이 공무원 채용에 관한 시행령이라니까 난 어쩔 수 없이 ‘불가 (不可)’라고 쓰인 진단서를 받아들고 안병즙 교수님을 찾아갔다.

그런데 마침 출장중이셔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그냥 돌아서나왔다. 그럼 밤중에라도 교수님을 찾아뵙고 상의를 해야 했는데, 멍청하게 혼자서 그 밤을 지새운 나는 다음 날 교육위원회를 찾아갔다. 인상이 너무 좋게 생기신 장학사는 이런 저런 내 이야기를 아주 동정심 깊게 잘 경청해주더니 일단 서류를 두고 가면 의논해보겠다는 대답을 해주었다.

그리고 결과는 탈락이었다. 면접에서 탈락이 되면 항의라도 할 수 있겠지만 나는 내 손으로 결격된 서류를 그들 앞에 갖다가 바치고 말았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절망에 빠져 두문불출하고 있는데 거제도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임시교사가 필요하니까 와줄 수 있겠느냐는 내용이었다. 나야 지금이라도 달려가고 싶지만 사실은 서류에서 떨어진 처지라고 솔직히 말했더니 그쪽 왈, 선생님 같은 분이 학생들을 가르치면 얼마나 더 교육적이겠느냐고 당장이라도 오라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그쪽의 마음이 바뀔까봐 나는 부랴부랴 짐을 챙겨서 달려갔다. 그랬더니 교장선생님이 전교직원과 함께 성대한 환영잔치를 벌려놓고 자취방과 밥집까지 다 구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서무과장과 함께 시립병원에 가서 형식적인 진료만으로 건강검진에 가(可) 판정을 받았다. 이미 교장이 부탁을 해놓은 상태라는 것을 서무과장이 누누이 강조했다.

-다음에 계속.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일찌감치 바느질을 배워 혼자서 살 궁리를 하라는 부모님의 말을 거역하고 울며 불면서 억지로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가장 되고 싶었던 것은 국어 선생님이었고 다음에 되고 싶은 것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교사임용 순위고사에서는 신체상의 결격으로 불합격되어 그나마 일년 남짓 거제도의 한 고등학교에서 임시교사를 한 적이 있고, 다음에 정립회관에서 상담교사로 근무를 하다가 2급 지체장애인인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리고 87년에는 친구처럼 듬직한 아들을 낳았고 94년에 동서문학 소설부문 신인상으로 등단을 했다. 김미선씨의 글은 한국DPI 홈페이지(www.dpikorea.org)에서도 연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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