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하고 싶었던 일 중에서 두 번째는 교사가 되는 일이었다. 식솔들은 많고, 먹고 사는 일은 고달프기 그지없었던 옛날, 한집에 보통 대여섯 명씩 되던 아이들이 길가의 돌멩이나 바람처럼 저절로 뒹굴면서 자라던 그 시절에 그나마 천둥벌거숭이들의 심성을 다듬어주고 내면을 인정해주던 사람이란 다름 아닌 학교 선생님이었던 것이다.

초중고 12년 동안 만났던 선생님들을 평균적으로 말하자면 다 좋으신 분들이었고 이런저런 영향력을 남겨주셨다. 그 중에는 상처를 주신 분도 없잖아 계셨지만 말이다.

고3 때 담임은 수학담당이셨는데 소위 학원 스타일이라고 그랬다. 수업시간은 거의 개그맨 수준으로 인기몰이를 했지만 인간적으로는 무심해서 주어진 업무 이상은 접근하지 않는 분이셨다.

난 고3때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데다가 장래에 대한 불안감과 내적인 방황이 극도에 달해 있어서 그걸 견디지 못하고 담임과 진로상담을 하던 시간에 대학을 포기한다고 그래버렸다. 우리 반은 대학진학을 목표로 하는 우수반으로 편성되어 있는데다가 개인적으로는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2등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학교에서 주목받던 학생이었다. 그런데도 담임의 응답은 간단하게 “알았다” 한 마디 뿐이었다. 졸업 후 생활기록부를 떼러 갔더니 그 담임의 나에 대한 평가는 이렇게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선천성 소아마비 환자임"

그러나 그런 삭막한 관계 이상으로 후한 선생님을 여러 분 만났는데 그 중 대표적인 분이 국어를 가르치시던 이재금 선생님이셨다.

시인이신 선생님은 숨 가쁘게 돌아가는 고3 당시에도 일주일에 한 시간을 꼭 작문으로 할애하여 잘 쓴 학생들의 작품을 읽어주고 평가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시간이면 내 글은 늘 단골로 올라왔고 그 중에서도 빼어나게 평가해주셨고, 우리 반뿐 아니라 이 반, 저 반으로 들고 다니시면서 읽어주곤 하셨다. 늘 하수구에 처박힌 것처럼 온갖 고민에 빠져 있던 나로서는 유일하게 그 시간만큼은 자존감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건 내가 잘해서 그러려니, 오만함을 가지기도 했는데 이제 생각해보면 나를 격려해주시기 위해 더욱 과잉평가를 해주셨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시골에서 대학진학 우수반에 들어가느라고 남학생 45명에 여학생 2명 중의 하나였고 그나마 하나 밖에 없는 여학생 짝꿍은 고향 읍내에서 몇째 가는 부잣집 딸로 활달하기 그지없었다. 난 지금은 오히려 건강해진 편으로 그때는 신경성 위장병을 늘 달고 다녀서 툭 하면 화장실로 쫓아가야 하는 얼굴이 노란 여자 아이였었다.

옛날 김동리, 서정주 등 우리나라 문학의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가르치고 있던 서라벌 예대를 졸업하신 선생님은, 동문수학 하던 동기들 중에는 이문구, 조정래, 한승원 오정희 같이 쟁쟁한 분들이어서 나는 선생님과 함께 교지를 만들면서 그 분들께 원고청탁서를 보내기도 했다. 방학 때면 혼자 토굴 속으로 들어가 글을 쓰곤 하시던 선생님은 선병질적으로 내 속에 눌려 있던 감성을 헤아리고는 그렇게 격려를 해주셨던 것이다.

그렇게 졸업을 하고 너무나 막막해서, 어느 날 문득 선생님을 찾아갔더니 오토바이 뒤에 태우고는 선생님의 고향을 한 바퀴 빙 둘러주셨다.

"미선아, 힘들 때면 하늘을 올려다 보거라." 그리고 또 해주신 말씀이 있다.

"네가 지금 알고 있는 것보다 세상은 훨씬 더 크단다."

뒤에 늦게서야 대학을 진학하고, 임시교사 생활을 하고, 그리고 서울 정립회관에 취직이 되어 올라오게 되고, 문단에 등단했을 때에도 나에 대한 모든 소식은 선생님에 의해 모교나 고향 분들에게 알려졌다. 선생님은 언제나 나를 보증해주시고자 기다리고 계시는 분 같았다.

이 선생님 말고도 잊지 못할 분이 또 한분 계셨는데, 민병길 선생님이셨다. 이 분은 법대를 나오셔서 사회와 수학을 가르치시던 분으로 내가 대학을 포기하고 집에서 고민하고 있는 것을 아시고는 자주 나를 부르러 오셨다. 어떤 때는 집 앞에서 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도 여러 번이셨는데 만나면 선생님 댁이나 술집이나 어디에서든지 술 한 병을 앞에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면서 나한테 주식투자를 가르쳐주시려고 하셨다.

"주식투자만 잘 해도 먹고 사는 건 지장이 없다” 그러시면서 내가 살 방도를 찾아주고 싶어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정석 주식투자로 성공하기에는 너무나 이른 우리나라의 1970년대, 선생님은 이런저런 실패를 경험하시더니 이른 나이로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다. 말없이 나를 지켜보시던 선생님의 애틋한 사랑이 아직도 가슴에 저리듯이 남아 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나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이재금 선생님 같은, 그리고 민병길 선생님 같은.......학생들에게서 숨어 있는 자질을 찾아내고 때로는 그 아픔을 쓸어주고 기다릴 줄 아는 그런 선생님이.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일찌감치 바느질을 배워 혼자서 살 궁리를 하라는 부모님의 말을 거역하고 울며 불면서 억지로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가장 되고 싶었던 것은 국어 선생님이었고 다음에 되고 싶은 것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교사임용 순위고사에서는 신체상의 결격으로 불합격되어 그나마 일년 남짓 거제도의 한 고등학교에서 임시교사를 한 적이 있고, 다음에 정립회관에서 상담교사로 근무를 하다가 2급 지체장애인인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리고 87년에는 친구처럼 듬직한 아들을 낳았고 94년에 동서문학 소설부문 신인상으로 등단을 했다. 김미선씨의 글은 한국DPI 홈페이지(www.dpikorea.org)에서도 연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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